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8 20:00최종 업데이트 20.07.18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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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대선 결선투표에서 패배한 후 기자회견을 하는 라파우 트샤스코프스키 바르샤바 시장. 2020. 7.12 ⓒ 연합뉴스

 
지난 12일 폴란드 대통령 선거에서 안제이 두다 현 대통령이 간발의 차이로 야당 후보를 누르고 재선에 성공했다. 야권 후보로 나선 라파우 트샤스코프스키 바르샤바 시장은 짧은 선거 준비 기간에도 불구, 선전을 펼쳤으나 집권세력의 전방위적 파상 공세를 막지 못하고 최종 득표 48.97%를 얻어 51.03%의 두다 현 대통령에 패했다.

이번 선거는 승패를 떠나 폴란드가 직면한 사회적 갈등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줬을 뿐 아니라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21세기 지구촌 모든 지역에 무거운 숙제를 남겼다.


"열 배나 더 흥미로운 나라"

독일 일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이 괴테의 말을 인용해 이번 폴란드 대선 결과를 보고 내놓은 관전평이다. 역사적으로 다툼이 많았던 인접 국가의 정치 관전평이라 몇 차례 곱씹게 되지만 어쨌든 민주주의 역사에서 폴란드가 독일보다 젊은 것은 사실이다. 젊은 사회에서는 경험된 축적치가 상대적으로 적은 만큼 예상하기 어려운 변수도 많다. 예상하기 어려운 다양한 변수는 또한 젊은 사회의 역동성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1989년 이래 대통령제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폴란드는 지금까지 여섯 명의 대통령을 배출했다. 그중 공산체제의 당 서기장으로 재직하다 대통령제 전환 후 의회 선거로 초대 대통령에 선출된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 초대 대통령을 제외한 다섯 명의 대통령이 직접선거로 국민의 선택을 받았다.

둘로 갈라진 폴란드

폴란드의 민주주의를 말할 때 흔히 가장 많이 언급되는 인물이 2대 대통령이었던 레흐 바웬사다. 자율 노조를 이끌며 공산 체제에 저항한 끝에 큰 비극 없이 민주 폴란드를 이뤄낸 힘으로 첫 민선 대통령이 됐다. 현재 폴란드 대부분의 정치세력의 뿌리는 이때 바웬사와 함께 한 동지들에서 유래한다.

폴란드 민주화의 상징 바웬사는 대통령이 된 후 빼어난 정치력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세력이 분화되면서 다음 대선에서 옛 공산당의 후예인 사회민주당이 내세운 후보 알렉산데르 크바시니에프스키에게 대통령직을 넘겨주기도 했다. 분화된 바웬사의 동지들 가운데 카친스키 형제들이 세운 법과 정의(PiS)가 2005년 바웬사 이후 10년 만에 다시 대권을 찾아온다. 쌍둥이 형제 가운데 15분 차 동생인 레흐 카친스키가 폴란드의 네 번째 대통령이 되고 형 야로슬라프 카친스키는 동생 대통령 하에서 잠시 총리를 역임하기도 했다.

바웬사 이후 또 하나의 우파 세력은 이번 선거에서 아깝게 패한 시민연단(PO)이다. 2001년 설립된 중도우파 정당 시민연단은 훗날 유럽 이사회 의장을 맡게 될 도날드 투스크와 안제이 오레초브스키 등이 주도해 설립됐으며 하원의장이던 브로니스와프 코모로프스키가 법과 정의 출신 카친스키 대통령의 비극적 사망 후 임시 대통령에 이어 5대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법과 정의(PiS)와 시민연단(PO)은 이렇게 폴란드 정계의 양축으로 자리 잡으며 오늘에 이른다. 법과 정의(PiS)가 철저한 반공주의와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보수우파를 이룬다면 시민연단(PO)은 온건 보수주의를 표방하면서 유럽 기독교 민주주의의 전통을 이어간다. 법과 정의(PiS)가 주로 노년층과 농촌, 저소득층을 주요 지지기반으로 삼으며 반유럽적, 민족주의적 이념을 따른다면 시민연단(PO)은 청년층과 도시민들의 지지를 얻으며 친유럽적이고 미국과의 동맹을 중시하는 제3의 길을 지향하고 있다.

폴란드 제3공화국의 여섯 번째 대통령이자 이번에 재선된 안제이 두다는 이러한 정치 배경을 토대로 하고 있다. 대통령제이면서 의회의 권한이 상대적으로 강한 폴란드 정치제도는 그런 이유로 프랑스식 이원집정제 하에 분류되기도 한다. 폴란드의 대통령은 독일이나 이탈리아의 대통령보다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으나 미국이나 한국의 대통령과 달리 총리와 권력을 양분하고 있다.

3공화국 이래 역대 가장 젊은 대통령인 두다는 이런 체제 안에서 집권여당인 법과 정의(PiS)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고 있다. 이원집정제 하에서는 책임 내각을 구성하는 여당의 실질적 리더가 대통령의 권한을 넘어서는 일이 빈번할 수밖에 없다. 현재 법과 정의(PiS)의 실질적 리더는 당의장을 맡고 있는 전 대통령 레흐 카친스키의 쌍둥이 형 야로슬라프 카친스키다.

형 카친스키는 자신이 직접 설립해 이끄는 동안 당의 부침을 모두 경험한 베테랑이자 실질적 당의 대주주다. 그는 폴란드 국민들이 서유럽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질시와 무기력증을 동물적 감각으로 간파하고 있다. 두다 대통령이 집권하고 있는 동안 카친스키는 "보수혁명" 명목 하에 국가의 체질을 완전히 개조해 놓았다.

동유럽을 물들인 폴란드식 정치

두다 대통령의 1기 집권 기간 동안 폴란드의 거의 모든 권력기관은 서서히 법과 정의(PiS)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이들은 언론을 장악했고, 법을 바꿔 사법기관들마저 통제할 수 있게 됐다. 그러는 동안 국가의 건강보다 자신들의 불룩해지는 주머니에 더 관심을 둔 국민들이 늘어갔고 폴란드의 민주주의는 서서히 무너졌다. 지난 12일 열린 대선 결선투표는 이런 배경에서 치러졌다.

국가의 감시자와 주인으로서의 권리를 국민주권이라고 한다면 법과 정의(PiS)는 민주주의라는 허울 속에서 주권의식은 쏙 빠지고 수혜만을 쫒는 유권자층을 만들어냈다. 능동적 주권의 부재 속에서 수동적이고 수혜적인 권리의 추구만 남는 폴란드의 포퓰리즘은 최근 5년 동안 공고해졌다.

법과 정의(PiS)는 지난해 총선을 앞두고 970만 명에 해당하는 고령연금 수령자들에게 일인당 1100즈워티(약 33만 5000원)를 연금과 별도로 1년에 한 번 수령하게 했고, 700만 명에 해당하는 아동수당 수령자들에게 1인당 500즈워티(약 15만 2000원)씩 매달 지급받도록 했다. 폴란드 전체 인구의 44%에 해당하는 1670만 명이 현금 수당을 받은 셈이다. 이렇게 치른 총선 결과는 법과 정의(PiS)의 압승.

포퓰리즘의 반경 안에는 시혜만 들어 있지 않다. 성적 소수자, 인종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은 무기명 투표 뒤에 숨은 이들에게 달콤한 유혹이 된다. 저항하는 자들은 몰아내고, 가두고, 처벌하고, 배격했다.

이번 선거 기간 동안에도 성소수자들에 대한 차별과 멸시의 발언들이 공공연하게 후보자의 입을 통해 나왔고, 친정부 성향의 언론은 그것들을 실어 날랐다. 언론을 통해 전달되는 혐오주의는 다시 국민들 속에서 단단해져 재생산되는 순환구조를 만들어 냈다.

이민자들 역시 혐오의 대상에서 비껴가지 못했다. 정치적, 경제적 약자인 이들 이민자들에 대한 혐오가 만연했고, 백인순혈주의가 폴란드를 뒤덮었다. 선거 승리의 보증수표가 된 폴란드산 인종 차별주의는 헝가리, 체코, 세르비아 등 주변 동유럽 국가들에 퍼져갔다. 그렇게 동유럽 극우 민족주의는 만들어졌고 평등과 개방, 연대와 소통의 유럽 이상주의는 점차 힘을 잃어 갔다.

폴란드도 한국도, 51:48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 본관 접견실에서 안제이 두다 폴란드 대통령과 정상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2018.2.8 ⓒ 연합뉴스

 
이번 선거에서 하나의 다른 점은 있었다. 포퓰리즘의 위험 수위가 국민들에게 감지되기 시작한 것. 꿈틀거리는 주권 의식은 젊은 층에서, 도시민들에게서 먼저 시작됐고 이번 선거에서 표심으로 나타났다. 확실한 완승을 다짐했던 법과 정의(PiS)는 예상외의 반동에 당황하면서 혐오의 수위를 더 높였지만 득표수 확장에는 한계를 보였다.

민주주의에 대한 위기의식은 야권을 결집하게 했고, 시민연단(PO)을 대안세력으로 자리매김하도록 했다. 이번 선거에 패한 야권은 그래도 라파우 트샤스코프스키라는 뜻밖의 구심점을 찾는 성과도 얻었다. 그는 선거 기간 동안 민주주의 수호를 호소했고, 포퓰리즘의 몽환에서 깨어나는 시민들이 이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최종 결과가 51.03% : 48.97%.

2020년 폴란드의 대선결과가 묘하게 8년 전 한국의 대선결과와 오버랩되는 것은 우연일까? 당시 한국 대선의 최종 결과는 51.55% : 48.02%. 이전 선거 승리로 정권을 되찾은 보수세력은 4년 집권기간 동안 사법부를 포함 모든 국가권력 기관과 언론을 약화시키거나 통제하거나 장악해 나갔다. 민주주의의 위기를 절감한 야권은 2012년 선거에서 단일화를 통해 저지하려 했지만 근소한 표차로 패배했다.

2017년 선거에서 다시 진보세력이 재집권에 성공했지만 양분화의 후유증은 생각보다 심각하다. 양측의 감정적 대결은 모든 이슈를 진영논리로 환원시키고 있다. 두 진영은 사법기관도 언론도 불신하면서 모든 크고 작은 이슈들을 자신들의 전쟁터로 끌고 나왔다. 조국, 박원순 경우와 같은 복잡한 이슈가 얽혀 있는 문제들도 진보 대 보수 구도로 간단히 획일화시키면서 온라인 구석 어딘가에 숨어 있는 부적절한 글들마저 상대진영의 목소리라면서 전면에 내세워 파상공격을 해댄다.

한국처럼 두 진영으로 갈라진 폴란드를 두고 유럽의 모든 언론들은 이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고 있다. "열 배나 흥미로운 나라" 폴란드는 과연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폴란드의 다음 대선은 5년 후, 총선까지는 3년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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