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2 08:30최종 업데이트 20.09.02 08:30
  • 본문듣기
김천 수도산에는 이야기가 많다. 그 이야기 속에는 등장인물들이 있다. 통일신라 헌안왕 3년 도선국사가 절터를 잡고 기뻐서 춤을 추면서 '앞으로 무수한 수행자가 나올 것'이라며 절 이름을 수도암이라 하고 수도산이라 칭했다고 한다. 수도암에서 수도산까지는 2㎞가 떨어져 있다.
 

무흘구곡의 6곡인 옥류정이 수도산 와이너리 가는 길에 있다. ⓒ 막걸리학교

 
수도산 정상은 해발 1,317m이고, 건너편 신선봉은 1,313m이다. 수도산 청암사 극락전은 숙종의 둘째 부인이었던 인현왕후가 장희빈의 무고로 서인으로 강등되어 머물렀던 곳이다.

수도산에서 흘러내린 대가천이 굽이굽이 절경인데, 조선 중기 유학자 한강 정구는 이곳을 무흘구곡이라 이름 짓고 절경마다 7언절구의 시를 남겼다. 어사 박문수가 사경을 헤매다가 살아난 이야기도 수도산 목통령 아래의 원황점 마을에 전해온다.


수도산 와이너리를 가는 길의 백천교에서 바라보니, 급한 여울 너머로 무흘구곡의 6곡인 옥류동 정자가 보이고, 국가대표 마라톤 감독 정봉수 기념비도 보인다. 정봉수 감독은 마라토너 황영조와 이봉주를 길러낸 인물로, 이 고장 증산면 출신이다. 기념비 맞은편 캠핑장에는 한강 정구의 옥류동 시가 새겨져 있다.

여섯 굽이라 초가집 여울 가에 놓였으니/ 六曲茅茨枕短灣
어지러운 세상사 가리운 게 몇 겹인고/ 世紛遮隔機重關
고고하던 은자여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 高人一去今何處
풍월만 남아 더없이 한가롭네/ 風月空餘萬古閑


찾아간 수도산 와이너리는 지금도 은자가 살 만한 동네였다. 와이너리가 비탈진 산자락에 앉았는데, 주변 산세와 어우러져 별장에라도 와 있는 기분이었다. 길이 멀고 산이 깊어, 하룻밤을 머물 작정으로 찾아왔는데, 밤이 되자 가로등 하나가 동굴 속의 불빛처럼 멀어보이고, 별이 박힌 밤하늘은 천정처럼 가까워보였다. 그 밤에 수도산 와이너리의 백승현 대표와 긴 이야기를 나눴다.

복서 출신 와인 와이너리 대표
 

정통와인, 유기농와인을 추구하는 수도산 와이너리의 백승현 대표 ⓒ 막걸리학교

 
수도산 와인의 이름은 크라테(Krate)다. 크라테(Crater)의 이탈리아식 표기인데 화산 분화구를 뜻한다. 그가 사는 증산면(甑山面)은 마을 시루봉에서 따온 이름이고, 그는 시루가 분화구처럼 생겨서 크라테라 이름지었다. 그는 크라테를 소개하면서 스스로를 "자연의 링 위에서 한국 와인 챔피언"이 되겠다고 했다. '자연의 링'이라는 말이 궁금했다.

그는 복서였다. 그는 고등학교 때부터 복싱을 했고, 주니어라이트급으로 프로 복서에 데뷔했다. 그는 세계챔피언이 된 오광수, 동양챔피언인 김상호와 같은 체육관에 소속되어 활동하다가 3전 2승1패의 기록으로 링에서 내려왔다. 군대 가서 몸 관리를 소홀히 한 것이 권투 선수로서의 수명을 단축시켰다.

이십대 후반에는 목욕탕 때밀이도 하고, 일수 받는 일도 하고, 경비 회사에서 경호 일도 했다. 체육관에서 알던 사람들의 소개로 일을 하다보니 힘을 쓰는 일이 많았다. 그러다 문득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싶어 고향 마을로 돌아가기로 했다. 고향에 내려가면 욕심없이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스물아홉살에 결혼하고, 서른살에 고향으로 증산면 금곡마을로 돌아왔다. 그게 20년 전 일이다.

그는 정통 와인을 만들고 싶었다. 수입산 품종이 아니라 국내 자생하는 품종으로 레드 와인을 만들기로 하고, 2001년에 파주 감악산에서 산머루 묘목 500주를 구해와 수도산에 심었다. 와인을 독학하면서 2003년부터 산머루 와인을 빚기 시작했다. 그 뒤로 경북 농민사관학교를 다니고, 농촌진흥청의 와인심화과정, 경북대 특산주제조과정을 다니며 공부를 했다.

그는 내추럴 와인을 추구하고 있다. 화학 비료를 사용하지 않고 농사를 짓고 와인을 담그려고 한다. 부엽토, 소똥, 와인찌꺼기를 섞어 2년 이상 땅을 숙성시키면 지렁이가 생기고 땅이 거름져진다. 화학 비료를 사용하면 머루나무 한 그루에 10kg의 머루가 달리는데, 그렇지 않으면 3~5kg이 달린다. 그래도 그는 자연의 섭리에 따르려 한다. 그가 경영하는 땅은 5천평인데, 그 안에 대략 5천주가 자라고 있고, 그 나무에서 해마다 5천병의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그는 이탈리아의 아마로네 와인 공법을 추구하고 있다. 아마로네는 '맛이 쓰다'라는 뜻이라 드라이 와인을 닮았지만, 일반 드라이 와인과는 또 다르다. 아마로네 와인은 달콤한 와인을 만들기 위해서 포도를 건조해서 농축시켜 만들다가 우연히 완전 발효가 되어 담백하고 쓴맛이 도는 와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머루의 당도를 높이기 위해서 가을에 서리내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수확한다. 그러면 수분기가 증발하여 머루가 얼마간 농축된다. 아마로네는 수확하여 말리지만, 그는 나무에서 농축되기를 기다리는 셈이다. 그가 내게 건넨 머루와인 2015년산은 22브릭스가 나와서 알코올 11.5%가 되었고, 오크통에 숙성시켰더니 알코올이 더 순해져 있었다.

당도가 높으면 보당(와인의 도수를 높이기 위해 알코올 발효 중 포도즙에 설탕을 첨가하는 기법)을 하지 않아도 원하는 알코올 도수가 나온다. 수확철에 날씨가 좋지 않아서 원하는 당도가 나오지 않는 경우에는 그도 불가피하게 보당을 한다. 그가 만들어서 지하 숙성고에 숙성시키고 있는 와인의 60%는 보당하지 않은 제품들이다.

그는 다양한 와인을 만들기 위해서 머루 외에도 양조용 포도 1500주 정도를 재배하고 있다. 김천시가 스페인의 비야로블레도시와 자매 결연을 맺고 양조용 와인 묘목을 들여와 시험 재배를 하고 있는데, 그 나무의 일부가 그의 밭에서도 자라고 있다.

그를 따라 비탈진 그의 포도밭을 가보았다. 그물막을 치지 않으면 포도의 단맛이 돌 무렵에는 산짐승과 산새들이 달려들어 열매가 하나도 남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가 그물막을 넘어 포도밭으로 들어서니 화들짝 놀라 달아나는 산짐승이 있었다. 어린 노루 한 마리인데, 들어오기는 했지만 나가는 길을 몰라 돌담 밑에서 몇 번을 미끄러지더니 용케 찢어진 그물막을 비집고 달아난다.

수도산을 지키는 포도밭 사나이

그의 밭에는 스페인 와인의 대표 품종으로 타닌의 질감이 좋다는 템프라니요(Tempranillo)가 있고, 산도가 좋다는 가르나차(Garnacha)가 있고, 카탈루냐 지방이 고향이라는 모나스트렐(Monastrell), 그리고 화이트 아이렌, 마카베오 들이 자라고 있었다.

그는 새 품종의 경우는 5년 동안은 키우면서 토양과 기후 적응도를 봐야 본격으로 재배할 수 있다고 했다. 템프라니요만 하더라도 껍질이 뚜껍고 알이 가득 차게 매달리는데 수확기에는 열매가 터지는 현상이 발생한다고 했다.
 

수도산 깊은 곳에 자리잡은 수도산 와이너리. ⓒ 막걸리학교

 
그를 뒤따르면서 비슷비슷하게 생긴 포도나무의 특징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산머루는 알이 성글고 작은데 속 씨앗은 굵다. 신맛이 강한 편으로 새콤달콤한데, 껍질이 얇아서 탄닌이 적고 바디감도 약하다. 산머루는 넝쿨순이 옆으로 많이 나오는데 그냥 두면 10m도 넘게 자란다. 그는 산머루의 넝쿨이 3m가 넘지 않도록 잘라준다.

독일 청포도인 리슬링은 줄기가 억세고 잎이 굴곡이 많이 져 있고 표면이 거칠고 두텁다. 배수와 통풍이 잘 되고 햇볕이 잘 들어야 잘 자란다. 다행히 그의 밭은 마사토이고 동쪽을 바라보고 있어서 리슬링이 자라기에 적합하다. 리슬링은 익을 무렵이면 탈색이 되는데 당도가 20브릭스가 넘는다. 리슬링 와인은 산미가 좋아서 술맛을 산뜻하고 상큼하게 만들어주기에 그는 브랜딩용으로 사용한다.

레드레네스쿨은 100주를 키우고 있는데 일본이 원산지인 청포도 품종이다. 알이 단단하고 질기고 신맛이 강하고 당도가 높고 향이 좋다. 한국 청포도와 다른 향이 돌아서 브랜딩용으로 키우고 있다.

농촌진흥청에다가 문의해도 품종을 알지 못하는 그래서 변이종으로 여겨 '크라테'라고 그가 명명하고 있는 품종을 1000주 정도 재배하고 있다. 잎은 톱니바퀴처럼 생겼고 포도알이 타원형이다. 과육이 두텁고 타닌 성분이 많은데, 알이 커서 10송이로 와인 1병을 만들 수 있다. 생과용 캠벨얼리와 같은 색인데, 발효하면 연한 빛깔이 돌아서 로제 와인이나 스파클링 와인을 만들어도 좋다.

포도밭을 돌아보던 그가 문득 발밑의 흙을 파서 한움쿰 손에 쥐어본다. 손가락 사이로 흩어지는 검은 흙이 그의 그을린 피부와 잘 어울린다. "땅을 지켜주면 좋은 술은 저절로 따라옵니다." 수도산을 내려오는 데 그의 말이 쟁쟁하다. 그는 수도산에 새로운 이야기를 보태고 있는 또 한 명의 등장인물이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