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19 08:51최종 업데이트 19.09.19 19:01
 

파리 샤를마뉴 중학교 학교를 마치고 하교하고 있는 중학생 아이들 ⓒ 목수정


[기사 수정: 19일 오전 9시 54분] 

70일이 넘는 프랑스 파리의 긴 여름방학이 끝나고, 9월초 딸 아이의 중학교 마지막 해가 시작되었다. 지난 주엔 학년별로 치러지는 학부모회의가 있었다. 앞으로 1년간의 주요 일정에 대해 설명한 후, 이례적으로 방학 전에 아이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보고가 이어졌다. 조사는 아이들의 생활 습관, 문화 활동, 취미 생활, 학습 태도 등을 상세히 물었고, 학교는 이 결과와 아이들 학업 성적과의 상관관계를 분석했다.


성적 상위 그룹에 속하는 아이들은 연중 가장 많은 수의 전시(연 12회 이상)를 비롯 가장 많은 공연과 영화를 관람하며, 평소에 집에서 읽는 독서량뿐 아니라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가는 도서의 수도 가장 높게 나타났다. 또 이 그룹에서 체육활동이나 음악이나, 무용, 미술 등 예체능 활동을 병행하는 아이들의 비율도 가장 높았다. 반면 이들의 평균 학습량은 일주일에 3~4시간에 불과했다.

중위권 그룹의 아이들은 첫번째 그룹 아이들에 비해 문화 생활의 시간은 떨어졌지만, 놀랍게도 공부하는 시간은 주 5~6시간으로 오히려 더 많게 나타났다. 마지막 그룹, 수업을 따라가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분류되는 아이들은, 거의 모든 문화활동에 소극적이었고, 책을 빌려가는 경우도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스크린과의 접촉만큼은 가장 높은 수치로 나타났다. 즉, 핸드폰이나 게임기, 텔레비전 등과 접하는 시간은 학업 성적과 반비례하는 결과를 보여주었다.

전시나 공연을 보러가고 책을 읽는 것은, 학업 공부가 아닐지라도 많이 할수록 오히려 학과 성적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과는 정반대의 현상이다. 모든 아이들에게서 부족하게 나타나는 것은 수면 시간이었다. 14세 청소년들에게 필요한 권장 수면 시간 8~9시간에 못미치는 7시간 내외의 수면을 아이들은 취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설문조사 결과가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했다. 1) 풍성한 문화 활동은 아이들의 지적 능력 향상에 크게 기여한다. 2) 공부하는 시간이 길다고 해서 좋은 성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공부 시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학습 습관을 가졌는지가 더 중요하다.

하여, 교사들은 학부모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아이들에게 다양한 문화적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 달라. 학교에서도, 더 많은 문화체험의 기회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아이들이 책가방 속에 꼭 책 한권씩을 넣고 다니는 것을 체계적인 습관으로 만들겠다. 또한, 한꺼번에 몰아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그날 배운 것들을 한 번씩 들여다 볼 수 있도록 아이들을 격려해 달라. 가급적, 아이들이 스크린과 접하는 시간을 줄일 수 있도록 통제해 달라."

학교에서는 이미 가을에 보러갈 영화 3편(히치콕 영화를 비롯한 현대의 고전들)을 예약해 두었다고 말했고, 파리 중심부의 미술관 그랑 팔레에서 하는 전시도 단체관람할 수 있게 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학부모에게만 짐을 떠넘기지 않고, 학교 스스로도 설문조사 결과를 즉각 교육 방침에 반영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집에 돌아와 우린 아이와 마주앉아, 지난 1년간 우리가 섭렵해온 문화적 외출들의 발자취를 헤아려 보았다. 과하다 싶게 많은 전시의 목록들이 집계되던 중 아이가 문득, 2년 전 불어교사의 인도로 입문했던 오페라와 연극의 세계가 그립다는 고백을 꺼내놓는다. "연극이 고프다"는 아이의 말은 아이의 불어 교사가 뿌려준 씨앗이 마침내 아이의 문화적 토양에 뿌리를 내렸다는 신호로 들렸다. 부모가 채워주지 못한 문화자본의 한부분이 공교육을 통해 채우는 기쁨을 맛본 순간이다.

자본과 문화자본의 간극

음악원에 다니며 악기를 연주하고, 주말이면 전시나 공연을 보러 다니는 일, 세상 곳곳으로 여행을 다니고, 무용이나, 테니스, 승마 등 다양한 취미 생활을 영위하는 삶. 그것은 중산층 이상의 가정이 삶을 영위하는 흔한 방식이다. 그런 삶의 방식이 학업에 긍정적 영향을 주기 때문에, 부모들이 아이들의 문화생활을 챙긴 게 아니라, 그것이 이미 부모가 누려온 삶의 방식이었기에, 아이들도 함께 공기처럼 누려왔을 가능성이 높다.

부르디외가 말한 소위 '문화 자본'을 풍부하게 소유한 도시 중산층의 자녀들이 학업성적에서도 좋은 결과를 보인다는 얘기는 당연한 귀결로 들리면서도, 다양한 문화예술적 체험이 아이들의 학교 성적에 "공식처럼" 또렷이 투영된다는 사실은 다소 놀랍다.

 

계급의 아이들 베르나르 라이르 교수 외 16명의 사회학자들이 공동연구에 참여하여 집필한, 계급에 따른 아이들의 성장사를 담은 사회학적 보고서다. ⓒ 목수정



마침 8월 말에 출간된, 묵직한 사회학 보고서 <계급의 아이들>(Enfances de Classe)이 이런 의문에 적절한 가설을 던져준다. 사회학자 베르나르 라이르는 16명의 연구자들과 함께 프랑스 전역에 살고있는 서로 다른 계층의 5세 어린이 35명의 삶을 5년간 밀착 추적했고 그 결과를 1232쪽의 방대한 저서로 펴냈다.

그들은 아이의 주거환경, 식생활, 건강, 놀이, 가족, 친구, 친척, 교사… 아이를 둘러싼 모든 사회적 환경을 파악하고, 아이의 주변 인물들과 만나 인터뷰를 진행하며, 아이가 겪는 삶의 변화를 기록해 갔다. 그리하여, 같은 시대, 같은 사회에 태어나지만, 전혀 다른 세계를 사는 아이들이 속한 '계급'에 대해, 그들이 지닌 서로다른 뼈와 살, 냄새까지 담아 입체적 초상화로 그려냈다.

17명의 연구자가 함께 찾아낸 불평등의 키워드 역시 '문화 자본'이었다. 그 중에서도, 아이들이 책, 언어와 맺는 관계가 그들의 이후의 삶을 가장 크게 좌우할 핵심적 자산임을 발견한다.

불어를 잘 구사하지 못하는 엄마와 사는 아이 집에는 책이 없다. 엄마는 책을 읽지 않고 도서관에 아이를 데려가지도 않는다. 아이의 세계는 눈 앞에 펼쳐지는 것이 전부다. 엄마가 교수이고 아빠가 작가인 아이는 부모가 골라준, 그리 유치하지 않고, 다소 난해한 단어들이 사용되며, 늘 해피 엔딩으로 끝나진 않는, 적절히 선별된 책들 사이에서 자란다. 어른들과의 대화 속에서도 언제나 유머와 반어법이 유연하게 날아다니며, 아이의 언어에 대한 감각과 리듬은 일상에서 촘촘하게 조련된다.

경제적으로는 같은 중산층의 가정일지라도, 그 가정의 부모가 지닌 문화자본의 크기가 어느 정도이냐에 따라 아이들이 누릴 삶의 궤적은 달라진다고 책은 말한다. "탄탄한 문화자본을 가진 부모는 아이가 학교에서 얻은 지식들을 일상의 다양한 삶과 연결시켜 어떤 구체적 의미를 갖는지를 설명해줄 언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부모의 문화자본이 아이의 학업의 성과로 연결되는 공식에 대한 이 책의 알리바이다.

교육 정의를 바로 잡는 건 사회의 의무

 

학기말 오케스트라 연주중인 프랑스 중학생들 파리 5구청에서 2개의 음악원에 소속된 중학생들이 1년간 연습해온 곡들을 청중들 앞에서 연주하고 있다. ⓒ 목수정


 이렇게, 아이가 언어, 책과 맺는 관계는 불평등의 가장 근본적인 토대를 제공한다. 책과 친밀한 어린시절을 보낸 아이 앞에 펼쳐지는 지평선은 무한대에 가깝지만, 책과 무관한 어린시절을 보낸 아이에게 그 지평선은 지극히 제한되어 있다.

어린시절, 아이가 책과 맺게 되는 친숙하고 긍정적인 관계는 학교 생활의 어려움을 쉽게 해결해 주고, 더 나아가 자신이 원하는 사회적인 지위에 대한 접근을 가능하게 해준다. 아이들이 구사하는 어휘와 어법은 그대로 자신의 계급을 드러내고, 그것만으로도 아이들은 강력하고 지속적으로 펼쳐지게 될 사회적 궤도를 획득한다.

이 책은 잔인하게 드러나는 프랑스 사회의 불평등의 맨살을 펼쳐보이며, 학교는 바로 이러한 가정에서의 불평등을 시정할 수 있는 최후/최선의 보루임을 역설한다. 그러나 저자는 교육의 질 향상을 위해 정부가 더 노력을 기울이겠다는 교육부 장관에겐 비웃음을 던진다.

"마크롱 정부의 모든 정치는 가난한 사람들의 옷을 벗겨서 부자들에게 더 갖다 주는 걸로 점철되고 있기 때문이다. 교육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그에 앞서 장기 실업극복과 노동정책이 성공해야 하며, 최저임금이 올라야 하고, 주거 정책이 개선되어야 한다." - 책 중에서

지금의 찢어지는 사회적 불평등이 극복되어야 교육의 불평등도, 교육의 질도 개선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입시제도가 '공평'을 담보해내지 못했다는 사실이 명백해지자, 다시 수시와 정시 사이에 또 한 번 적당한 칼질을 해보겠다는 정부에 불신과 비웃음이 먼저 쏟아진다. 불평등 조장에 앞장서는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하면서, 말로만 교육의 질을 향상하겠다는 마크롱 정부에게 조롱이 쏟아지는 것과 비슷한 형국이다.

'봉사활동 489시간' '동아리활동 374시간' '교내 수상 실적 108건' 으로 표현되는, 서울대 수시 합격생의 바라보기 고통스럽기까지한 스펙 점수들. 수치로 입증해 보여야만 인정되고, 의미를 부여받는 다양한 삶은 오히려 자발성으로 비롯되어야 할, 기쁨과 경험의 시간들을 점수의 무게로 짖눌러 버린 날들에 대한 증거물은 아닐까. 수시와 정시의 비율이 아니라, 아이들이 진정으로 자신을 찾을 수 있는 시간과 여유, 기회를 제공해 주는 것이, 우리 교육이 찾아나서야 할 첫 번째 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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