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25 09:02최종 업데이트 19.07.25 09:03
중국 산둥성 웨이하이시에 있는 식당 이름이 재미있다. 식당 이름을 한국말로 바꾸면 '해산물과 육고기를 넣어 만든 음식이 과연 쓰촨 지방 집밥 맛이 나는구나(果然香海鮮四川家常菜)'다.

웨이하이시는 중국에서 가장 동쪽에 위치한 한국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다. 당연히 중국 동쪽 끝 해안 도시이기 때문에 해산물이 풍부하다. 그래서 웨이하이시는 해산물 요리가 유명하다.


쓰촨시는 중국 내륙에 위치하여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도시다. 쓰촨 지방 음식은 마치 한국의 남도 음식처럼 중국에서 맛있는 음식으로 소문나, 중국 모든 지역에 '쓰촨음식점'이란 간판으로 장사하는 식당이 많다. 하지만 쓰촨시는 바다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져 있기에 쓰촨 전통 음식에는 해산물을 재료로 만든 음식이 없다.

'집밥'이란 집에서 매일 먹는 음식으로 오랫동안 먹었기 때문에 자신의 입맛에 익숙하여 고향이나 부모님의 향수를 느낄 수 있는 음식이다.

중국 내륙 쓰촨시와 동해안 웨이하이시는 대략 삼천 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아마도 식당 사장이 내륙 쓰촨시에서 해안 도시 웨이하이시로 이사 와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정리하면 쓰촨 음식 요리 솜씨를 가진 식당 사장이 해안 도시로 와서, 쓰촨 육고기와 웨이하이 해산물을 섞어서 새로운 음식을 만들었는데, 그렇게 만든 음식을 파는 식당 간판을 쓰촨 지방 전통 집밥 음식점으로 장사한다는 것이다. 한국으로 예를 들면, 남도 음식 요리 솜씨를 가진 식당 사장이 강원도 동해안으로 이사 가서, 두 지방 특산물을 섞어 음식을 만든 다음, 식당 이름을 '동해안 물회와 전주 육회로 만든 남도 전통 비빔밥 맛집'이라고 지은 것과 같다.

중국 사람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여러 요소를 버무려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거나 그렇게 사용하는 데 익숙하다.

필요하면 가져다 쓴다

중국 역사에서도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요소를 아무 거리낌 없이 사용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당나라 시대 당태종은 유교를 국가 운영 이념으로 하면서, 정작 황제 본인은 오래 살고 싶은 생각에 도교를, 죽어서는 극락에 가고 싶은 생각에 인도서 전래한 불교를 믿었다. 유교·불교·도교 창시자 공자·석가모니·노자의 사상이 다르기는 하지만, 객관적으로 모두 타당성이 있기 때문에, 필요할 때마다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종교를 가져다 쓰는 것이다.

중국 보통 사람도 마찬가지다. 중국에서는 내가 바라고 원하는 내용을 빨간 나뭇조각이나 천에 써서 걸어놓는데, 이런 표찰을 허원패(許願牌)라고 한다. '소원을 적은 표식'이라는 의미다.
 

중국 사람의 소원을 적은 허원패 (산둥성 취푸 공자 공묘) ⓒ 김기동

 
중국 사람은 유원지에 놀러 갔는데 그곳에 절이 있으면 소원을 적은 표식 허원패를 걸어놓고, 등산 갔는데 그곳에 도교 사원이 있으면 또 허원패를 걸어놓는다. 마찬가지로 유교 공간인 공묘나 문묘를 방문했을 때도 역시 허원패를 걸어놓는다. 불교나 도교나 유교를 종교로 믿는 게 아니라, 모두 훌륭한 성인인데 예(禮)를 표하면 소원을 들어줄 것이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대학 입시나 입사 시험을 앞두고는 훌륭한 선생님이었던 유교의 공자가 필요하고, 사업에 실패하거나 연애하던 상대방과 헤어져 마음이 심란하면 불교의 석가모니가 필요하고, 건강이 나빠지거나 장사를 시작할 때는 도교의 노자나 재물신 관우(關羽)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렇게 상황에 따라 필요한 종교가 다르고, 또 종교의 창시자를 기리는 공간이 다른 장소에 있다 보니 불편했나 보다. 그래서 중국 사람은 공자와 석가모니와 노자를 함께 모시는 삼수당(三修堂)이라는 종합 공간을 만들어 이용한다.  한국에서는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중국 삼수당 건물 ⓒ 김기동

 

삼수당 건물 안에 함께 있는 노자와 석가모니와 공자 ⓒ 김기동

 
삼수당(三修堂)에서 '수(修)'는 한국 한자에서는 '닦다, 익힌다'라고 해석하지만, 중국어에서는 '고쳐서 완전하게 만든다'라고 해석한다. 그러니까 중국 사람은 삼수당이라는 공간을 찾아 각각 다른 능력을 갖춘 공자와 석가모니와 노자에게 이루고자 하는 바를 한꺼번에 말하는 것이다.

중국 사람은 각각의 종교가 서로 다른 사상을 가지고 있고, 또 그 다른 사상이 서로 모순된다고 할지라도,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필요한 부분을 망설임 없이 가져다 사용하는 걸 실용적이라고 여기며 살아간다.

한국 융통성과 중국 영활성

한국에서는 그때그때의 사정과 형편을 보아 일을 처리하는 재주를 '융통성'이라고 한다. 중국에서는 '융통성'이란 단어를 금전, 물품 따위를 돌려서 쓰는 경제 행위라는 의미로만 사용한다. 중국에서 한국의 '융통성'과 같은 의미를 가진 단어는 '영활성(靈活性)'이다. 글자 의미대로 해석하면 '영혼이 자유로운 성격을 가졌다'라는 뜻이다.

하지만 중국 사람이 사용하는 영활성의 의미는 한국 사람이 사용하는 융통성과 전혀 다르다. '법이 정한 범위 안에서 융통성을 가진다'는 말처럼, 한국에서 융통성이란 어떤 일을 형편에 따라 적절하게 처리하기는 하지만, 그 방법이 그 일의 원래 목적이나 원칙을 벗어나면 안된다.

중국 사전에서 영활성이란 '원칙성'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원칙성이 문제를 해결하는 규칙이라면, 영활성은 문제를 처리하는 방법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영활성과 원칙성은 정반합의 관계로, 처음에는 원칙성의 기초에서 영활성 있게 일을 처리하지만, 영활성이 발전하면 또 다른 원칙이 만들어진다고 한다. 그러니까 세상에는 영원불변한 원칙이란 없고, 그래서 현재의 원칙도 완벽하다는 보장이 없으니, 영활성을 발휘하여 원칙을 계속 고쳐나가야 한다는 의미다.

이런 생각을 가진 중국 사람에게는 한 공간에 공자와 석가모니와 노자를 같이 모시고, 필요에 따라 공자와 석가모니와 노자를 융통성 있게 사용하는 것이 어색하거나 불합리한 일이 아니다.

누구에게나 배울 것이 있다

중국 어린이 필독서 <증광현문>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 글귀는 중국 초등학교 5학년 교과서에도 실려있다. "세 사람이 함께 길을 가면, 그중에는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 어떤 사람에게서 좋은 점을 발견하면 내가 배울만한 스승으로 삼고, 어떤 사람에게서 나쁜 점을 발견하면 혹시 나에게도 그런 나쁜 점이 있는지 살펴보는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 이 글귀의 원래 출처는 공자의 제자들이 쓴 <논어>다.

그러니까 어느 누구에게나 배울 만한 부분이 있다는 의미다. 다른 사람의 장점은 본받고 단점은 나를 돌아보는 계기로 삼으라는 의미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장점과 단점을 판단하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의 생각이다.

<증광현문>에는 이런 내용도 나온다.

"사람은 누구나 생각할 수 있기에,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즉 사람은 항상 '내 맞고 너 틀리다'가 아니라 '내가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라는 의미다. 중국 사람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심지어 전혀 다른 두 개의 요소를 버무려 살아가는 데 익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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