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09 07:40최종 업데이트 19.04.09 08:34
국민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기관으로부터 안전과 인생을 빼앗긴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범죄자가 되었던 이들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진실을 밝혀냈습니다. 그리고 사과 없는 국가를 대신해 스스로 자신을 기념하는 '이상한 집'을 지으려 합니다. 그 이상한 집의 이름은 '수상한 집'. 지금 제주에서 벌어지는 수상한 일을 채워줄 수 있도록 함께 해주세요.[편집자말]
지난 1월 24일 우리는 헌정 사상 처음으로 전직 대법관이 구속 수감되는 장면을 마주해야 했습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었습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그 뒤 직권남용,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상 국고손실, 직무유기, 허위공문서 작성 등 혐의로 2월 11일 기소되어 현재 재판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두가 지켜볼 이 사건에 특별히 더 관심을 두고 지켜보는 이들이 있습니다. 바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제주지방법원 부장판사로 재직하던 시절 그에게 재판을 받았던 강희철씨와 오재선씨입니다.


1986년 12월 4일 강희철, 오재선씨는 같은 날 같은 법정에서 양승태 주심판사로부터 각각 유죄판결을 받았습니다.

'강희철 무기징역, 오재선 징역 7년'

강희철은 60여 일 이상 불법 구금되어 고문을 받았고, 오재선 역시 45일 이상 불법 구금되어 고문을 동반한 조사를 받았습니다. 기록으로도 명백한 이런 불법수사 행위를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알고 있었을 겁니다. 아니 당시 재판에서 이 사실을 몰랐다면 판사로서 증거를 꼼꼼히 살피지 못한 엄중한 잘못을 저지른 것이겠지요. 불법 수사를 알고 있거나, 불법 수사를 모르고 있었거나, 모두 심각한 문제입니다.

[강희철] 마지막까지 버티다가 아들 보고 무너져
 

조작간첩 피해자 강희철씨 ⓒ 지금여기에


강희철씨의 체포 과정은 그야말로 한 편의 납치영화를 방불케 합니다.

1986년 4월 28일 제주도경찰국 정보과 정보3계 소속 현병국, 박홍범 수사관은 대공분실장인 고재우의 지시에 따라 당시 조천읍 신촌리에 살고 있던 강희철씨를 찾아가 호텔에 취업시켜주려고 왔다고 거짓말을 하고 그를 승용차에 태웠습니다. 취업 미끼에 속아 수사관들을 따라 간 곳은 제주시 이도1동 1782-13에 있던 대공분실이었습니다. 이곳에서 85일간 갇혀 갖은 고문을 받는 동안 당시 막 태어난 아들을 수사관들이 보여준다 해서 잠시 집에 다녀온 것 외에 외부로 나온 일이 없습니다.

끌려온 이유는 그가 일본의 조총련계 학교를 졸업했고, 그의 큰아버지가 4.3 당시 일본으로 밀항한 조총련계 인사였기 때문입니다. 그가 큰아버지로부터 받은 만년필과 양복은 모두 북한에서 밀봉 교육을 마치고 받은 하사품으로 조작되었습니다. 수사당국의 눈으로 볼 때 강희철씨의 큰아버지는 곧 북한이었던 것입니다.

마지막까지 진실을 향해 몸부림치던 강희철씨는 그때 막 태어난 아들을 보고 와서는 오히려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괴로움으로 무너졌습니다. 결국 수사관들이 쓰라고 하는대로 쓰게 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오재선] 소변 급하다고 하자 바지에 싸라며 히히덕
 

조작간첩 피해자 오재선씨 ⓒ 지금여기에


오재선씨는 어떻습니까? 해방 후 애월읍사무소에 근무했던 그의 아버지는 4.3 사건이 발생하면서 공직에 있다는 이유로 산사람들에게 늘 암살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결국 좌우익 사이에서 벌어지는 혼란 속에 죽음을 피하기 위해 1948년 일본으로 도피했습니다.

제주에 홀로 남아 어렵게 생활하던 오재선씨 역시 일본에 있는 아버지를 찾아 1957년 밀항을 선택했습니다. 일본에서 어렵게 생활하던 그는 외국인등록증을 갱신하지 못하고 결국 추방됐습니다.

일본에서 돌아온 후 일정한 직업 없이 고기잡이 어선에서 일하거나 목장에서 잡부로 일하던 중 1986년 4월 새벽에 사복경찰들에게 연행되었습니다. 그가 들어간 조사실은 군용 침대가 놓여있고 벽에는 모자와 경찰 곤봉이 걸려있는 경찰조사실이었습니다.

김대옥, 이태섭 수사관이 간첩을 했다는 내용으로 자백하라며 무릎 사이에 각목을 끼우고 밟고 차기 시작했습니다. 겁에 질려 소변이 급하다고 하자 바지에 싸라며 히히덕 거리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구속영장 없이 50여 일간 불법감금되어 고문을 받은 그는 붉은 간첩이 되어 있었습니다.

마치 다른 사람의 일인 양 말하던 양승태 
 

재판장 판사에 '양승태'라는 이름이 선명하다. ⓒ 지금여기에

 
결과적으로 당시 판사의 양심이든 판사의 업무 소홀이든 간에 멀쩡한 청년은 각각 징역 13년, 징역 7년의 감옥생활을 해야 했고, 출소 후 간첩 전과를 달고 살아야 했으며, 지금도 고문 후유증으로 일상생활이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도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사과 한 번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뭔가 틀리게 재판했거나 그런 사항이 없으리라고 생각은 안 합니다. 있지만 제가 지금 당장 기억하고 인식에 남아 있는 것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 2005년 대법관 후보자 국회청문회에서 한 발언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기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피해자는 있지만 사과해야 할 사람은 기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사과할 이유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치 다른 사람의 일인 양 제3자의 일인 양 이야기합니다.
 
"사과해야 될 그런 기회가 오면 얼마든지 표명할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구체적인 권리구제는 재심 절차나 이런 절차를 통해서 이루어질 것으로 생각됩니다."
- 2011년 대법원장 후보자 국회청문회

"양승태가 사과한다면 내 마음의 상처가 치유될 텐데"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사과해야 할 수 있는 수많은 시간과 기회가 있었는데도 현재까지 한 번도 사과한 적이 없습니다. 특히 강희철, 오재선씨 사건은 많은 언론 보도가 있었는데도 그 사건과 관련해 직접 선고를 했던 당사자로서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양승태씨가 그때 일을 나에게 사과하고 미안하다고 한다면 나야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지. 진정으로 자기 잘못을 뉘우친다고 하는데 그 사과를 안 받을 사람이 어딨어? 그런 사과야 어떤 값어치보다 더 값진 사과 아니겠어? 그런 사과가 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 주는 거고 망가진 삶을 위로해 주는 거라고 생각해."

강광보씨의 친구이자 강희철씨와 함께 양 전 대법원장에게 재판을 받은 오재선씨는 경찰 수사과정에서 구타와 고문을 당해 그 후유증으로 여전히 잘 듣지 못합니다. 2011년 대법원장 청문회에 나온 양승태를 보자 오재선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양반, 많이 출세 했네."

그 역시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사과하기를 바라지만 가능할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신들의 상처는 안고 가야 할 숙명 같은 것이라며 포기하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중에 친구 강광보씨로부터 자신들과 같은 조작간첩 피해자들의 기념관이 세워진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너무 좋았죠. 기념관이 지어진다니 뭐라도 돕고 싶었어요. 나 같은 피해자가 어디가서 마음 놓고 내 억울한 사연을 떠들 수 있는 곳이 있겠어요. 그런데 기념관 같은 곳이 생기면 걸을 수만 있으면 자주 가고 싶어요. 내 재심 재판이 무죄가 되고 나면 보상금이 나온다고 하니 좀 보태야 되겠네."

피해자들은 서로의 상처를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상처는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깊게 베여있습니다. 같은 날 같은 법정에서 같은 판사에게 선고를 받았던 두 사람은, 이제 같은 공간에서 서로 위로하고 기억할 것입니다. 국가가 하지 않는다면 시민이 스스로 그 일을 시작할 것입니다.

그 기억에 여러분들의 힘을 모아주시길 바랍니다.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