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17 17:25최종 업데이트 19.05.29 16:20
공덕역을 나오니 황사에 미세먼지까지 더해져 오경택(30)은 가슴이 답답했다. 역에서 서부지방법원까지는 얼마 안되는 거리였다. 공판까지는 다소 시간이 남았지만, 미리 가서 생각도 마음도 정리할 겸 걸음을 바로 옮겼다. 법원 정문 앞에 다다르니 공기는 더 탁해진 것 같았다. 그 뿌연 연기 속에서도 서부지방 검찰청과 법원은 근엄한 표정을 잃지 않고 서있었다. 
 

서부지방법원 앞에서의 오경택 5월16일 선고공판을 앞두고 오경택은 당당한 자세를 취했다. ⓒ 민병래

 
법원 앞을 들어서려는데 초등학교 아이들이 재잘거리면서 뛰어간다. 오경택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가 자라난 부산의 또래 소년들처럼 그도 박정희를 좋아했다. 집에서 구독하던 <조선일보>는 그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었다. 그렇게 성장한 자신이 '양심적 병역거부자'로 항소심 공판에 서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 못했다.

"5.18 당시 광주 시민들이 총을 들었던 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칠흙같은 법복을 입은 검사의 질문이 시작되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게 법정 바닥을 맴돌았다. 검사의 말에 곤혹스러워하며 오경택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방청객은 보이지 않았고 오경택의 친구, <한겨레> 신문의 기자, 증인 조현철 신부만 자리하고 있었다.

"피고인이 그 당시 광주에 갔다면 총을 들지 않았을까요?"

답변을 재촉하듯 검사의 질문은 계속됐다. 누군가가 '무슨 질문이 저래'하며 혼잣말을 한 것도 같았다.

오경택은 삼수까지 해서 2010년에 서강대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1학년은 여느 대학생과 다를 바 없었다. 수업도 적당히 빼먹었고, 즐겁게 소개팅을 다니며 가끔은 진지한 토론을 하기도 했다.
 

서강대 총동문회관에서 웃음짓는 오경택 2010학번, 학교에선 아저씨(?)라고 불리지만 여전히 앳되고 맑은 청년이다 ⓒ 민병래

 
'비종교적' 병역거부자 오경택

그랬던 그에게 2011년 6월 '강남구 포이동 판자촌의 화재'는 큰 충격이었다. 포이동 266번지의 96가구 중 72가구가 불에 몽땅 타버린 사건이었다. 더 큰 충격은 불이 나자 강남구청이 용역을 동원해 철거를 시도한 일이었다. '무허가'라며 난민 처지가 된 주민들을 밀어내려 했다. 그 해 여름을 포이동에서 보내면서 그는 비로소 "세상에 의문을 갖는 청년"이 되었다.

"피고인은 답변을 해주세요."

검사의 독촉이 이어졌다.

"만약 당시 광주에 내가 갔다면... 당시 시민군이 그랬듯이 총을 허공에 쏘거나 아예 총을 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오경택의 대답은 입안에서 맴도는 듯했다. 중간에 친구가 "경택아 힘내"라고 낮은 목소리로 외치는 게 들려왔다.

포이동 이후, 그의 20대는 많은 질문의 시간들이었다. '화려한 휴가'란 작전명으로 이루어진 광주 학살은 무엇인가? 미군 기지터를 확보하기 위해 대추리 주민을 쫓아낸 '여명의 황새울' 작전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오경택은 혼란스러웠지만 부딪혀갔다. 사회당 문턱을 두드렸다. '청년 좌파'에도 가입해 보고, 총학생회 활동도 했다. 경찰에게 두들겨 맞기도 하고 유치장을 몇 번인가 들락거렸다. 그 시간 후 오경택은 믿음 하나를 세울 수 있었다. "국민을 향해 작전하고 학살하는 군대에 들어갈 수 없으며 총을 잡지 않는다"는 신념이었다.

그는 재판에서 이 이야기를 맑은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잠기고 제대로 움터 나오지 못했다.

'병역거부'의 역사는 결코 짧지 않다. 지금까지 '여호와의 증인'은 무려 1만명이 넘는 신도들이 재판을 받고 투옥되었다. 일제하에서도 신사참배와 동방요배를 거부한 문태순과 신도 33명이 구속되었다. 병역거부는 아니었지만 일본의 전시동원체제에 대한 저항이었다.

히틀러 체제의 독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여호와의 증인은 "손에 무기를 들고 조국을 방어"한다는 서명만 하면 강제수용소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하지만 신도들 대부분은 양심을 지켰다. 그들이 펴내는 '파수대'에 따르면, 나치는 여호와의 증인 4200명을 수감시켜 1490명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한다.  

"독립운동 당시 항일무장투쟁을 피고인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생각에 잠겨있던 오경택을 흔들어 깨우듯 검사의 질문이 이어졌다. "정당방위도 거부할 것이냐? '정의로운 전쟁'에도 참여하지 않을 것이냐?"는 말이었다. 검사는 '그 상황이면 총을 들겠다'는 답변을 원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경택의 신념은 뿌리가 얕고 흔들리고 있다, 양심적 병역거부에서 '양심'은 신념이 깊고 확실하며 진실한 것을 뜻하는데 그는 거리가 멀다"라고 증명코자 했다.

2017년 멜 깁슨이 만든 '헥소고지'라는 영화가 있다. 실화를 다룬 이 영화의 주인공은 제7일 안식일 신자인 도스. 국기에 경례할 수 있고 군복 착용은 되지만 총을 들 수 없다는 도스는 일본군과 미군이 치열하게 싸운 오키나와 헥소고지에 비무장으로 투입된다. "한 명만, 한 명만 더 구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던 위생병 도스는 그곳에서 75명의 생명을 구한다. 총을 들지 않고 가장 위대한 전쟁 영웅 중 한명이 된 것이다. 

도스가 참전한 전쟁은 미국이 수행한 반파시즘 전쟁이었다. 어쩌면 검사가 말한 '정의로운 전쟁'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영화에서 일본군은, 단지 사살되어 마땅한 짐승으로 그려진다. 집총을 거부한 군인이 주인공인 영화에서도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전제는 변하지 않았다. 

한때 오키나와에서 정의로웠을지 모를 미군은 노근리에서 우리 양민에게 '인디언 소탕을 추억'하면서 기관총을 겨눴다. 통킹만 조작사건까지 일으키면서 베트남 전쟁을 벌여 1백만 톤에 이르는 폭탄을 퍼부었던 미군이다. 이라크에서는 '대량살상무기'라는 신화까지 만들어 전쟁을 일으켰던 미군이다. 과연 미군은 한때나마 정의로웠을까?

오경택은 그렇게 질문하고 아파하고 흔들리면서 "내가 총을 들 수 없다"는 평화적 신념의 병역거부자로 나아갔다. '영토수호와 신성한 군대'라는 군사주의에 질문을 던지고 그 성역에 도전하는 한발을 내디딘 것이다.

오경택은 이런 고뇌를 당당하게 말하고 공감을 얻고 싶었다. 하지만 검사는 '총을 들 수밖에 없잖아, 오경택!' 이렇게만 다가왔다. 검사의 심문은 그 뒤로도 이어졌다.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위협 받고 있고 당신의 옆에 총이 있다면, 총을 들지 않을 것입니까?"

짜증스럽고 무의미한 공방 후 2년의 징역형을 구형받은 오경택은 법정을 나왔다. 아침에 뿌옇던 미세먼지가 더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4월 2일의 일이었다.

선고일인 5월 16일은 숨가쁘게 돌아왔다. 결심공판과 달리 선고당일 5월 하늘은 맑고 이뻤다. 오경택은 이날도 혼자 걸음으로 법원에 이르렀다. 다들 "좋은 판결이 있을 것"이라 격려했지만 검색대를 들어서려니 긴장이 되었다.
 

서강대 교정에 서 있는 오경택 그가 좋아하는 선배열사의 비가 있는 곳이다. 뒤로 푸르른 나무는 그의 마음을 드러내는 듯 하다 ⓒ 민병래

 
"항소를 기각한다" 그후

오경택에 대한 이날 선고는 의미가 크다. 2018년 6월 헌재는 "대체복무제가 없는 병역법은 헌법 불합치"라고 판결했다. 또 그해 11월 대법원은 '종교적신념에 의한 병역거부'에 대해 무죄 취지의 파기환송 판결을 내린 바 있다.

사실 포르투갈, 스페인, 러시아 등 많은 나라가 병역거부를 명문화하고 있다. OECD에서 병역거부를 인정하지 않는 곳은 우리나라밖에 없다. 오경택의 재판은 '종교적 병역거부'에 대한 헌재와 대법 판결 이후 '비종교적' 혹은 '정치적 신념'에 따른 병역거부에 대한 법원의 판단을 듣는 자리였다. 그래서인지 이날 아침 법원은 조금 북적였다. 일간지와 방송사의 카메라가 보였고 '전쟁없는 세상'의 활동가들, 노동당 동료, 증인으로 나서줬던 조현철 신부의 얼굴도 눈에 들어왔다.

"지금부터 병역법 위반에 대한 판결을 시작하겠습니다." 판사의 목소리가 법정을 갈랐다. 재판정이 일순 조용해졌다. 모두 몸을 곧추세우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기자들의 타이핑 소리만 타닥타닥 들려왔다.

얼마 후 "항소를 기각하되 다만 구속영장을 발부하지 않는다"는 주문과 "돌아가세요"라는 말을 듣고 오경택은 303호 법정을 나왔다. 모두들 아쉬워하고 답답해 했다.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손을 잡아주는 눈길에는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판사는 오경택이 2015년 9월 민주노총 집회에 참여해 형사처벌을 받은 사실이 있는 점, 5.18 광주 민주항쟁의 경우 시민군들이 총을 든 것을 정당한 저항권이라고 진술한 점, 일제의 침략행위에 총을 들거냐는 검사의 질문에 답변하지 못한 점 등을 들어 "양심적 병역거부로 인정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그러면서 오경택이 "유동적이고 가변적이며 타협적이고 전략적인 것으로 보인다"고 봤다.

'종교적 신념'에 따른 병역거부가 무죄가 되고 대체복무가 인정되기까지 참 오랜 세월이 걸렸다. 여기에 '평화적 신념'에 따른 병역거부가 무죄가 되는 것도 몇 굽이 산을 넘어야 할 것이다.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법원현관앞에서 입장을 밝히는 오경택 5월16일 그의 항소심 판결은 기각이었다. 서부지법 현관 앞에서 기자들에게 그의 소신을 밝히고 있다. ⓒ 민병래

 
다행스럽게도 오경택 이전에 멋진 선배들이 있었다.

2001년 12월 불교신자였던 오태양은 "사람 모양의 사격판을 향해 얼굴과 심장을 정 조준하여 방아쇠를 당기는 것, 효율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수류탄 투척연습 등 군사훈련을 거부하겠다"고 했다.

2008년 7월 의경 복무 중이던 이길준은 "미국 소고기 수입에 항의하는 촛불집회를 막아서며 인간성이 하얗게 타들어가는 고통을 느꼈다"며 전의경제 폐지를 요구하는 싸움을 벌였다. 또 김영배, 최기원, 박정훈, 박유호 등이 있었다. 

그들이 걸어간 길 뒤를 따라 이날 오경택은 이 재판정에 섰다. 그는 대법원에 즉시 상고할 뜻을 밝혔다. '1년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법원 밖을 나서지만, 아침에 만난 5월의 햇살은 그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오경택은 발걸음을 내디디며 그가 즐겨듣던 존 레논의 노래 '이매진'을 흥얼거렸다.

"혼자 꾸면 몽상이지만... 같이 꾸면 현실이 되므로..."

<못다한 이야기>

* 이 글은 오경택과의 인터뷰를 기초로 하였습니다. 임재성 변호사가 쓴 '삼켜야 했던 평화의 언어'가 많은 참고가 되었습니다. 
* 이 사수만보 연재는 사실에 입각하되 '문학적인 인물평전'을 써가고 있습니다. 일정 부분은 상상으로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습니다. 
* 판사의 판결문 원본은 구하지 못햇습니다. 재판정에서 속기로 정리했고 판결을 들은 사람들의 기억으로 재구성했습니다. 이후 판결문 원문을 보고 부정확한 부분이 있다면 바로 잡겠습니다. 

 
오경택의 프로필
2010. 02. 24. 서강대 입학
2010. 11. 15. 대학생사람연대 가입
2011. 11. 25. 총학생회 당선, 휴학 후 집행부원 활동
2011. 12. 31. 사회당 입당
2013. 02. 23. 청년좌파 가입
2014. 09. 02. 서강대 총학생회 연대기구 <맑음> 대표
2016. 05. 20. 청년좌파 중앙집행위원
2017. 08. 25. 대학 졸업
2018. 02. 26. 입영예정일 훈련소 입소거부
2018. 04. 10. 검찰 기소
2018. 06. 27. 병역거부 선언. 온라인에 병역거부 소견서 게재
2018. 07. 17. 병역법 위반 1심에서 1년 6월 실형 선고. 즉각 항소
2019. 04. 02. 2심 결심공판
2019. 05. 16. 항소심에서 징역1년6개월 선고 받음
2019. 03. 18. 노동당 입당

<오경택이 걸어온 시간들> 
 

후쿠시마 원전사태때 찍은 인증샷 탈핵 탈원전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SNS캠페인을 하면서 ⓒ 민병래

 
 

2018년 병역법 위반으로 1심 선고를 받고 동료들과 한컷 2018년 7월17일 오경택은 병역법 위반으로 1년6개월 선고를 받았다 ⓒ 오경택

   

2013년 2월 박근혜 인수위 앞에서 '최저임금'인상을 촉구하며 오경택이 재밌는 복장으로 최저임금 인상 촉구를 하는 유인물을 나눠주고 있다 ⓒ 오경택

 
  

알바연대에서 최저임금 인상을 위해 활동하는 모습 2013년 7,8월 오경택은 주요 매장을 순회하면서 최저임금 인상 촉구 활동을 벌였다. ⓒ 오경택

 
 

밀양역 앞에서 문화제를 끝내고 밀양 송전탑 반대투쟁시, 밀양역 앞에서 문화제를 끝내고 행사참가자들과 사진을 찍었다. ⓒ 오경택

   

2015년 1월 오체투지에 참가해서 행진하는 모습 오경택은 쌍용자동차 해고자 복직을 위해 추운 겨울날 오체투지에 참여했다. ⓒ 오경택

  

2014년 6월 총리공관앞에서 경찰들에게 폭행당하는 모습 오경택은 세월호 진상규명을 촉구하면서 총리공관앞에서 시위를 했다. 이때 경찰들에게 둘러싸여 폭행을 당했고 팔에 부상을 입었다 ⓒ 오경택

 
  

2015년 망월묘지에서 유가협 어머님들과 이한열열사 장학생이기도 했던 오경택이 망월묘지에서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님과 같이 시간을 보냈다 ⓒ 오경택

 
  

조현철신부님과 탈핵도보행진을 하며 이번 재판에서 증인으로 나서 주었던 조현철신부님과 탈핵도보행진을 같이했다. 조현철신부님은 그의 든든한 후원자다 ⓒ 오경택

 
 

개구쟁이 시절의 오경택 부산 연산동에서 다섯살때 찍은 사진 ⓒ 오경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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