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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듣기 등록 2020.10.19 07:06 수정 2020.10.19 07:06
남부러울 게 없던 삶이었다. 번듯한 집과 직장이 있었고 가족·지인들과의 관계도 원만했다. 하지만 딱 한 번의 큰 실패는 삶의 결을 180도 바꿔 놓았다. 제일 먼저 사람이 떠났다. 가족과의 연은 맥없이 끊어졌다. 지인들도 떠났다. 살아남겠다고 다짐했다. 늦은 나이에 시작할 수 있는 일이란 많지 않아서 그는 몸 쓰는 일을 선택했다. 현장에서 시멘트와 벽돌을 어깨에 실어 날랐다. 이번엔 건강이 문제였다. 벽돌의 무게는 허리로 전해졌고 디스크는 가까스로 일으킨 삶을 다시 한 번 무겁게 짓눌렀다. 돈과 사람, 건강까지 잃어버린 중년은 기초생활수급자로 인정받았지만 지원금으로 살 수 있는 집은 대학동에 위치한 고시원 하나였다. 그렇게 중년은 남은 삶의 의지를 곰팡이 핀 0.8평짜리 방에 욱여넣었다.

닮은꼴 사연들

대학동 고시원에 살고 있는 중년. 그들이 그리는 삶의 궤적은 꼭 누군가가 짜 맞춘 것처럼 닮아 있었다. 몰락의 계기만 달랐다. 누군가는 오랜 고시 준비 끝에 낙오했고, 누군가는 IMF 외환위기의 여파로 사업을 접어야 했다. 절도·폭행과 같은 범죄를 저지른 이도 있었다. 다양한 사연이 있지만 이들의 삶은 결국 대학동 고시원으로 수렴하고 있었다. <오마이뉴스>는 한국도시연구소에 의뢰해 지난 8월 10일부터 8월 21일까지 서울 관악구 대학동 고시원·원룸에 사는 세입자 100명을 대상으로 심층 설문조사를 총괄했다. 조사는 대학동에서도 주거비가 저렴한 고시원이 많은 '윗동네'를 중심으로 이뤄졌고, 주거 최빈곤층으로 분류되는 거주민들에 대한 개별 심층 인터뷰도 했다. 설문조사를 통해 나이를 파악할 수 있었던 응답자는 총 98명이었다. 이들을 연령별로 분류해 보면 30대 38명, 40대 19명, 50대 15명, 60대 19명, 70대 7명이었다. 40~60대 중년은 응답자의 절반이 넘는 53명으로 집계됐다. 응답자들은 대부분 최저임금도 벌지 못하는 저소득층이었다. 조사대상자 100명의 지난해(2019년 1월 1일~12월 31일) 월 평균 소득은 평균 93만6600원이었다. 지난해 최저임금(월급 기준) 174만5150원의 절반 수준이다. 마땅한 벌이가 없어 생계급여와 주거급여 등 기초생활보장제도의 도움을 받는 사람은 전체 응답자의 22%(22명)였다. 지난 2018년 기준 전국 기초생활수급자 비율이 3.4%인 것과 비교하면 고시촌 거주민들의 수급자 비율은 그보다 약 7배 높은 셈이다. 기초생활수급을 신청했다가 떨어진 사람들도 12명이었다. 이들까지 합할 경우, 기초생활수급에 기대야 할 만큼 경제 상황이 열악한 거주민 비율은 34%(34명)로 올라간다. 이들이 경제적으로 무너져 내린 데는 다양한 이유가 있었다. 설문조사에 응했던 이상현(66, 가명)씨는 한때 잘나가는 대기업 사원이었다. 하지만 지인에게 보증을 잘못 서줬다 빚더미에 올랐고 삶은 산산조각이 났다. "직장에서 회계 관련 일을 했어요. 처음엔 대기업에 다니다가 도중에 중견 기업으로 옮겼고요. 그때 보증을 잘못 서 빚더미 올랐어요. 그것 때문에 이혼도 했죠. 경제적인 영향이 컸어요." 조남현(60대, 가명)씨 역시 한때는 잘나가는 엔지니어였다. 가정도 단란한 편이었다. 하지만 갑작스런 사업 실패로 부부 사이가 틀어졌고 오랜 별거에 들어갔다. 현재는 이혼 절차를 밟고 있다고 했다. "엔지니어로 일하면서 기계를 개발하고 기술 서적을 쓰기도 했어요. 대학 교수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할 만큼 잘 나갔었는데 사업을 벌였다가 쫄딱 망했어요. 지금은 대출한 돈으로 살고 있어요. 근데 지금 대출금도 거의 다 써서 미치겠네요."
위기의 상황에 놓인 대학동의 중년들은
가족·지인들과의 관계 단절을 경험했다.
상당수는 경제적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일자리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비좁은 고시원에 홀로 사는 이들에게
고독사는 더 이상 남 일이 아니다.

관계 단절→건강 악화→경제적 궁핍의 악순환

위기 상황에 놓인 대학동의 중년들은 가족·지인들과의 관계 단절을 경험했다. 조사 대상인 100명 가운데 가족과 연락이 끊어졌다고 답한 사람은 23명이었다. 미혼(79명)이 많았지만 이혼을 했다는 사람 또한 11명(11%)으로 적지 않았다. 가족을 포함해 연락하고 지내는 지인이 한 명도 없다고 답한 이들 또한 14명이었다. 조사 결과 상당수는 경제적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일자리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조사 대상 100명 중 현재 일을 하지 않고 있는 사람은 61명이나 됐다. 연령대별로 보면, 50대의 53.3%, 60대 84.2%가 '일을 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40대도 21.1%가 일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보통 중장년층은 '일하는 연령층'으로 여겨지지만 대학동 중년들의 상황은 달랐다. 일을 하는 사람 중에서도 안정적인 직장을 다니는 사람은 소수였다. 일자리가 있다고 답한 45명 중 22명(48.9%)은 아르바이트였고, 비정규직(계약직)은 12명(26.7%), 공공근로도 4명(8.9%)이었다. 안정적인 정규직을 가진 사람은 6명(13.3%)에 불과했다. 건강상의 이유로 일을 '안'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처지에 놓인 경우도 많다. 인생의 절반을 교도소에서 보낸 홍경환(50대, 가명)씨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오랜 수감 생활을 마치고 사회에 복귀한 홍씨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일용직 노동일뿐이었다. 그는 월 200만원을 벌기 위해 새벽같이 동탄의 한 건설 현장으로 출근해 밤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딱 3개월째 되던 날 시멘트를 나르다 허리를 찌르는 통증이 느껴졌고 그 뒤로 무거운 짐을 들 수 없게 됐다. "제가 합리화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부모님도 돌아가셔서 없고 형제는 있어봐야 먹고살기 바쁘고, 그러다보니 수시로 '그런 데'를 들어갔어요. 절도가 반복돼서 그렇지 큰 범죄는 아니었어요. 그래도 이젠 나쁜 짓 안 하려고 그곳에서 나와 노동을 했어요. 그런데 일한 지 딱 3개월째 허리를 다쳤어요. 계속 통증이 있는 건 아니고 1년에 1, 2번씩 디스크가 와요. 갑자기 신경이 눌려버리면 대소변도 못 가릴 정도에요." 돈을 벌 수 없게 된 그는 현재 기초생활수급자로 정부의 도움을 받고 있다.

주거비 부담에 식비 줄이고 병원 치료 포기

건강이 악화해도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빈번하다. 이번 조사에서 최근 1년 간 아팠지만 치료를 받지 못하거나 중도포기한 사람은 100명 중 32명으로 나타났다. 치료를 받지 않은 이유로 '치료비 부담'을 꼽은 사람은 24명. 건강 보험료를 체납해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도 2명 있었다. "왼손잡이인데, 어깨가 계속 아프더라고요. 어쩔 때는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아파요. 오십견인가 뭔가 꾸준히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하는데 못 나가고 있어요. 어깨 아프기 전엔 산에 산책도 가고 했는데, 요즘엔 그런 운동도 잘 못해요" 최영운(60, 가명) 사회적 관계 단절과 경제적 빈곤, 이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그래서 대학동을 찾았다. 대학동은 서울 지역에서 임대료가 가장 저렴한 축에 속한다. 부동산 정보 플랫폼 다방이 지난해 6월부터 올해 6월까지 서울 지역 원룸과 투·스리룸 보증금을 1000만원으로 일괄 조정해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서울시 전체 평균 월세는 56만원이었다. 전월세 전환율 4%를 적용해 보증금 없는 월세 수준을 추산하면 약 60만원이 된다. 대학동 고시원 월세는 그 절반이 채 안 된다. 설문 응답자들의 임대료를 보면, 보증금이 없는 경우(66명) 평균 월세는 23만9044원으로 나타났다. 보증금이 있는 월세에 사는 30명도 평균 보증금이 184만원, 월세는 34만4375원이었다. 실제로 거주민 100명 중 60명은 대학동 고시원을 선택한 이유로 '저렴한 임대료'를 꼽았다. 보증금 없는 월세에 살고 있는 66명 중 21만~25만원의 월세를 내고 있다고 한 사람은 18명. 그밖에 16만~20만원은 14명, 26만~30만원은 13명이었다. 15만원 이하의 월세를 내는 사람은 12명, 30만원이 넘는 월세를 내는 이들은 9명이었다. 대학동에서 주거급여를 받아 살고 있는 김상민(50, 가명)씨는 "서울에 사는 1인 가구에게 주어지는 주거급여는 26만원쯤"이라며 "30만원이 넘는 월세를 살기 위해서는 그만큼 돈을 추가 부담해야 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30만원짜리 월세에 살기는) 어렵다"고 했다. 결국 몰락한 중장년층은 받을 수 있는 주거 급여 액수보다 월세가 싼 곳을 찾을 수밖에 없다. 심지어 주거급여 대상자가 아닌 이들은 월세 10만원대인 곳으로 내몰린다. 하지만 그마저 부담을 느끼는 이들이 많았다. 100명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49명은 '주거비 부담을 느끼고 있냐'는 질문에 '그렇다'(35명) 혹은 '매우 그렇다'(14명)고 답했다. 100명 중 44명은 주거비 부담에 식비까지 줄여야 했다고 고백했다. "닭장을 보면 비좁고 다닥다닥 붙어 있잖아요. 지금 살고 있는 곳이 그래요. 한 평도 안 될 거예요. 우리는 닭이고 주인한테 사육당하는 거 같아요." 이희석(62, 가명) "싼 방을 얻으려고 이 동네로 왔어요. 16만원짜리 여기가 최고 싼 방이에요. 그런데 여기가 한 평은 되나? 아마 안 될 거예요. 그런 데서 낙도 없이 사는 게 제일 힘들어요. 가진 자들은 안 그러겠지만 없는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가요." 홍경환(50대, 가명)

지난 1년 동안 거주하면서 주거비가 부담스러우셨습니까?

주거비 부담 때문에 식료품비나 식사비용을 줄인 적이 있습니까?

중·장년 1인 가구를 위한 공공주택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사회복지사나 상담사를 만나 상담한 적이 있습니까?

<오마이뉴스>는 한국도시연구소에 의뢰해 지난 8월10일부터 8월21일까지 서울 관악구 대학동 고시원·원룸에 사는 세입자 100명을 대상으로 심층 설문 조사를 총괄했다.

'잠만 자는 방'에 갇힌 이들, 이대로 계속 잠들라

대학동 고시원 방은 싼 대신 비좁다. 100명 중 42명(42%)이 고시원 생활에서 가장 불편한 지점으로 '좁은 방'을 꼽았다. 식사(27명) 문제를 언급한 사람도 상당수였다. 대다수의 고시원들이 월세를 낮추기 위해 그야말로 '잠만 잘 수 있는' 최소한의 시설을 갖추고 있는 탓이다. 100명 가운데 49명은 공동 부엌이 없는 고시원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이들이 찾아낸 대안은 무료급식소다. 조사 결과 대학동 무료급식소인 해피인에서 끼니를 해결하는 사람은 26명이었다. 편의점에서 라면과 빵, 도시락 등으로 식사하는 사람들 또한 31명에 달했다. 비좁은 고시원에 홀로 사는 이들에게 고독사는 더 이상 남 일이 아니다. 100명 가운데 23명은 고독사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연령이 올라갈수록 두려움은 더 커졌다. 40대는 16.7%, 50대는 20.0%, 60대는 44.4%가 고독사를 걱정했다. 앞서 최영운씨의 말이다. "주변을 보면 문제가 있을 때 대부분 구청에서 처리를 하더라고요. (한 지인은) 죽었는지도 몰랐는데 나중에 굶어죽었다고 하더라고. 어떻게 하다보면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특이한 것은 비교적 젊은 나이인 30대도 고독사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8.8%)이 있었다는 점이다. 송인주 서울시복지재단 팀장은 "홀로 사는 1인 가구는 연령이 높을수록 고독사 위험에 대해 높게 인지하는 게 당연하다"면서도 "30대에도 고독사 두려움이 있다는 응답이 나온 것은 대학동의 젊은 세대도 취약한 환경에 놓인 사람이 있다고 해석할 수 있는 지점"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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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사회경제부 소속입니다. 주로 땅을 보러 다니고, 세종에도 종종 내려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