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25 08:46최종 업데이트 19.07.25 08:46
한때 화가 월전(月田) 장우성(張遇聖, 1912-2005)은 한국 문인화의 상징이었다. 그의 그림이 기품 있는 삶과 절제된 동양 정신을 보여준다고 생각하여, 많은 애호가들이 그의 그림을 좋아하였다. 많은 저명한 집안의 귀부인들뿐만 아니라 해외 공관의 대사 부인들도 그에게서 그림을 배우는 등 그의 존재는 한국 문인화의 대명사처럼 불렸다.
            

장우성의 모습. ⓒ 문선호

 
실제 그는 자신의 집안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여 선대들에 대해 무한한 존경을 보냈다. 자신의 집안은 대대로 선비 집안이었으며, 증조부는 한일합방을 전후하여 의병운동을 했고, 조부는 의병활동에 재정적 지원을 하였으며, 부친도 한학에 밝았다고 한다. 그는 늘 이런 집안의 배경과 자신의 문인화 정신을 연결시켜 자부심을 보이곤 했다.

장우성은 어려서 조부와 부친으로부터 한학을 배우기 시작한다. 천성이 다정다감하여 자연과 함께 하기를 좋아하였는데, 특히 달밤을 좋아하였다고 한다. 집안에 유독 책이 많아 법첩을 보고 글씨를 쓰기도 하고, 옛 그림을 보고 베끼다가 아버지에게 들켜 꾸중을 듣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당 김은호의 문하에 입문

13, 14세 경 어머니와 서울 외가에 왔다 발전된 서울의 모습을 보고 자극을 받아 일본어를 배우려 하자, 부친은 일본 사람 앞잡이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환쟁이가 되라며 그림 그리는 것을 허락했다고 한다.


마침 건너 마을에 이당 김은호의 매부가 살고 있어 부친의 부탁으로 김은호의 문하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주선하였다. 부친 장수영(張壽永)은 서울로 떠나는 아들에게 달을 좋아하는 마음을 담아 '월전(月田)'이란 호를 지어주었다.

1930년 서울에 올라온 장우성은 종로 단성사 뒤쪽 봉익동에서 하숙을 하며, 창덕궁 앞 권농동에 있는 김은호의 화숙 '낙청헌(絡靑軒)'에 들어간다. 그때 나이 19세 때였다. 이때 낙청헌에는 백윤문, 이석호 등 선배들이 있었고, 동년배들로는 김기창이 두어 달 먼저 들어와 있었으며, 조용승, 한유동, 장운봉, 조중현, 이유태 등도 있었다.

장우성은 낙청헌에서 김은호에게 그림을 배우는 한편, 당대의 명필 성당(惺堂) 김돈희(金敦熙, 1871-1936)가 운영하는 '상서회(尙書會)'에 나가 글씨를 배운다. 여기에서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 1902-1981)을 처음 만나 평생지기로 지낸다. 두 사람은 10년의 나이 차이가 났으나 서로 뜻이 맞아 가까이 지냈다. 손재형은 서화골동에도 조예가 깊었는데, 장우성이 훗날 서화골동에 눈을 뜨게 되는데 많은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서화협회와 조선미전에서의 활동
            

장우성, 귀목, 1935년 ⓒ 국립현대미술관

 
장우성은 낙청헌에서 서화 공부를 시작한 지 1년 만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서화협회전과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바로 입선하기 시작한다. 1932년 제11회 조선미술전람회로부터 1944년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수상한다. 1936년에는 백윤문, 김기창, 한유동, 조중현, 이석호, 이유태 등과 함께 김은호 제자들의 모임인 '후소회(後素會)'를 만든다. 이후 장우성은 김기창과 함께 김은호 문하의 가장 영향력 있는 두 축으로 성장한다.

이 시기에 그린 작품으로 1930년에 그린 '귀목(歸牧)'이란 작품이 남아 있다. 이 작품은 1935년 제14회 조선미전에서 입선한 작품으로 한 소년이 날이 저물자 망태를 메고 소를 몰고 돌아오는 작품이다.

식민지하의 한국의 풍경을 서정적으로 묘사한 당시 조선총독부가 주창한 '향토색'을 구현한 전형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의 원초적인 풍습을 표현하게 함으로써 식민지의 진취적 기상보다는 소박한 풍경을 그려 미개한 민족이라는 것을 나타나게 하려는 의도라는 비판도 있다.
                 

장우성, 화실, 1943년 ⓒ 삼성리움미술관

 
조선미전 후반기에 접어들고 태평양 전쟁이 일어날 즈음이 되자, 1940년 서울에 전시 최대 관변기구인 '국민총력조선연맹'이 발족한다. 그러자 조선미술가협회는 총독부 정보과와 국민총력조선연맹의 후원을 받아 1942년 11월 '반도총후미술전람회'를 개최하기 시작하여 44년까지 3년간 지속한다. 장우성은 1943년에 '부동명성왕상'이라는 작품을 제작하여 출품하였으나, 작품을 운반하는 도중 소나기를 만나 작품이 망실되어 출품이 무산되었다. 또한 장우성은 1944년 3월에 열린 '결전미술전' 일본화부에도 작품을 출품한다.

이때에 출품된 작품들은 시국색이 강한 작품들이었다. 이러한 경력은 훗날 장우성이 친일미술인으로 낙인찍히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이에 대해 장우성은 당시 한국 화단에서 성적이 좋은 화가들만 차출되었기 때문이라고 항변하였지만 '친일 미술인'이라는 주홍글씨를 지우지는 못했다.

이 시기에 그린 작품으로 남아 있는 중요한 작품은 1943년 제22회 조선미전에 출품하여 '창덕궁상'을 받은 '화실(畫室)'이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자신의 화실 풍경을 그린 것인데, 작품 속 인물은 장우성과 그의 아내이다. 한복을 입고 책을 보고 있는 아내의 모습은 평소 아내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작품의 모델로 등장하는 여성처럼 보인다.

한 장소에 함께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곳을 쳐다보는 눈길이 화면에 긴장감과 변화를 준다. 서양식 복장을 하고 담배 파이프를 문 화가와 한복을 입고 서양 책을 보고 있는 아내의 부조화가 당시의 현실을 반영한 듯한 느낌을 준다.

해방 후 화가, 교육자로서의 활동
 

장우성, 청년도, 1956년 ⓒ 서울대박물관

 
장우성은 1945년 해방이 되자 새로운 물결에 자연스럽게 동참한다. 조선미술건설본부 위원이 되었으며, 1946년에는 배렴, 이응노, 김영기, 이유태, 김중현 등 당시 화단의 중추 세력들과 동양화의 혁신을 목적으로 '단구미술원(檀丘美術院)'을 조직하였다.

얼마 후 서울대학에 미술학부가 만들어지자 김용준과 함께 교수가 되어 1946년부터 1961년까지 재직한다. 1949년에 대한민국미술전람회가 창설되자 초대작가,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었으며, 1981년까지 국전 추천작가, 초대작가, 심사위원을 역임하며 화단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1950년 한국전이 발발하자 이듬해 종군화가로 중부전선에 종군하였다. 전쟁 후에도 그의 역할은 줄어들지 않아 1953년에 이충무공 기념사업회의 위촉으로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제작하여 표준 영정으로 지정되었다. 이후 국가적인 기념물로서의 영정을 많이 제작하였는데, 김유신, 권율, 정약용, 강감찬, 윤봉길, 정몽주 등 많은 영정을 제작하였다.

1957년 장우성은 자신이 재직하고 있는 서울대학교 개교 십 주년 기념으로 작품 한 점을 기증한다. 서울대학교의 학생들이 교정에서 서있는 모습을 그린 '청년도(靑年圖)'라는 작품이다. 큰 화면의 전면을 꽉 채워 인물들을 그리고 있는데, 전후의 어려움에서 벗어나 희망에 찬 젊은이들을 그리려 한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 속의 인물은 대부분 현대적인 모습을 하고 현대적인 옷을 입고 있다. 그런데 아래쪽 한 여학생은 한복을 입고 있는데, 당시 현대화 과정에 있는 학교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여섯 명의 학생들이 화면 전면을 가득 채워 서 있는 모습이 과감하고, 각기 다른 표정의 인물들에서 생동감이 느껴진다. 특히 화사하면서도 부드러운 색감은 장우성의 예민하고 감성적인 품성을 느끼게 한다.

말년의 감각적인 문인화들
            

장우성, 백매, 1978년 ⓒ 이천시립월전미술관

 
장우성은 1961년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사직하였는데, 그 이후에도 늘 활발한 활동을 펼친다. 1963년 미 국무성 초청으로 워싱턴에서 개인전을 가지고, 미국인들에게 3년여 동안 문인화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귀국하여서도 여전히 국가 기관의 일을 많이 맡았는데, 1974년에는 세종대왕기념관에 '집현전학사도'를, 1975년에는 국회의사당 벽화 '백두산천지도'를 제작하여 뛰어난 대작을 여럿 남겼다.

이 시기에 그린 대다수의 작품은 주로 '문인화'라는 화풍으로 정리된다. 장우성의 작품은 김기창의 청록산수, 허건의 남종산수화, 박노수의 감각적인 문인화 등과 함께 한국 화단에서 동양화가 중심을 지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그의 장미 그림, 달밤의 매화, 수선화 등 간결한 그림은 대중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품목이었다. 그의 그림은 단정한 필치와 고운 색감, 정감 있는 소재와 넉넉한 여백의 아름다움으로 현대 문인화의 격조를 보여 주었다.
            

장우성, 노묘, 1968년 ⓒ 이천시립월전미술관

 
또한 장우성은 인간이나 동물의 감각적인 순간을 포착하여, 그 속에 현대 인간의 삶의 애환을 풍자하는 내용을 자주 그렸다. 특히 고양이와 원숭이, 개와 학 그림이 인상적이었다. 이는 그가 평소에 관심을 가졌던 중국의 팔대산인, 신라산인, 한국의 안중식, 변상벽 등의 화가들의 그림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화난 고양이를 그린 '노묘(怒猫)'라는 작품에서 "아마 이 고양이가 크게 한 번 소리치면 세상의 모든 도둑질하는 쥐들이 다 도망 갈 것이다"라고 화제를 쓴 것을 보면, 단순한 고양이를 묘사한 것이 아니라 인간 세상의 일을 풍자하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장우성, 오염지대, 1979년. ⓒ 이천시립월전미술관

 
그의 풍자는 점차 폭을 넓히며 원숭이만도 못한 인간의 모습을 비꼬거나, 현대 인간들의 변모된 모습을 그리기도 하였고, 뱀을 잡아 먹는 황소개구리를 그려 주객이 전도되어 가는 세태를 표현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문명화 되어가는 사회 속에서 소외되어 가는 인간의 삶을 구원하고픈 예술가의 마음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또한 남북이 분단된 조국의 현실을 보여주려 휴전선 철조망을 그려 마음을 담기도 하고, 분단된 현실 속에서 갈 길 몰라 하는 병든 새들의 뒤틀린 모습을 통하여 현실의 부조리를 일깨운다.

그 중 '오염지대'라는 작품은 인간들이 편리를 위해 추구한 근대화가 만들어낸 공해의 폐해를 비판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인간의 문명이 만들어낸 독한 폐수는 강과 바다를 더럽히고, 산천의 초목들을 말려 죽이고, 그 안에 사는 사람들과 가축은 서서히 죽어간다. 이러한 모습을 죽어가는 한 마리 학에 빗대어 표현하고 있다.

기력을 잃어 날개죽지 조차 들지 못하는 한 마리 학의 모습이 애처롭다. 인간은 이러한 상황을 뉘우치지 못하고, 결국 그 안에서 죽어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현실을 비판하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장우성은 자신의 그림을 문명화된 세상에서 인간성 회복을 위한 마지막 비상구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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