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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6.05 17:03 수정 2019.06.06 14:25
뉴욕 브루클린에서 활동하는 젊은 디자이너 테리를 만났다. 그가 개최하는 파티에 우연히 참석하게 되었다. 브루클린은 뉴욕 맨해튼과 지하철로 잘 연결되어 있는 동네다. 나는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어서 브루클린이 화려한 맨해튼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사는 좀 음습한 곳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한국으로 치면 젊은 아티스트들이 활동하면서 빚어낸 홍대 같은 힙(hip)하고 생동감 넘치는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다. 테리는 브루클린에 있는 프랫 예술대학(Pratt Institute)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했다. 장난감 회사에서 약간의 경력을 쌓고 지금은 전시회와 공모전을 준비중이다. 올 여름에는 로마에서 개최되는 전시회에 인공지능 관련 디자인을 출품했다고 한다.

나는 테리에게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 취업해야지?"라고 했더니, 그는 조금 머뭇거리면서 "뉴욕에서 경력과 경험을 쌓고 한국과 만나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그의 말에 떠나온 자의 쓸쓸함과 비장함이 묻어 있었다.

그와 대화하면서 디자이너와 아티스트의 차이를 알게 되었다. 디자이너는 주문자가 나의 바깥에 있고, 아티스트는 주문자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는 주문자를 찾고 있었고, 디자이너로 일하는 한 그 일은 평생 이어질 것이다.

그가 준비한 파티의 주제는 '2019년 막걸리 파티'였다. 그와 함께 행사를 준비한 주얼리 디자이너 진솔은 지난해에 친구들과 막걸리 파티를 하여 소셜네트워크(인스타그램 innojinsol 스토리 Makgeolli)에 올린 적이 있었다.

그 행사를 올해도 이어 가보자는 취지도 있고, 한국 술이 있다면 파티가 더 특별해질 거라 여겨서 기획된 것이었다. 그런데 테리가 막걸리를 직접 빚겠다고 마음먹은 게 파티를 1주일 앞둔 날이었다.

막걸리는 속성주이긴 하지만 발효 시간이 충분치는 않았다. 인터넷 유튜브로 막걸리를 배운 테리와 진솔은 뉴욕에 머물고 있는 내게 조언을 구했다. 다행스럽게도 막걸리는 순발력이 있는 술이다.
     
뉴욕 한식세계화추진위원회 행사용으로 빚고 있는 술이 내게 있어서, 그 술의 일부를 밑술로 삼고 맨해튼 한인마트에서 멥쌀가루를 사서 덧술을 하라고 조언했다. 고두밥 대신에 백설기를 찌면 술 익는 시간을 단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응급 처방으로 막걸리 만드는 법을 가르쳐줬더니, 테리가 막걸리 파티에 나를 초대한 것이다. 나는 기꺼이 젊은 뉴요커들이 막걸리를 어떻게 가지고 노는지 궁금하여 참석하기로 했다.

맨해튼에서 열린 '막걸리 파티'에 초대받다
 

홈파티에 나온 술들. 테리가 직접 빚은 술과 월매와 순희와 뉴욕에서 만들어진 토끼소주와 웨스트32 소주. ⓒ 막걸리학교

 
파티는 금요일 저녁 시간에 열렸다. 초대된 사람들은 테리와 진솔의 디자이너 친구들, 그 친구들이 초대한 또 다른 친구들, 테리가 아파트 홈페이지에 공지하여 초대한 주민들 해서 50여 명이었다. 제법 많은 사람들이 초대되었다. 파티장은 테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 1층 공유주방으로 탁자와 의자가 잘 갖춰진 큰 공간이었다.

젊은 뉴요커들의 행사에 참여해서 나는 낯설고 특별한 장면 몇 가지를 보았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테리의 술 상표였다. 테리는 디자이너답게 파티를 열면서 직접 빚은 술에 이미지를 부여하고, 그 이미지를 상표로 만들었다. 
  
막걸리를 빚고 난 뒤에 상표를 만들었으니, 테리가 막걸리보다 더 순발력이 좋았다. 테리는 파티가 그냥 놀고 즐기는 자리가 아니라, 주제가 있고, 그 주제를 구현한 이미지가 있으면 손님들이 더 집중하고 많이 찾아온다고 했다.
 

뉴욕 브루클린 막걸리 파티가 열린 공간의 포스터와 내부 모습. ⓒ 막걸리학교



테리가 만든 막걸리 상표를 보았다. 상표에는 막걸리에 들어가는 재료인 쌀과 누룩과 물이, 이삭이 달린 벼, 누룩을 닮은 달, 하늘에서 내리는 빗방울로 구현되어 있었다.

한국적인 이미지는 기와집, 호리병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많은 요소가 있어 복잡할 법도 한데, 선을 잘 활용하여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테리는 이 상표를 이용하여 큰 포스터까지 만들어 출입문에 붙여 두었다.
  
테리에게 디자인 의도를 물었더니, 술 상표도 되지만 벽에 붙이면 독립된 일러스트 작품이 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했다. 한 편의 시가 읽는 사람에 따라 각기 달리 해독되듯이, 그 디자인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상표도 되고 작품도 되게 만든 것이었다. 디자이너에게 아티스트다운 요소를 가르친다는 프랫 출신다운 디자인이었다.

파티는 저녁 8시가 넘어서야 시작되었다. 그런데 시작의 경계가 불분명했다. 주문한 음식은 뒤편 바에 놓이고, 마실 술은 앞쪽 바에 놓여있는데, 사람들은 탁자가 있는 의자에 앉질 않고, 모두가 선 채로 술잔을 들고 대화를 나눴다. "왜 앉지 않느냐?"라고 한 친구에게 물었더니, "하루 종일 앉아서 일하잖아요, 선 게 편해요"라고 했다.

그런데 그 말로는 이해되지 않았다. 의자가 있는데도 앉질 않다니, 한국의 풍경과는 너무 달랐다. 우리는 양반다리를 하고 앉거나, 좌식 문화가 익숙하지만, 저들은 바 문화가 익숙해서 저럴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 궁금증을 푼 것은 누군가 "앉아 있으면 더 이상 새로운 사람과 대화하지 못하잖아요. 서 있어야 끊임없이 새로운 사람과 만나서 이야기 할 수 있죠"라는 말을 듣고서였다. 그러고 보니 그들은 한 자리에 서 있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때로 탁자에 술잔을 내려놓고, 두 팔을 벌리고 손바닥을 펼치면서 역동적인 몸짓으로 말하고 있었다. 앉아 있으면 오지 않는 기회였고 볼 수 없는 동작이었다. 테리는 이날 온 손님이 50명이 넘는데 10명 정도만 알고 나머지는 처음 만난 사람들이라고 했다. 끊임없이 다문화가 섞이는 뉴욕에서 파티가 얼마나 유의미하고 소중한지를 보여주는 현장이었다.

음식보다 술이 중요한 뉴요커들의 파티 문화

파티에서 음식이 중심에 있지 않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손님을 초대하면 음식을 부족하지 않게 풍성하게 준비해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다. 그래야 서운해하지 않고, 제대로 된 대접이라고 안도한다.

그래서 집에서 치르는 손님맞이는 음식 준비에서 음식 대접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모두의 파티가 아니라, 음식 준비하는 사람의 희생으로 귀결되고 만다. 젊은 뉴요커의 파티에서는 음식이 중심에 있지 않았다.

뒤쪽 바에 배달 음식, 떡볶이와 김치전과 갈비, 치즈를 토핑한 얇고 큰 뉴욕 피자,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타이의 스프링롤, 중국식 만두가 있었다. 하지만 파티에서 가장 화려한 것은 음식이 아니라, 참여한 서로의 존재였다.

화려하게 여배우처럼 노출 많은 옷차림으로 참석하는 이들도 있었고, 막걸리 톤으로 흰 옷을 입고 온 이들도 있었다. 전문 남성 모델 한 사람은 촬영장의 여장 차림 그대로 참석해서 모두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뉴요커들의 파티에서는 술이 음식보다도 더 중요했다. 술은 따라주기도 하지만, 음식은 그림자처럼 놓아두기만 할 뿐이었다. 일부러 파티장에서 음식에 집중하지 않도록 만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술은 대화하면서 목을 축이며 마실 수 있는데, 음식은 입을 크게 벌려야 하고, 고개를 많이 숙여야 하고 또 오래 씹어야 하니 대화를 방해하는 요소였다. 서로 어울려 말하는 소리에 볼륨 높은 음악 소리조차 묻힐 정도였다.
 

뉴욕 브루클린 막걸리 파티의 즐거운 순간. ⓒ 막걸리학교

 
파티는 막걸리 드레스 코드를 한 이들과 테리가 디자인한 상표가 붙은 술병을 들고 기념 사진을 찍기도 하면서, 웃음꽃을 피우며 늦도록 이어졌다. 젊은 뉴요커들의 파티를 보면서, 나는 테리의 주문자가 되기로 했다.

테리가 만든 막걸리 상표를 이번 한식세계화추진위원회 뉴욕 맨해튼 행사의 상표로 사용하고 싶다고 했다. 테리는 흔쾌히 동의했다. 나는 테리의 창의성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약간의 주문을 했다.

상표가 흰색이라 막걸리 흰색에 묻히니, 색을 넣었으면 좋겠다. 술 빚는 뉴욕이라는 메시지가 들어갔으면 좋겠다. 그 두 가지 것을 주문한 결과로 두 가지 디자인이 새로 나왔다.

노란 달이 뜨고, 오방색이 들어가고, 막걸리의 흰색을 강조한 하얀 디자인과 막걸리 흰색과 대비되는 검은 디자인이 완성되었다. 뉴요커들이 보면 충분히 한국과 한국 술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는 디자인이었다. 이제 뉴욕의 젊은 디자이너 테리가 합류하면서 뉴욕 행사는 더 기대할 만해졌다.
 

테리가 디자인한 막걸리 상표 포스터. ⓒ 막걸리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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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평론가, 여행작가. 술을 통해서 문화와 역사와 사람을 만나고 있다. 사단법인 한국술문화연구소 소장이며 막걸리학교를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