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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5.14 11:41 수정 2019.05.14 11:41

국순당에서 전통을 재해석하여 만든 약주와 이화주 ⓒ 막걸리학교

 
요사이는 음악이나 패션, 인테리어에서 '뉴트로(New-tro)'를 이야기한다. 뉴트로는 복고(Retro)를 새롭게 즐긴다는 뜻이다.

술에서도 뉴트로가 구현되고 있다. 국순당은 백세주로 현대 약주 시장을 열었던 회사인데, 요즘은 '법고창신',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기치 아래 조선 시대 문헌에 등장하는 술들을 복원한다.

2008년부터 계절에 어울리는 창포주, 이화주, 자주, 신도주를 시작으로, 2009년에는 고문헌에 나온 술인 송절주, 소곡주, 동정춘, 약산춘을 빚었다. 또한 강원도 지역에서 전승되는 불술과 옥수수술까지 24종을 만들어 그중에 법고창신 5종, 청감주, 송절주, 사시통음주, 자주, 이화주를 사계절 상품으로 내놓았다.

이 술은 마트나 편의점, 일반음식점에 납품되는 국순당 백세주와는 다른 방식으로 소비자에게 다가간다. 현대백화점에서 판매중인 도자기 병에 담긴 선물용 제품은 술잔 두 개까지 포함해 한 병에 8만 8천 원에서 11만 원 선. 쌀 모양의 갈색 유리병에 담긴 제품은 주점용으로 5만~15만 원에 팔린다.

그 술을 맛볼 수 있는 주점들은 다음과 같다.

- 서울 강남 : 권숙수, 밍글스, 임프레션, 도사 by 백승욱, 봉우리 역삼점, 백곰막걸리 신사점, 노보텔역삼 안뜨레, 민스키친, 주옥
- 서울 강북 : 락희옥, 산울림1992, 두레유, 신라호텔 라연, 백곰막걸리 명동점, 롯데호텔 무궁화, 워커힐호텔 온달, 품서울, 월향 광화문점, 안씨막걸리, 주반, 모수 서울, 소설, 콩두, 서울다이닝, 한가람 약선한정식
- 서울 강서 : 메이필드 호텔 낙원, 월향 여의도점, 곳간 by 이종국
- 부산 : 해운대그랜드호텔 비스트로한
- 충북 청주 : 꾸본난로회


법고창신 제품을 전문으로 유통하는 홍성찬씨에게서 얻은 목록이다. 굳이 이렇게 열거한 이유는 한국 사회에서 한 병에 5만~15만 원 하는 전통 약주를 차별화해 팔고 있는 한식 주점과 한식당들이 어떤 곳인가 궁금해서다. 그중 한 곳, 락희옥 마포점을 직접 찾아가봤다.

그 흔한 참이슬과 카스가 없는 술집
 

마포 공덕동 네거리 부근의 락희옥의 모습 ⓒ 막걸리학교

 
락희옥 마포점의 공간 구성은 특별했다. 접이식 유리문 안쪽으로 내부가 훤히 들여다 보였다. 카페라면 손님들이 창밖을 바라보겠지만, 주점은 술과 사람에 집중하느라 밖을 보기 어려울 텐데, 그 구조가 남달랐다. 천장은 높고 내부 벽면은 짙은 숯 회색으로 마치 작은 영화관 같았다.

벽에 유화가 걸려있고, 곁방이 두 개 딸린 100석 넘는 공간 중앙에 천정 높이의 선인장이 서 있었다. 술 취한 사람들이 있을 텐데 가시 돋친 선인장이라니, 선인장이 "조심해!"라고 경고하는 것 같았다. 주인은 백발의 여성.

음식 메뉴판을 보니 보쌈, 불고기, 차돌박이, 육전, 문어숙회, 전복숙회, 떡갈비, 황태포, 김치메밀전병 등 한식이 기본이다. 된장찌개와 김치말이국수 같은 식사류도 눈에 띈다.

음료 메뉴판 역시 화려하다. 와인이 55종인데, 가격대가 4만 5천 원에서 9만 9천 원까지 다양하다. 수입 병맥주도 20여 가지다. 전통주로 분류된 것은 8종. 법고창신 5종류와 프리미엄 막걸리인 삼양춘, 대전 석이원주조에서 만든 석로주와 자자헌주가 있다. 소주는 일품진로와 롯데의 대장부와 국순당의 고구마소주 려가 전부다.

그 흔한 참이슬과 카스가 없다. '소맥'은 있는데 잔술로만 판다. 메뉴판에 소맥을 "황금비율로 말아드립니다"라고 적혀 있다. 술을 좀더 자유롭게 마시게 하겠다는 표시로, "와인 반입 환영"이란다. 주점 주인들이 끔찍하게 싫어하는 술 반입을 환영하다니, 이 집 주인의 과거가 궁금해 물어봤다. 기자 생활을 했고 홍보회사에도 다녔단다. 주인은 손님과의 심리 게임을 즐기고, 그것을 홍보로 활용하는 지략도 지니고 있다.

법고창신 자주(煮酒) 한 병을 주문했다. 안주는 국내산 오겹살을 자체 수분으로 찌고 매콤 시원한 맛을 냈다는 보쌈을 시켰다.

자주의 의미를 풀면, 끓인 술이다. 국순당 연구팀 소속 권희숙 연구원이 200년 전쯤 작성된 <주찬>이라는 책에 나온 다음 내용을 바탕으로 복원했다고 한다.
 
"좋은 청주 1병에 꿀 2전 후추 간 것 1전을 넣고 병 입구를 단단히 봉한 다음, 그 위에 젖은 쌀 한 줌을 얹어 중탕해서 끓인다. 그 쌀이 밥이 되면 다 된 것이니 내어서 차게 하여 쓴다."

원문대로 복원하는 게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쌀이 밥이 되면 다 된 것"이라는 내용대로 여러 차례 중탕 실험을 거친 결과, 55℃에서 5시간을 중탕해 만들었더니 "후추의 매콤한 맛이 약주의 은은한 맛과 어우러져 술의 품질이 가장 좋았"다고 한다.

자주를 한 잔 마셨다. 떫은맛과 매운맛이 주도하는데 신맛이 살짝 섞였다. 두부향이 나면서도 후추에서 올라온 향과 맛이 튀지 않고, 알코올 기운과 잘 어우러졌다. 비록 옛 문헌은 '차게 하여 쓴다'고 했지만, 본래 중탕해 맛을 잡았으니 좀 데워달라 했다. 술맛이 부드럽고 포근해졌다. 돼지고기 보쌈 한 점에 자주 한 잔을 곁들이니, 후추향이 고기 맛을 엷게 감싸준다.
 

보쌈의 맛을 부드럽게 감싸주는 자주 ⓒ 막걸리학교

 
주점이 술로 생존하려면

락희옥 주인은 법고창신 시리즈 중 사시통음주가 잘 팔린다고 했다. 주변 마포 직장인들에게 사시통음주가 선택받는 이유는 달지 않고 담백해서인데, 언제든지 통음해도 좋을 듯한 술 이름도 한몫 한다고 말한다. 락희옥은 대전 석이원주조와 협약해 약주 자자헌주를 만들고, 하우스맥주 제조장인 서울 노원구 바네하임과 협약해 비어 락희 제품도 매장에서 판다.

락희옥, 이름은 올드해 보이지만 분위기는 모던하다. 음식은 한식이지만, 술은 와인을 필두로 수입 맥주와 특별한 전통주로 채워져 있다. 락희옥은 평범하지 않으려는 주인이 평범하지 않은 술로 손님을 맞고 있다. 안과 밖을, 외국술과 한식을, 전통술과 모던한 분위기를 뒤섞어 재구성하고 있다.

찾아오는 손님들도 평범하지 않는 분위기를 즐긴다. 주점이지만 흐트러진 사람이 눈에 띄지 않고, 오후 10시면 손님 대부분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마치 회의를 끝내고 일어나는 사람들처럼, 서로에게 집중해 대화를 나누다가 일어난다. 주점도 오후 11시면 영업이 끝난다. 손님들은 주점 직원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데, 간혹 언성을 높였던 이들도 다음에 와서는 부끄러워하거나 미안해 한단다.

주점도 술도 생존하기 위해서는 많은 사연을 지녀야 한다. 때로 맛이 낯설다, 가격이 부담스럽다는 소리를 들으면 그것을 상쇄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그것이 '콜키지 프리(Corkage Free)'일 수 있고, 법고창신의 논리일 수 있다.

주점과 술이 특별함을 추구하면서도 손님과 익숙해지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술 한 모금에 고뇌 한 자락, 안주 한 점에 기쁨 한 토막을 풀어내줄 수 있다면, 주점이나 술이나 생존의 이유는 충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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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평론가, 여행작가. 술을 통해서 문화와 역사와 사람을 만나고 있다. 사단법인 한국술문화연구소 소장이며 막걸리학교를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