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27 08:28최종 업데이트 20.04.24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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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을 수리하며 만난 사람들의 따뜻한 사연과 그 속에서 얻은 깊은 통찰을 전합니다. 갈수록 디지털화 되어가는 세상에서, 필기구 한 자루에 온기를 담아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습니다. 온/오프(On/Off)로 모든 게 결정되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아날로그 한 조각을 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 펜닥터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기자말]
"펜닥터님 안녕하세요. 블로그 수리기 보고 연락드렸습니다. 만년필에 문제가 생겨 어떻게 해야 하나... 속만 태웠는데, 뭔가 길이 보이는 듯해 얼마나 다행인지요."

"어떤 심정일지 이해해요. 하지만 펜을 보지 않고선 저도 수리 여부를 장담하기 조심스러워요. 만년필은 마치 생물과 같아, 비슷해 보여도 펜마다 증상이 다 다르니까요. 같이 머리를 맞대고 방법을 찾아보시지요. 상태가 어떤가요?"


"이 만년필은 제 큰형님이 선물해 준 건데, 그만 제게 주고 1년이 채 못 돼 돌아가셨어요. 형님을 추억할 유일한 도구라 제겐 의미가 각별합니다. 그간 잘 써 왔는데 얼마 전 딸아이가 만지고 난 후 잉크가 잘 안 나오고, 촉은 종이를 심하게 긁는, 도무지 쓰기 힘든 아주 곤란한 상태가 돼 버렸습니다. 어떻게 살려낼 방법이 있을까요?"

"봐야 정확히 알겠지만, 말씀대로라면 단순히 펜촉이 틀어진 정도일 확률이 높아요. 만년필 구조를 모르는 사람이 볼펜 다루듯, 단 한번 꾹 눌러 쓰는 것만으로도 펜촉에 무리가 갈 수 있어요. 만년필 접해본 적 없는 아이가 손댔다면 더욱 그럴 수 있지요. 혼내지 마세요. 만년필이 관리가 필요한 '쓸 것'은 맞지만, 내구성이 그렇게 형편없는 도구는 아니니까요. 진열장에 넣어놓고 보기만 하는 장식품이 아닌데 그 정도로 약하게 만들진 않아요. 속상하시겠지만 너무 걱정 마세요. 어떻게든 해볼게요."


일단 안심시켜드리는 게 우선이었습니다. 형님이 남긴 유품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단 자책감이 얼마나 클까, 싶었기 때문입니다. 어린 딸을 혼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니, 그저 자신을 책망할 도리밖에 없었을 겁니다.

의미가 부여된 펜은 금전적인 가치와 무관하게 소중합니다. 세상에 둘도 없는 귀물(貴物)이 됩니다. 모든 펜엔 다 나름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행복하고 따뜻한 기운으로 가득한 펜도 많지만, 이 P145처럼 안타까운 사연이 담긴 펜도 많습니다. 모든 펜은 다 고쳐져야 할, 제 쓰임을 다할 때까지 기능적으로 온전히 작동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얼마 후 강원도 속초에서 펜 한 자루가 왔습니다. 다행히 예상한 대로입니다. 하지만 심각하지 않대도, 여기저기 손이 가야 합니다. 그래도 이만하길 다행입니다. 간혹 제아무리 많은 시간을 들여도 어쩔 수 없는 펜이 있습니다. 그러니 만년필 수리도구 중 하나랄 수 있는 '시간'을 들여 해결할 수 있는 정도라면 운이 좋은 거지요.
 

몽블랑 만년필 마이스터스튁 P145 F촉 ⓒ 김덕래

  
"보내주신 만년필 잘 받았어요.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그동안 맘 졸이셨을 테니 한숨 돌리고 며칠 기다려주세요. 제가 좋은 소식 전해드릴게요."

"정말인가요? 말씀만으로도 안심이 돼요. 사실 저는 이게 몽블랑 만년필이라는 것만 알지 정확한 모델명도, 펜촉이 뭔지도 몰라요. 형님이 케이스나 다른 것 없이 펜 한 자루만 건네준 거라 언제 어디서 샀는지도 모르고요. 그래서 어디다 어떻게 수리를 맡겨야 할지 더 막막했어요. 그저 일상생활에서 자주 쓸 수 있도록 너무 가늘지도, 과하게 굵게 나오지도 않았으면 좋겠어요. 아니아니, 그냥 나오기만 해도 만족이에요."

"이 펜은 P145라는 이름을 가진 몽블랑을 대표하는 모델 중 하나예요. 형님이 정말 좋은 펜을 선물해 주셨어요. 잉크가 술술 나오는 F촉인데다 몽블랑이 원래 흐름이 좋으니, 정상범위 내에서 아주 조금만 줄여드릴게요. 그럼 두루두루 쓰기 좋을 거예요."

"아... 고맙습니다. 전에 지인이 잠깐 보더니 이 펜은 정품이 아닌 것 같다, 고 해요. 사실 그건 제게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제 형님이 준 건데 정품이면 어떻고 아니면 어떻겠어요. 그냥 쓸 수만 있으면, 오래 간직할 수만 있으면 그걸로 충분해요."


지인이라는 그 분은 대체 왜 그랬던 걸까요? 설령 그렇게 보이더라도 아무 말 않는 게 배려일 텐데, 심지어 이 펜은 정품입니다. 몽블랑이 필기구 중 명품에 속하다 보니 비슷하게 흉내낸 모조품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이 펜은 틀림없습니다.

1906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문을 연 몽블랑(Montblanc)은, 1909년 루즈앤느와(Rouge et Noir)로 시작해 1924년 대표라인인 마이스터스튁 시리즈를 탄생시킵니다. 몽블랑 펜촉에 새겨진 4810이란 숫자는 몽블랑 산의 높이(4810m)를 의미합니다. 캡탑의 화이트스타 로고는 만년설로 뒤덮인 몽블랑 산을 형상화했습니다.
 

몽블랑 펜촉 ⓒ 김덕래

 

몽블랑 캡탑 장식부, 화이트스타 ⓒ 김덕래


마이스터스튁 시리즈는 1960년 일시 단종되었다 1979년 복각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 만년필의 정확한 이름은, 몽블랑 마이스터스튁 P145 F촉입니다. 발음하기도 쉽지 않은 독일어 Meisterstück은 '명작'을 의미합니다. 영어의 'masterpiece'와 같습니다.

브랜드 지향점이랄 수 있는 '명품'이란 핵심가치를 아예 제품명 일부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제품의 완성도가 따라주지 못했더라면 과도한 오만함으로 비춰졌겠지만, 누구나 인정하는 브랜드로 우뚝 섰기에 자신감으로 읽힙니다.

몽블랑은 제품명을 숫자로 표현하는 모델이 많습니다. 만년필계 3대장을 파카51, 펠리칸M800, 몽블랑149라 한다면, 몽블랑 일반라인 3형제는 145, 146, 149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좌에서부터 몽블랑 마이스터스튁 145,146,149 만년필 ⓒ 펜앤아트 박주희

 
이 모델들은 검은색 레진소재 바디에 클립과 장식부가 금장이며, 숫자 앞에 'P'라는 영문이 붙은 펜들은 장식부가 은장이란 의미입니다. 일반적으로 금장이 은장보다 더 고가라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데, 적어도 몽블랑 만년필에선 아닙니다. 영문 'P'는 'Platinum'의 약자입니다. 장식부가 백금으로 도금되어 되려 금액이 더 높습니다. 금장이 전통적인 고급스러움을 강조한다면, 은장은 현대적인 세련미를 은은히 뿜어냅니다.

펜을 선물한 분이 큰형님이라 하신 걸 보면, 3형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 펜은 몽블랑 만년필 3형제중 막내인 데다 장식부가 백금인 고급형 P145입니다. 그 중에서도 일상필기용으로 부드러움을 극대화한 'F촉'. 막내동생에게 남겨줄 한 자루의 펜, 최고의 것에 아낌없는 사랑을 담아 건네고 싶었을 그 마음을 짐작해 봅니다. 상태가 상태인지라 펜을 분해했습니다.
 

몽블랑 P145 분해 ⓒ 김덕래

 
펜촉은 틀어지고, 피드 콤(comb, 촘촘한 빗살 형태의 부분)은 꺾였으며, 컨버터는 뻑뻑합니다. 펜촉이 반듯하지 않으니 흐름이 일정할 수가 없습니다. 또 쓸 때마다 긁힘이 느껴질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만년필이 잘 나오면 구태여 힘을 주고 쓸 일이 없습니다. 잘 안 나오니 힘을 주게 되고, 힘을 주니 펜촉이 틀어지는 거고, 펜촉이 틀어지니 필기감이 안 좋을 수밖에 없어집니다. 한번 긍정의 수레바퀴에 잘 올라타기만 하면 선순환이 이뤄지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엔 계속 문제가 꼬리의 꼬리를 물게 됩니다. 손봐야 할 부분은 많지만 시간을 들이면 다 해결될 정도의 증상들입니다. 틀어진 펜촉은 반듯하게 제 자리를 잡아주면 됩니다.
 

몽블랑 P145 닙교정 전 ⓒ 김덕래

  

몽블랑 P145 닙교정 후 ⓒ 김덕래


꺾인 콤은 펴주고, 뻑뻑한 컨버터는 분해해 세척한 다음 오일을 발라주면 마치 새 것처럼 부드러워집니다. 반듯하게 펜촉을 펴고 나면 결합해 잉크를 채운 다음, 요령부리지 않고 계속 써가며 흐름을 잡아줍니다.

억지로 하는 운전은 노동이지만, 내가 원해서 하는 운전은 드라이브가 됩니다. 테스트 하는 시간을 아까워하면 한없이 지루한 일이지만, 펜이 내는 소리를 듣는 과정이라 생각하면 그 자체가 즐거움이 됩니다.
 

수리 후 시필 테스트 - 1 ⓒ 김덕래


  

수리 후 시필 테스트 - 2 ⓒ 김덕래


쓰고 쓰고 또 쓰다 보면 어느 순간 만족스런 흐름이 잡히고, 그것과 어울리는 부드러운 필기감이 나옵니다. 이 펜은 기본적으로 흐름이 풍부한 몽블랑의 F촉입니다. 정상범위 내에서 살짝 줄여 사용자가 일상필기 시 더 자주 쓸 수 있도록 했습니다.

펜촉 슬릿(Slit, 펜촉 한가운데, 펠릿과 벤트홀 사이의 잉크가 지나가는 통로) 간격을 과하게 좁히면 필기시 자칫 선이 끊기고, 반대로 적정선을 넘어 버리면 지나치게 굵어져 잉크가 번질 수 있습니다.

적당히, 괜찮은 정도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쓸만한 선을 넘어선, 그 이상의 상태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어쩌면 이 펜은 벌써 아까 다 손봐졌을지도 모릅니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상태로 만들고 싶은 마음이 앞서 손에서 놓지 못한 것일지도요.
 

몽블랑 P145 수리 완료 ⓒ 김덕래


피붙이인 형님을 떠나 보낸 슬픔의 깊이를 제가 어떻게 가늠할 수 있겠습니까만, 때론 웃고 때론 투닥거리며 살아왔을 식구 하나를 더는 볼 수 없다는 그 막막함을, 저도 아주 조금은 알고 있습니다.

저의 큰형님은 제가 태어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무릎께도 못 미치는 얕은 개울에 허무히 큰아들을 빼앗긴 부모님은, 더는 그 얼굴을 이 세상에선 다신 볼 수 없음에 절망했습니다. 그 헛헛함이 저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했고, 항상 두 분은 저를 보며 큰아들을 떠올렸을 겁니다.

어린 시절 아무리 막내아들이라 해도 다른 형제들에 비해 유난한 사랑을 퍼부어주던 부모님의 비밀을 고등학생이 돼서야 알았습니다. 오래된 사진첩 한 켠에 꽂혀 있던, 나와도 또 형과도 어딘가 느낌이 다른 사내아이는 참 의젓해 보였습니다. 먼저 간 큰아들의 마지막 사진을 태울 때 눈물도 같이 말랐다 생각했는데 그게 아녔나 보다며 눈가를 적시던 어머니는 어느새 여든이 넘었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꿈에 나타나 꿈속에서도 오열하게 만들던 큰아들을 마주하는 게 힘들어, 그 슬픔의 기억이 마치 없었던 것처럼 지워지기만을 바라며 살아왔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느새 점점 잊는 게 많아지는 나이가 되니 어떻게든 얼굴만이라도 기억하고 싶은데, 사진 한 장 남은 게 없다며 목이 멥니다.

잘 손 봐진 이 펜처럼, 제 어머니에게도 큰아들을 추억할 만한 뭔가가 남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손봤습니다. 이미 수리가 끝난 펜을 한 번이라도 더 매만지고, 광을 내는 것으로 위로의 말씀을 대신합니다. 그런 일 없길 바랍니다만, 혹여나라도 다시 펜에 문제 생기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기꺼운 마음으로 살펴드리겠습니다.

마음은 이미 두 분이 있는 강릉에 가 있는데, 편히 내려갈 수 없는 요즘 무시로 전화기를 들게 됩니다. 혼란의 시기가 하루빨리 지나가, 좀 더 가벼운 얼굴로 부모님을 뵈러 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기필코 다가올 그날이 너무 늦지만 않았으면 참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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