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30 14:10최종 업데이트 19.04.30 14:10

1967년 독일 언론 디짜이트에 실린 동백림사건과 윤이상 ⓒ Die Zeit

 
1967년, 독일에서 갑자기 17명의 한국인이 납치됐다. 현지 언론들은 '한국 학생 실종' 사건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라인란트팔츠 내무장관은 자유민주주의 헌법국가인 독일에서 어떻게 이런 납치가 가능하냐며 이 사건을 "사람 도둑질"이라고 규정 지었다.

당시 독일 기민당의 국회의원 벨홀드 마틴(Berthold Martin)은 국회에 이 사건을 조사해줄 것을 요청한다. 자유민주당 국회의원 돈(Dorn) 역시 수교 단절 카드까지 내밀며 "독일이 헌법국가라면 모든 납치 피해자가 독일에 있는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조속히 이 사건을 처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이 사건으로 인해 독일 정치인이 수교 단절까지 생각한 나라는 바로 대한민국이었다. 독일이 "사람 도둑질"이라고 규정한 사건은 바로 '동백림 사건'이다. 박정희 정권 시절의 대표 간첩조작 사건인 동백림 사건은 한국과 독일간의 관계를 위험하게 만들었다.

이 사건으로 박정희 정부는 '6.8부정선거 규탄 운동'의 열기를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간첩'은 언제 꺼내도 국민들을 혼란의 소용돌이로 밀어 넣을 수 있는 카드였다. 1967년부터 동백림 사건으로 국내 외에 거주하고 있던 66명이 중앙정보부에 의해 검찰에 송치된다. 그중 17명이 독일에서 거주하고 있던 한인들이었다.

검은 양복 입은 한국인
 

독일 신문에 보도된 한국인 '납치사건' ⓒ 온라인캡처

 
"또 아버지 이야기를 물으시려고 그러는 건가요? 그렇다면 전 할 말이 없습니다."

나의 인터뷰 요청을 들은 그의 첫마디였다. 그의 목소리는 너무 단호해서 나는 순간 아무 말도 못하고 눈만 끔뻑이며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쉽게 가늠해서는 안 될 아픔을 들춰내는 것 같아 그와의 인터뷰를 포기했다. 그는 '동백림 사건' 피해자 정규명씨의 아들 일련씨였다.

1967년 어느 날이었다. 프랑크푸르트 대학 물리학 박사과정 학생이었던 정규명씨 집 초인종을 누군가 눌렀다. 문이 열리자 검은 양복을 입은 남성들은 이렇다 할 설명도 없이 그를 한국으로 연행했다. 하루 뒤엔 부인 강혜순씨와 3살 남짓 아들까지 남산 중앙정보부에 끌려왔다. 하루 아침에 부부가 영문도 모른 채 서대문구치소에 감금되었다.

부부는 3살 아이가 7살이 되어서야 함께 독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동백림 사건으로 정규명씨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졌지만 서독 정부의 압박으로 감금 4년만에 풀려났다. 그렇게 1971년, 쫓겨나다시피 독일로 돌아왔다. 아들 일련씨는 그 후 오랜 시간이 흘러도 검은 양복 입은 남성만 보면 거부감을 표했다고 알려졌다. 
 

간첩 누명이 벗겨진 건 한참이 지난 뒤였다. 2006년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동백림 사건에 대해 "단순 대북접촉 및 동조행위를 국가가 무리하게 간첩죄로 적용하여 사건을 확대, 과장했다"며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를 권고했다. 그러나 그때 정규명씨는 이미 사망하고 없었다. 누명을 쓴 채 2005년 독일에서 생을 마감한 그의 비석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다. 

"조국은 하나다."

또 다른 피해자들
 

독일 언론 슈피겔에 실린 동백림 사건과 윤이상 1967 ⓒ 권은비

 
"이제 여든살이 다 된 분이에요. 그 이야기는 그만하고 싶어 하세요. 그때를 생각만 해도 너무 힘들어 하세요. 저도 남편이 그런 시간을 겪었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어요. 저를 만나기 전에 벌어졌던 일이었으니까요. 우리 아이도 성인이 되고 나서야 알게 됐고요."

동백림 사건의 또 다른 피해자인 최정길씨의 아내가 나에게 전해준 이야기다. 당시 21살의 독일 기센대학교 경제학과 재학생이었던 최정길씨 또한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억울한 옥고를 치른다. 동백림 사건의 피해자들 중 비교적 나이가 어렸던 최정길씨는 그 후 독일로 돌아와 고향 땅에서 당했던 아픔을 가족들에게도 좀처럼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독일에서 갑작스럽게 한국 정부요원들에게 붙잡혀 최소 13시간이 넘게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연행된 17명의 교민들 중에는 작곡가 윤이상씨도 있었다. 그는 동백림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은 후, 독일 정부의 적극적인 구명운동 덕에 수감 2년 만인 1969년에 독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1995년 눈을 감을 때까지 고국에 발 한번 딛지 못했다. 

지난 2017년 7월에는 문재인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가 독일 베를린 가토묘지공원에 있는 윤이상 묘소를 찾아 동백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윤이상의 고향인 통영에서 직접 공수해온 나무였다. 다음해 윤이상은 통영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통영국제음악당 뒤편 묘역으로 안장됐다. 고향으로 돌아오기까지 죽고 나서도 23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베를린 묘역에 함께 있던 동백나무는 윤이상 선생의 생전 자택으로 이식됐다.

4월, 베를린에 봄이 완연한 날, 나는 무작정 윤이상의 묘소가 있었던 가토묘지공원으로 향했다. 베를린 시내에서 약 1시간 정도 차를 타야 도달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곳에 윤이상의 묘소는 더 이상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엇인가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헛된 희망을 갖고 있었다.

그곳은 광활한 묘지공원이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윤이상의 묘소가 있던 곳이었는지 찾을 길이 없어보였다. 마침 묘지들을 관리하는 정원사에게 혹시 윤이상의 묘소가 있는 곳을 아느냐 묻자, 방긋 웃으며 답했다. "코너를 돌아가 가장 끝자리에 있는 묘소입니다." 자신이 그의 묘소를 오랫동안 관리 담당해서 잘 안다고 했다.

실패한 인터뷰

그의 묘소가 있던 자리로 걸어가는 동안 나는 동백림 사건의 피해자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떠올렸다. 결론적으로 동백림 사건과 관련한 나의 인터뷰 계획은 실패한 셈이었다. 나는 동백림 사건의 피해자 가족들에게 그들의 아픔에 대해 물을 수 없었다. 자신이 사랑한 나라에서 버림받은 사람들, 그럼에도 독일 땅에서 묻힐 때까지 고향을 그리워했던 이들의 외로움을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드디어 윤이상의 묘소가 있던 자리에 당도했다. 낮고 얇은 검은 돌이 사각으로 둘러져 있는 곳에는 어떠한 비석도, 표식도, 동백나무도 없었다. 그저 꺾여도 푸르른 소나무 장식만이 묘소 안에 놓여있을 뿐이었다.
  

윤이상 묘소가 있던 독일 베를린 가토묘지공원 ⓒ 권은비

 
베를린에서 나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베를린이란 도시는 마음만 먹으면 남한 국경 너머의 사람들도 만날 수 있는 곳이었다. 베를린은 냉전과 분단의 아픔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도시이기에 나는 이곳에서 필연적으로 한반도의 아픈 분단의 역사, 냉전의 역사를 경험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오마이뉴스 특별연재 <베를린 오! 베를린>을 통해 비범한 삶의 이야기를 품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을 소개했었다. 그들은 저마다 주어진 삶에 안주하지 않고 경계 밖으로의 여행을 떠난 사람들이었다. 이 글은 그 마지막 편이다.

이 기사의 끝맺음을 한참 망설이다가, 한국과 독일의 분단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이야기인 김연수의 소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의 한 구절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어둠 속에서 머물다가 단 한번뿐이었다고 하더라도 빛에 노출되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평생 그 빛을 잊지 못하리라. 그런 순간에 그들은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됐으므로, 그 기억만으로 그들을 빛을 향한, 평생에 걸친 여행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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