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29 08:01최종 업데이트 19.05.29 08:01
'똑경제'는 똑똑한 경제필진 4명과 함께 매주 수요일 찾아가는 똑똑한 경제 이야기입니다. [편집자말]
 

부가가치를 만드는 작가의 존재는 지식경제 생태계의 1차 생산자에 해당한다. ⓒ pixabay

 
내가 학부에서 경제학 배우던 시절에는 '노동집약형 산업'과 '자본집약형 산업' 정도만 배웠다. 지난 해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폴 로머 등의 내생성장론이 등장하면서 기술, 제도, 지식, 이런 것들이 성장의 주요 요소로 분석되기 시작하였다. 지식경제, 창조경제, 복잡한 단어들을 썼지만, 뭔가 단순한 노동이나 자본이라는 말로만 설명하기 어려운 변화가 등장했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지금까지 한국 경제를 쉽게 설명하면 에너지와 자원을 많이 쓰면서 성장률을 만드는 방식이었다. 국가공단이나 지방공단 심지어는 '아파트형 공장' 혹은 최근의 혁신도시 클러스터 등 정부는 자원을 왕창 투입한다. 그리고 그걸 민간이 사용하면서 공장 자체를 늘려나가는 방식이 우리의 성장 패턴이었다. 그러다가 잠시라도 불균형이 생기면 박근혜 정부 때처럼 토건이나 아파트를 왕창 늘려 건설 부문을 통해 성장률 지표 관리 같은 것을 했다.


이론적인 얘기지만, 에너지나 자원의 투입을 줄이고, 그 자리에 지식이나 문화를 채울 수는 없을까? 어차피 성장률을 집계하는 한국은행의 국민계정이 결국에는 부가가치로 계산되기 때문에 거시모델상으로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런 방식이 여전히 익숙하지 않다. 특히 지방으로 갈수록 손쉬운 토건에서 대안을 찾게 된다. 현실을 보면, 꼭 토건을 원해서가 아니라 토건이 아닌 다른 방식을 해 본 적이 없고 생소해서 그런 것 같다. 대선에서는 그래도 토건 공약의 비중이 좀 줄지만, 지방 공약들을 모아 놓은 총선 공약은 여당이나 야당이나 큰 차이가 별로 없다. 전부 다리 만든다고 하고, 지하철 끌어오거나, 고속철 끌어오고, 화끈하게 거점 공항 만든다고 하고.

얘기를 약간 돌려 '지식 경제 생태계'라는 단어를 써보자. 말은 멋있지만, 결국 책, 논문, 도서관, 작가, 신문, 잡지, 이런 것에 관한 얘기다. "대한민국 정책은 사무관들이 만들고, 대한민국 논문은 조교들이 만든다." 수 십년 전부터 통용되는 농담이다. 행정적으로 뭔가 '티가 나는 일'은 장관이나 차관 등 정무직들이 다 챙겨간다. 마찬가지로 지식에서도 생색과 열매는 최종단계에 '이름'을 거는 사람이 다 가져간다. 물론 다른 분야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완성업체의 조립 라인이 차 만든 성과를 다 챙겨가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작가 - 지식의 최전선 혹은 가장 밑바닥

그런데 이런 지식의 최전선이나 가장 밑바닥에 '작가'들이 존재한다. 2000년대 들어와 위태롭다는 '프레카리우스(precarious)'와 무산계급을 의미하는 '프롤레타리아'라는 단어의 합성으로 '프레카리아트'라는 말이 등장했다. 위험한 무산계급, 그 정도의 개념을 쓴다면 한국의 작가들은 대부분 프레카리아트에 해당한다.

공지영이나 김훈급의 유명 작가들이나 화려한 성과로 눈부신 1급 드라마 작가들도 있지만,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방송국의 막내 작가까지, 모두 작가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그들 중에는 게임회사와 일하는 작가들도 있고, 마케팅 동영상용 스크립터처럼 정말로 건별로 계약하는 작가들도 있다. 예술과 지식의 두 분야에 걸쳐서 그 숫자 조차도 알기 어려운 '전업 작가'들이 지식생태계와 문화생태계의 맨 아래 계층을 구성한다. 고용직도 있고 비고용직도 있어서 분류 자체가 어렵다.

2018년 출판통계 기준으로 보면 책 발행종수가 6% 줄었고, 발행부수도 4.8% 줄었다. 책 시장은 전체적으로 침체기이고, '지식의 다양성'이라는 눈으로 보면 진짜 위기다. 책이 지식경제에 대한 중요한 자금원으로서의 역할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분야별로 보면 종교, 어학, 예술, 기술과학이 10% 이상 발행 부수가 줄었다. 문학이나 사회과학도 만만치 않게 줄었다. 늘어난 것은 학습참고, 아동 분야, 그리고 이례적으로 철학분야가 늘었다. 발행부수가 준 것도 문제지만, 내용도 그렇게 좋지는 않다.

그렇다면 잡지나 신문사의 원고료는 어떨까? 약간씩 원고료가 올라간 경우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10년 전 원고료에서 크게 변하지 않았다. 그래도 신문은 좀 낫다. 잡지는 신규 매체가 거의 생겨나지 않고, 기존에 있던 잡지들도 문 닫는 게 일쑤다. 이런 데는 돈이 없어서 그렇다고 치자. 인터넷 포탈의 원고료는 어떨까? 디지털 시대의 신매체로서 돈이 없는 것은 아니더라도, 원고료만큼은 평균적으로 신문 기고보다 댈 바가 아니다. 텍스트의 가치에 대해서 그렇게 높게 생각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이런 것들을 모아서 보면, "글 쓰고 싶은 사람은 당신 말고도 많습니다", 이런 게 작가를 대하는 한국 경제의 자세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진짜로 그럴까? 영화, 드라마, 게임, 이런 중요한 문화산업의 근간도 작가들이 만들고, 다양한 형태의 지식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종합하고 가공하는 일도 작가들이 한다. 지식과 사회의 중간 가교 역할은 여전히 텍스트가 하고 있고, 그 텍스트를 만드는 사람들이 바로 작가다.

개별적인 차원에서 보면 "하거나 말거나", 그야말로 "자기가 좋아서 한 거 아니냐",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국민경제 차원에서는 텍스트를 기반으로 무엇인가 부가가치를 만드는 작가의 존재는 지식경제 생태계의 1차 생산자에 해당한다. 여기가 허약한 상태에서는 보다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지식으로 나아가기가 어렵다.

한국 경제의 다음 단계를 고민한다면

이 상황에서 최저임금의 강화와 함께 작가, 정확히는 '전업작가'의 생계에 대해서 어떻게 볼 것이냐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단순히 자영업자의 연장선에서 '프리랜서'로 볼 것이냐, 아니면 지식경제의 한 축으로 볼 것이냐, 여기에 따라서 시선이 달라진다. 가끔 인구 대비로 시장 규모를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식이면 스웨덴은 '말괄량이 삐삐' 같은 것을 만들 수 없고, 벨기에는 '스머프'를 생산할 수 없다. 인구 천만 미만의 북구 국가에도 다 소설이 있고, 문학이 있고, 독자적인 아동 책 시장이 있다.

간단히 따져보자. 매달 두 군데 지면에 글을 쓰는 정도면 전업작가 중에서도 1류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정도면 월 수입으로 60만 원 넘기 어렵다. 거기에 책을 일년에 두 권 낸다고 가정하고, 1쇄가 다 팔린다고 해보자. 요즘 평균치로 하면 연소득이 300만 원 정도 된다. 합산해도 월 백만 원 소득은 요원하다. 어떻게 계산을 해도 맨 앞에 있는 아주 일부 인기작가를 제외하면 최저생계비와는 아직 거리가 멀다.

그냥 시장 논리로 접근하면, 자신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그러나 지식의 다양성이라고 본다면 여기도 정책적 수요가 없지는 않다. 정책 메커니즘은 디자인하기 나름이다. 신문이나 잡지에 원고료 지원금을 줄 수도 있고, 개별적으로 생활지원금을 줄 수도 있다. 도서관의 도서구입 예산을 늘리는 것도 한 방법이다.

어느 쪽이든 간에, 문화를 담당하는 문화부와 지식을 담당하는 산업부에서 좀 더 적극적으로 메커니즘을 디자인하는 편이 한국 경제를 지식경제로 전환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그래봐야 토건에 가는 예산이나 최저임금에 대한 지원금에 비하면 정말 손톱만큼 밖에 안 되는 돈일 것이다.

지식에 정부 예산을 넣을 수도 있다는 생각, 이게 아직 우리에게는 생소하다. 한국 경제의 다음 단계를 고민한다면, 정부가 최근 죽겠다고 아우성치는 작가들의 경제적 삶에 대해서도 좀 들여다 볼 때가 된 것 같다.

"사람이 먼저다", 좋은 말이다. 시멘트가 아니라 사람이 만드는 지식에 대해서도 새롭게 볼 필요가 있다. 흔히 대안으로 자주 거론되는 사회적 경제와 비교하면, 지식 경제와 문화 경제가 갖는 독특한 장점이 하나 존재한다. 사회적 경제는 20대에게 별로 인기가 없는 반면, 문화 경제나 지식 경제는 힘들어도 그들이 여전히 하고 싶어하는 일이다. '청년' 과 '사람', 그들이 하고픈 일에 돈을 투입한다는 시각으로 이 분야를 다시 봤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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