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5
원고료주기
등록 2019.08.01 11:49 수정 2019.08.01 12:18
상하이에서의 일정은 머물렀던 당시에는 곱씹을 여유를 챙길 수 없을 만큼 빠듯했다. 곳곳이 독립운동가들의 자취를 안고 있어서, 그런 의미 있는 곳곳을 살피느라 마음이 쉴 틈이 없었다. 명확하게 표현하기 어려운 뭔지 모를 감정에 문득 눈물까지 나니 더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상하이를 떠나 자싱으로 향했다.
 
상하이의 독립운동가들은 윤봉길 의사 의거의 여파로 일본에 잡혀 가거나 일본에 쫓기게 되어 상하이를 떠나게 된다. 일본은 자신들에게 큰 피해를 입힌 홍커우공원 의거와 관련하여 김구 선생에게 60만 원(현재 가치로 약200억 원)의 현상금을 걸고 맹렬히 추격한다.
 
다행히 한국의 독립운동가를 후원한 미국인 선교사 조지 애수모어 피치(George Ashmore Fitch, 費吾生)의 도움을 받아 상하이 탈출에 성공한다. 김구 선생은 <백범일지>에 상하이를 떠나던 날의 긴박한 상황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피치 부부의 집에 머물던 중의 일이다.
 
그러던 어느날 피치 부인이 급히 2층으로 올라와서,
"우리집이 정탐꾼에게 발각된 모양이니 속히 떠나셔야겠어요."
라고 알려주고, 곧 아래층으로 내려가 전화로 자기 남편을 불렀다. 부인은 자기네 자동차에 나와 부부인 양 나란히 앉고 피치 선생은 운전사가 되어, 뜰 내에서 차를 몰고 문 밖으로 나갔다.
문 밖으로 나가면서 보니 일본인은 보이지 않았지만 불란서인·러시아인·중국인 등 각국의 정탐꾼이 문 앞과 주위를 수풀처럼 에워싸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인 집이라 어찌할 수가 없어 손을 쓰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불란서 조계지를 지나 중국지역에 이르러 자동차를 멈추고, 나와 공근은 기차역(火車站)으로 가서 당일로 가흥(嘉興)의 수륜사창(秀綸沙廠)으로 피신하였다. <백범일지> P342

김구 선생은 백인인 조지 애수모어 피치로 변장을 하고, 그의 부인 제랄딘(Geraldine Townsend Fitch)과 부부로 연기를 하고, 조지 애수모어는 운전사로 행세하고, 윤봉길 의사 의거 이후 20여일 동안 숨어 있던 피치의 집을 빠져 나와 가흥(자싱)으로 갈 수 있었다.
 

김구 선생를 도운 조지 애수머어 피치와 그이 부인 제랄딘의 말년 모습. ⓒ 국가보훈처


선교사 조지 애수모어 피치와 그의 부인, 그리고 그의 아버지 조지 필드 피치(George Field Fitch, 費啓鴻)까지 2대째 독립운동가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아버지 조지 필드 피치는 중국에서 일제의 감시를 받을 만큼 한국인들의 활동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대한적십자사는 1909년 7월 일본적십자사에 흡수됐다가 1919년 4월 임시정부 수립 후, 8월 29일 대한적십자회 설립이 상하이에서 공포·재건되는데, 조지 필드 피치가 중국에 있는 다른 미국인 선교사들과 함께 구호품과 의연금을 모아 한인들을 돕는 등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활동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제지위 획득과 연관되어 있었다. 당시 적십자사는 국제기관으로서 제네바협약에 가입한 독립된 주권국가가 설립한 적십자사만이 승인됐다. 때문에 대한적십자회는 국제적십자연맹에 가입을 통해 임시정부가 독립국가인 대한민국을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국제사회에 알리고자 했다. 1921년 1월 이관용(李灌鎔)이 대표로 선출되어 국제적십자총회에 참석하여 독립을 청원하고 일본적십자사에 항의서를 제출하는 등 일본의 침략상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대표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밖에도 임시정부를 국제사회에 알리는 선전활동이 꾸준하게 진행했다. - <국외 독립운동 사적지 – 중국, 대한적십자회 설립 장소>,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이 밖에도 교육 등 다방면으로 필드의 지원이 이어졌고, 이런 필드의 한인사회 지원은 1922년 6월 상하이주재 일본총영사가 미국총영사에게 "미국인 선교사"에 대한 미국 정부의 제재를 요구하며, 유감의 뜻을 전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이에 따라 미국총영사 커닝햄은 조지 필드 피치에게 구호활동의 경위 해명까지 요구했었다. 중국 상하이에 있는 미국총영사 입장에서 미국인 선교사가 중국인도 아닌 한국인을 지원하는 것은 사실 국제적으로 민감할 수 있고, 환영받지 못할 일이다. 간단하게 현재의 난민 문제에만 대입해봐도 그 당시에도 제3국의 국민을 지지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치 일가가 나섰던 이유는 무엇일까? 어찌 보면 간단하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와준 것이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기꺼이 도움을 준 것이다. 그러나 쉽지 않은 일임을 안다. 게다가 국가 기관에서 직접적으로 유감을 표명한다면? 나는 물러서지 않고 나아갈 수 있을까?

그러나 피치 일가는 멈추지 않았다.
또한 <독립신문>을 통해 "나는 정치적으로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을 방조한 일이 없다. 그러나 차가운 추위에 슬퍼하는 한국동포를 위해 구제사업을 경영한다. 이는 선교사인 나의 신성한 의무다"라고 하며 선교사로서 자신의 활동이 정당함을 주장했다. 이에 커닝햄은 재차 필드에게 서한을 보내 미국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은 미국시민이 외국에서의 정치적인 활동을 자제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따라서 대한적십자사 활동을 지속하는 것은 국무부의 요청을 준수하지 않는 것이라며 유감을 표명했다. <2018년 1월의 독립운동가 조지 애쉬모어 피치>, 김주성

이렇게 피치부부의 도움으로 무사히 자싱에 온 김구 선생은 이후 저보성(주푸청)의 도움을 받는다.
 
집주인은 손문(쑨원)과 함께 1905년 일본 동경에서 흥중회를 창립한 후 계속 그의 가까운 동지였던 혁명가 저보성(주푸청)과 그의 아들 소유였다. <장강일기>, 정정화
 

매만가 76호영화 ‘암살’에서 약산 김원봉(조승우 분)이 배를 타고 김구선생과 만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장면이 바로 이곳의 수상가옥을 재현한 모습이다. ⓒ 오마이뉴스

 
일제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상하이에서 자싱으로 피신하게 된 임정요인들은 서로 근거리에 있는 사실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철저히 숨어 있어야만 했다.

매만가 76호에서도 오래 머물지 못하고 해염(하이엔)의 재청별장으로 옮기게 되는데 이 또한 저보성(주푸청)의 며느리인 주가예 친정 소유 건물이다. 저보성의 집안 역시 임시정부를 위해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자싱의 일정은 임시정부의 피난기의 고난을 확인함과 동시에 이처럼 임시정부가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그 보다 더 많은, 국적을 초월한 의인들의 도움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을 확인하는 일정이었다.
댓글5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