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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6.04 13:43 수정 2019.06.04 14:08
1950년 7월 1일 대전형무소. 특경대 부대장 이준영이 2층 교회당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이계동 당직 간수장이 허겁지겁 뛰어왔다.

"왜 그래요?"
"검사장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오늘 새벽을 기해 대규모 적의 공격이 있다고 하네. 그러니 공산당 책임자들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그대로 집행하래."

당직 간수장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 일은 이준영이 독단으로 실행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쏟아지는 폭우를 뚫고 김택일 대전형무소장에게 가서 이를 전했다. 형무소장은 대전지검 검사장에게 이를 확인하기 위해 이준영과 함께 검사장 관사로 갔다.

"영감, 어떻게 된 겁니까?"
"큰일 났어. 적의 대규모 공습이 있다고 공산당 우두머리를 처리하래."
"감방 안에서 총성이 있으면 소요가 일어날 텐데요."
"아, 심장에다 쏴요?"
"영감님, 심장에다 쏜다고 총소리가 안 납니까?"

검사장과 형무소장이 옥신각신했다.

소장 일행은 지프차를 타고 소장관사로 갔다. 상급자인 형정국장에게 재차 확인해보기 위해서였다. "자네는 기다려"하며 소장이 관사로 들어갔는데, 잠시 후 나온 이는 소장이 아니었다. 원태연 형정국장(현재의 교정국장)이었다. 이준영이 부동자세를 취하자 원 국장은 "대전역으로 가자"라고 했다. 왜 그러냐고 묻자, 이우익 법무부장관이 전주행 피난열차를 타기 위해 역에 가 있으니 "가서 확인해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형무소를 나와 법원네거리를 지나 도청 앞에서 좌회전을 하면 대전역이었다. 비는 억수같이 쏟아지는데, 달리는 지프차 때문에 물보라가 튀었다. "자넨 여기 있어. 내가 장관 만나고 올 테니까." 약 20분 후에 원 국장이 왔다. "장관을 못 만났네. 소장에게 알아서 처리하라고 전하게." 그러고는 피난열차를 타기 위해 지하도로 내려갔다.

이준영은 원 국장을 향해 권총을 쏘고 싶은 욕구를 강렬하게 느꼈다. 국난(國難)시에 위에 것들이 책임은 지려 하지 않고 모두 도망가기에 급급하니 말이다. 하지만 지하도에 수많은 피난민들이 있어 차마 총을 쏠 수는 없었다.
 
'위에 것들'이 도망간 이후
 

특경대장 이준영 이준영이 대전형무소 정문에서 촬영한 사진 ⓒ 박만순


형무소로 돌아온 이준영은 소장에게 이를 전했다. 그러자 김택일 소장은 "직원들만 개죽음 시킬 수 없으니 지금 시간부로 직원들을 해산 시킨다"고 선언했다. 이준영은 기겁했다. 당시 대전형무소에는 약 4천 명의 재소자가 있었다. 그런데 이들을 방치하고 피난을 가면, 이들이 북한군과 합작해 무엇을 할지 모른다. 눈앞이 아찔했다.

"안 됩니다. 소장님은 피난을 가든 말든 알아서 하십시오. 저는 특경대원들과 함께 형무소를 지키겠습니다."

법무무장관, 대전지검 검사장, 형정국장, 대전형무소장이 모두 도망간 대전에서 이준영 특경대 부대장(수석 분대장)은 대원 22명과 함께 형무소를 지키겠다고 결의했다. 

잔뜩 긴장한 이준영은 특경대의 힘만으로 형무소를 지킬 자신이 없어 충남도경에 전화를 했다. 충남도경과 계엄군에서 각각 1개 분대씩 응원군이 도착해 정문과 외곽을 경비했다. 그런데 소장과 형무소직원들이 도망갔다는 정보를 입수한 군인과 경찰들은 직원들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했다. 이로 인해 도망가지 않고 형무소 치안을 위해 출근하던 이수복 작업과장이 군인들의 총격에 사망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준영이 군인과 경찰에게 자중을 요청하고 있는데, 정진원 대원이 헐레벌떡 뛰어 왔다. "부장님 큰일 났습니다." "왜 어디서 파옥(破獄)이 일어났어?" "7감방에서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달려가 보니 계획된 소요가 아니라 '간수들은 보이지 않고, 시간이 되도 밥을 안 주니, 문을 때려 부수고 나가자'며 웅성거린 것이다. 당시 7감방은 재소자가 차고 넘쳐 작업장을 임시감방으로 개조한 곳이었다. 그러다 보니 보안이 허술하고, 여러 명이 힘으로 밀어붙이면 문이 박살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준영은 부하와 함께 총에 장전을 하고 설득과 회유를 통해 재소자들을 진압했다. 즉, 7.1 소동이란 것의 실체가 이것이었다. 좌익과 공산주의자들의 계획된 소요가 아닌, 형무소 직원들이 모두 없어지고, 아침을 안 주자 일시 소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형무소를 버리고 도망갔던 김택일 소장은 직위해제 되었다. 하지만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고 도망가기에 급급했던 법무부장관, 형정국장, 검사장은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재소자들 넘기시오"

1950년 7월 7일 중위 계급장을 단 헌병이 대전형무소 소장실 문을 벌컥 열었다. 이순일 소장서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어서 오십시오"라며 인사했다. 당시는 계엄(戒嚴) 상태라 군(軍)이 치안상황을 진두지휘할 때였다. 특히 헌병은 군대 내의 경찰(Military Police)이었다. 즉, 헌병(憲兵)과 CIC(특무대)는 무소불휘의 권력을 지닌 집단이었다.

헌병 중위는 부하에게 명령 내리듯이 "국방경비법 위반자, 여순사건 및 제주4.3사건 관련자, 보도연맹원, 일반수 중 10년 이상의 중범을 넘기시오"라고 했다. 이순일 소장서리는 이준영과 함께 법원장 관사에 있던 법무부장관을 만나러갔다. 당시 법무부장관은 기차를 타고 남부지방까지 피난 갔다가, 국민들의 원성으로 다시 대전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이우익 법무장관은 "계엄군이 달라면 줄 수밖에 없다. 만약에 재소자를 인도한 게 후일 문제가 되거든, 사전에 장관 만났다는 소리 하지 마시오"라는 것이 아닌가. 이준영은 '저런 것들이 장관입네 하고 앉아 있는 것'에 불끈했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이준식 부장이 명적계를 보며 재소자를 분류했다. 그래서 헌병대 중위가 요구한 대로 재소자와 보도연맹원, 일반수 중 중범죄자를 군에 넘겼다.

감방에서 끌려나오는 재소자들은 '고양이 앞에 쥐'였다. 어깨는 축 쳐지고 발걸음은 공중에 붕 뜬 듯 허둥댔다. 눈동자는 잔뜩 긴장해 초점을 읽은 상태였다. 재소자들은 광목으로 2인1조로 손을 묶인 채 GMC 트럭에 실렸다. 트럭 적재함에는 앉을 자리가 없었으나 적재함 모퉁이 4곳에 탄 군인들은 막무가내였다. "야, 이 새끼야 앉아"하며 개머리판을 휘두르기 일쑤였다.

대전형무소에서 학살 현장인 충남 대덕군 산내면 골령골(현재 대전광역시 동구 낭월동)까지 수송은 형무소 특경대 몫이었다. 1950년 7월 8일 아침에 시동을 켜놓고 대기하고 있던 트럭 조수석에 이준영이 탔다. '부릉'하며 트럭은 출발해 산내 현장으로 갔다. 자신들이 호송한 재소자들의 최후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준영은 이곳에서 못 볼 것을 목격하고 말았다.

한 헌병 중위의 활약
 

확인사살하는 군인 ⓒ 미국립문서보관소 사진


"어이, 특경대장 이리와"하며 심용현이 불렀다. 그곳에는 '조선정판사 위폐사건' 관련자 이관술과 송언필이 있었다. "어이 이관술, 죽는 마당에 '대한민국 만세'나 불러 봐." "대한민국 만세는 모르겠고 조선민족 만세를 부르겠소." 

하지만 이관술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대기하고 있던 사수들의 손가락이 먼저 움직였다. 대기하고 있던 청년방위대원들이 2인1조가 되어 이관술의 시체를 큰 구덩이에 던져 넣었다. "이봐, 특경대장 자네는 그쪽 구덩이에 가면서 확인사살 해"라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심 중위는 반대편 구덩이를 가면서 확인 사살했다. 

필자는 지난 2007년 이준영 등을 만나 산내 골령골 학살에 대한 증언을 들었다. 2007년 발간된 진실화해위원회의 <2007년 유해 발굴 보고서>에도 이같은 내용이 실렸다.

그런데 1992년 작가 노가원이 <말>지에 쓴 상황은 훨씬 리얼하다. 충남도경찰국 사찰과 주임 변홍명(가명)이 목격한 장면이다.
 
"중위가 '사격개시'하면 사수들은 방아쇠를 당기는 거지요. 보통 대각선으로 뒤통수를 쏘게 되는데 사격을 하면 골이 튀어나와 사수의 온몸에 튕겨요. 직통으로 쏘면 머리가 박살나요. 만약 총알이 빗나가면 중위가 뒤에서 권총 사격을 합니다. 사수의 발부리에 대고 발사하는 거지요. 그러면 사수는 풀쩍하고 한 길이나 뛰어 올라요"(노가원, '대전형무소 4천3백명 학살사건', <말> 1992년 2월호)
 
여기서 말하는 중위는 심용현 중위다. 심용현은 산내 학살현장에서 모든 사건을 지휘하고 점검하는 역할을 했다. 사전에 인근 마을 주민과 청년방위대원 약 50명을 동원해 커다란 구덩이 여러 개를 파게 했다. 그리고 재소자들과 보도연맹원들을 땅을 보게 한 후 근접사격을 가했다. 대부분 총구를 머리 가까이 했다.

심 중위의 '발사' 명령과 동시에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면 죽는 이들의 뇌수가 터져 바지를 흥건히 적셨다. 이 증언은 변홍명뿐만 아니라 이준영과 여러 명이 같았다. 또한 사수들이 주저하면 심 중위는 공포나 사수의 다리를 향해 사격을 가해 혼쭐을 내었다. '제대로 하지 않았다가는 너부터 죽을 줄 알라'는 협박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각각 경찰 10명, 군인 10명으로 구성된 사수 3개조 총 60명은 '살인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치안엔 무능력했던 대한민국 행정부와 군·검·경·형무소 상층부가 학살에는 모든 능력을 발휘한 형국이었다. 그렇다면 산내 학살현장에서 총감독 역할을 한 심용현 중위는 누구인가?
 
초고속 승진의 신화 심용현
     

심용현 사진 ⓒ 박만순

 
그가 산내 학살현장의 '총감독'으로 밝혀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최초로 산내 사건을 취재한 노가원은 변홍명의 증언을 토대로 헌병 중위라는 존재만을 밝혔다. 그런데 <오마이뉴스> 심규상 기자가 1999년 12월 이준영을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심용현'이란 이름이 나왔다. 필자 역시 2007년에 이준영을 인터뷰하면서 같은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심용현 본인이 직접 쓴 '자력서'(自歷書)가 나왔다. 관련자들의 증언으로만 존재하던 심용현의 행적이 그가 손으로 쓴 문서로도 확인됐다는 의미다. 증언과 문헌의 일치다. 필자는 이를 입수해 살펴봤다.
 
 

한국전쟁 직후 수천명이 희생된 대전 산내 골령골 민간인 학살의 현장 지휘 책임자가 심용현 중위임을 방증하는 자력서. ⓒ 박만순

   
이 자력서에 의하면 심용현의 군 생활은 아래와 같다. 심용현은 1918년 8월 30일 생으로 서울 용산구 한강로가 주소지였다. 그는 서울중앙고등보통학교(5년제)를 나온 후 부푼 꿈을 안고 군에 입문했다. 육사 8기로 1949년 2월 입대해 3개월의 교육을 받고, 1949년 5월 23일 소위로 임관했다. 그가 헌병 주특기(9110)를 받고, 대전에 있던 2사단 헌병대에 배치를 받은 것은 1949년 7월 7일이었다. 그러다가 1950년 5월 1일 중위로 진급했고, 청주에 있던 1군단 헌병 제4과장으로 발령이 난 것은 1950년 7월 14일이었다.

자력서에 기재된 시점과 맞춰보면 1950년 6월 28~30일경 산내 보도연맹원 1400여 명 학살과 1950년 7월 초에 형무소재소자 1800여 명 학살이 그의 주도로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물론 7월 중순에 있었던 형무소재소자 및 대전·충남지역 보도연맹원 약 1700~3700여 명 학살사건은 그의 손에서 벗어났을 가능성이 높다. 결론적으로 그의 손에서 32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볼 수 있다. 

심용현은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초고속 승진했다. 중위가 된 지 7개월 만인 1951년 1월 1일 자로 대위가 되었으며, 다시 33개월만인 1953년 9월 1일 소령으로 진급했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1954년 12월 중령으로 예편하면서 그의 군 생활은 끝났다.
 
다시 심용현을 생각한다
  
그는 전역 후 성신학원 이사장을 4차례 역임했고, 1986년 4월 사망했다. 그런데 성신여자대학교에서는 2011년 4월 교정에 그의 흉상을 제막했다. 학살자의 동상이 학문의 전당인 대학교에 버젓이 세워진 것이다.

상부의 명령에 국가폭력이라는 씻을 수 없는 경험을 했던 변홍명, 이준영이 말년에 학살에 참여했던 것을 후회하거나 괴로워했던 반면 심용현은 그렇지 않았던 듯하다. 어찌 보면 심용현은 이승만과 김창룡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아니 암울했던 대한민국의 축소판이라 할 것이다. 비록 그가 고인이 되었지만 그의 역사적 범죄를 지금이라도 밝혀야 하지 않을까.
 

지난 2011년 서울 성신여자대학교 교정에 세워진 심용현 성신학원 전 이사장의 흉상. 심 전 이사장은 한국전쟁 당시 대전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 현장을 지휘한 인물이다. 가운데 검은 옷을 입은 이가 심화진 전 성신여대 총장으로 심용현 중위의 딸이다. ⓒ 성신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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