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28 08:32최종 업데이트 19.03.28 08:32

평양화단의 중심 김규진 <죽순> ⓒ 황정수


근대기 이후 한국 동양화단은 지역마다 각각의 특색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데에는 각 지역을 대표하는 뜻있는 화가들이 지역에 살며 제자들을 양성해 각 지역의 특색 있는 화풍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전국 8도 중에서 가장 특색이 강한 지역은 서울, 평양, 광주, 대구 등의 도시로 대표되는 네 지역이다. 이들 지역은 전통을 이어가며 서로 다른 각각의 화파를 형성하며 발전하였다.

서울은 장승업에서 안중식으로 이어지는 '도화서 화원의 화풍'이 이어지는 곳으로, 일제강점기에는 서화미술회를 중심으로 한국 화단의 중심을 이루었다. 평양은 장승업과 쌍벽을 이루었던 양기훈의 후예들이 중심이 되어 '평양화풍'을 이루었다. 김규진, 김윤보 등이 대표적인 작가이다. 평양 기생들의 사군자 그림도 꽤 유명세가 있었다.


전라남도 광주는 강력한 동양화 본산 중의 하나이다. 김정희 제자인 허련의 집안 후예들인 허백련과 허건이 화숙을 만들어 많은 제자들을 양성해 개성 있는 '남도화풍'을 이어나갔다. 대구 또한 미술의 도시라 할 수 있는데, 이곳은 서병오가 중심이 되어 문인화적 요소가 강한 '석재화풍'을 형성하였다. 서동균, 배효원 등이 그의 제자이다.

이들 지역은 주변 지역에까지 영향을 주어 전국의 미술문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이들에 비해 다른 도시나 지역들은 크게 미술이 발달하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몇몇 능력 있는 화가들은 미술의 불모지인 각 지역에서 고군분투하며 화가로 활동하였다. 함경도에는 지창한이 중심 화가로서 활동하였고, 황해도에는 개성의 황씨 4형제(황종하, 황성하, 황경하, 황용하)가 유명하였다.

경남 지역엔 배전과 배병민 부자가 있었으며, 강원도에는 박기정 정도가 중앙에 알려졌다. 또한 충청도는 미술 불모지 중의 한 곳으로 공주 지역에는 정술원, 정성원 등이 있었고, 대전에는 서화미술회 출신의 박승무가 있어 동양화의 명맥을 이어나갔다.

동양화단의 '10대가'와 '6대가'라는 용어
 

'산수화10대명가전'에 출품된 이한복의 작품 ⓒ 황정수

  
한국 동양화단에는 근대기부터 내려오는 '동양화 10대가'라는 말과 '동양화 6대가'라는 말이 있다. 이 용어는 미술 실력에 따른 구분이라기보다는 1940년 오봉빈이 운영하던 조선미술관이 개관 10주년을 기념하여 당대의 대표적인 화가 10명을 뽑아 '산수화10대명가전'이라 이름을 붙이면서 시작된 편의적 호칭이다.

그 10명은 김은호, 허백련, 이상범, 변관식, 노수현, 박승무, 이한복, 오일영, 이용우, 최우석 등이다. 대부분 서화미술회 출신 화가들이며, 여기에 당시 빼어난 활동을 펼치던 광주의 허백련을 추가한 정도였다. 이러한 작가 선발은 일면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지만, 화랑의 주관적 견해에 의한 것이므로 큰 의미를 부여하는 데에는 무리한 점도 있다.

'산수화10대명가전'은 반응이 좋아 대중들 사이에 '동양화 10대가'라는 명칭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럭저럭 30년의 세월이 흐르자 다시 화단에 1940년에 있었던 10대가전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래서 다시 그때의 10명 화가의 작품을 모아 다시 전시회를 열 생각을 하였다. 그래서 주최 측은 그때의 10명을 찾아보니 이미 네 명은 세상을 떠나고 여섯 명만 남아 있었다.

그래서 살아있는 김은호, 허백련, 이상범, 변관식, 노수현, 박승무 여섯 명의 그림만을 모아 전시한 것이 1971년 신문회관에서 있었던 '동양화 6대가전'이다. 이 전시 또한 장안의 화제가 되어 이때부터 이 여섯 명의 화가를 '한국 동양화 6대가'라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 '6대가'라는 말은 얼핏 굉장히 명예로운 호칭처럼 들리지만 예전 10대가와 마찬가지로 편의적인 호칭 부여였다. 그러니 사실 회화적 우수성을 기반에 두고 논할 때 사용할 수 있는 적합한 언어는 아니다.

박승무의 서울 생활과 중국 유랑
 

박승무. <100인선집 박승무편>(금성출판사, 1977)에 실린 사진을 촬영한 것. ⓒ 문선호

 
'동양화 10대가'와 '동양화 6대가'에 모두 포함된 박승무(朴勝武, 1893-1980)는 화가로서의 입지를 매우 잘 형성한 작가이다. 그는 충청북도 옥천 태생으로 1901년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현 옥천 죽향초등학교의 전신인 창명학교(彰明學校)에 들어가 공부를 한다. 창명학교를 졸업한 후에 서울에 사는 백부의 양자로 입적하여 경복궁 옆 효자동에 살게 된다. 서울에 올라온 그는 YMCA 문학부에 진학하여 일본어를 공부한 후 미국 유학을 할 생각으로 영어반에서 영어를 배우기도 한다.

그러나 미국 유학은 어렵게 되고, 그때 마침 조석진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우던 김창환(金彰煥)을 만나 그의 영향으로 묵화를 그리기 시작한다. 그림에 몰두하는 박승무를 보고 집안에서 처음에는 화가의 길로 가는 것을 반대하였으나, 그림에 소질이 있다는 것을 알고부터 크게 반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부친은 1913년 평소 친분이 있던 조석진과 안중식의 지도를 받도록 '서화미술회'에 입학시켜 주었다.

박승무는 서화미술회에서 주로 조석진으로부터 전통적인 화법을 익히기 시작한다. 물론 안중식에게 배우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주로 화조화는 안중식을 따르고, 산수화는 주로 조석진에게 배운다. 훗날 박승무가 산수화에 특출한 재능을 보이는 것도 모두 조석진의 영향이라 할 만하다. 그는 서화미술회에서 3년 과정을 수료한 뒤에도 계속 조석진의 문하에 남아 미술 공부를 한다.

또한 전문적인 화가로 활동하게 되면서 호를 사용하는데 처음에는 '소하(小霞)'라는 호를 쓰기 시작하다, 화가로서 입지를 굳힌 후에는 '심향(心香)' 또는 '심향(深香)'이라는 호를 사용한다. 그래서 그림 속에 사용한 호만 보아도 작품의 제작 시기를 대략 알 수 있다.

전문 화가로서 활동하게 되자 박승무는 자신이 추구하는 미술세계의 기반인 중국문화를 가까이 접하고 전통화법을 깊이 연구하기 위하여 1917년 중국 상해로 건너간다. 이곳에서 3년간 머물면서 중국의 전통적인 미술세계를 배운다. 한편으론 상해에 체류하면서 임시정부 사람들과 사귐으로써 일본 경찰로부터 따가운 눈총을 받기도 한다. 결국 일본 경찰과의 갈등으로 3년간의 상해 생활을 마치고 1919년 귀국길에 오른다. 귀국하여 한동안 고향인 충북 옥천에서 지낸다.

조선미술전람회 등 화가로서의 활동
 

박승무 <흐린 달밤>. 조선미전 도록 재촬영. ⓒ 황정수

 
1922년이 되어서야 서울로 올라와 제2회 서화협회전에 회원으로 참가하고, 1923년에는 조선총독부에서 주최한 제2회 조선미술전람회(아래 조선미전)에 <흐린 달밤>이라는 산수화를 출품하기도 한다. 그러나 작가로서 활발히 활동하게 될 쯤인 1923년, 상해에 있을때 임시정부 요인과 만났던 전력이 문제가 되어 일제의 압박이 들어온다. 그는 서울을 떠나 간도의 용정과 연길로 가서 한동안 머물며 한인학교에서 영어교사를 하기도 한다.

1925년 다시 간도에서 서울로 돌아와 그동안 중단하였던 그림을 다시 시작한다. 1926년에는 제5회 조선미전에 참가하여 산수화 <유곡(幽谷)의 가을>이라는 작품으로 입선한다. 이어 1927년부터 1931년까지 제6·7·8·9·10회 조선미전에 출품하여 입선하였으며, 1931년 제11회 서화협회전에도 출품한다. 이와 같이 박승무는 한동안 꾸준히 조선미전에 작품을 출품하였으나, 1932년부터는 전람회에 환멸을 느끼고 작품을 출품하지 않는다.

이때부터 박승무의 야인작가의 생활은 시작되었다. 1944년 서울을 떠나 가평의 송씨 댁에서 피신생활을 한다. 그렇게 정신적·육체적 고통 속에서 나날을 지내던 그는 1945년 신문기사를 통하여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해에 덕수궁 석조전에서 열린 '해방기념 문화축전 미술전'에 작품을 출품하였다. 광복 이후 중앙 화단에서 물러나 은둔적 생활을 즐기면서 작품 활동을 지속한다. 작품 활동이 많아지자 그는 서울 창덕궁 옆 원서동에 집을 마련하여 거주하기 시작한다.

박승무의 대전 정착

박승무는 서울에서 태어나 중국 여행을 거쳐 가평, 서울에서 주로 생활하였지만 훗날 충청지역 대전의 대표작가로 자리매김한다. 그래서 보통 박승무를 '대전 지역의 대표작가'라 하는데, 그가 대전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57년부터이다. 그는 6·25전쟁 동안 목포에서 피난 생활을 하는데 마침 목포에 갔다가 서울로 돌아오던 중 중간 기착지인 대전에 하차하면서 대전과의 인연이 시작된다.

당시에는 기차가 서울에 직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간 기착지였던 대전에서 짐을 부치고 다시 서울로 가게 되어 있었다. 여기에서 목포에서 친하게 지냈던 한일은행 지점장을 우연히 만난다. 그런데 갑작스레 지점장은 대전에 정착하기를 권유한다. 박승무는 마침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 있던 차에 큰 결심을 한다. 그래서 서울로 올라가는 것을 포기하고 대전에 정착하고자 마음을 먹는다.

그는 1958년 서울 원서동의 집을 처분하고, 대전에 집을 마련하여 제2의 고향으로 삼는다. 이때가 그의 나이 65세였다. 늦은 나이에 맞은 객지 생활이지만 야인 기질이 강했던 박승무에게 대전 생활은 그런대로 지낼 만 하였다. 박승무는 대전 대흥동을 생활 근거지로 하여 지내면서 충청 지역의 대표적인 화가로 말년을 보낸다. 말 그대로 충청화단의 어른이 되었다. 그러다 1980년 7월, 87세를 일기로 자택에서 세상을 떠난다.

비록 늦은 나이에 정착하였지만 22년이란 적지 않은 시간을 대전에서 생활하였으니 대전 지역 화가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는 대전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개인전을 여는 등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며 대전지역의 미술문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충청화단의 어른이었다.

박승무의 초기 작품 경향
 

박승무 <화조화>. <100인선집 박승무편>(금성출판사, 1977)에 실린 작품을 사진으로 촬영한 것. ⓒ 문선호

 
박승무의 초기 작업은 서화미술회에서 학습한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산수화, 화조화 등 각 분야의 그림에 모두 능했지만, 스승인 안중식과 조석진의 영향을 그대로 이어받은 그림을 그렸다. 화조화나 사군자 모두 스승들의 화풍을 그대로 답습하였으며, 산수화 또한 스승들의 그림과 별 차이가 없었다. 그는 품성이 단정하고 모범적인 성격이었다고 하는데, 그림 또한 스승들이 전해준 화풍에 몰입하여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박승무는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화가가 아니라 진득하게 노력하는 성격의 화가였다. 그래서 그의 화조화나 사군자는 장승업이나 안중식 등 타고난 재능을 가진 화가들의 그림과는 달리 예리하고 세련된 맛이 적고, 담담하게 자신의 마음을 담아내는 그림을 그렸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처음 보았을 때에 자극적인 매력이 느껴지지는 않으나, 오래 두고 보면 점차 정이 들어 친숙해지는 특징이 있다. 산수화에서 특히 그런 느낌이 강한데 이러한 화풍이 형성된 것은 재기 넘치는 안중식보다는 무디지만 진득한 조석진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박승무의 특장 설경산수
 

박승무 <설경산수>. <100인선집 박승무편>(금성출판사, 1977)에 실린 작품을 사진으로 촬영한 것. ⓒ 문선호

   
서화미술회 출신 화가들은 졸업 후 조선미술전람회 등을 통하여 당대의 대표적인 화가들로 성장한다. 그러면서 각각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형성하며 자신의 존재를 세워나간다. 박승무 또한 많은 고심을 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작품 내용이 그의 독특한 장기인 '눈 내린 풍경을 그린 산수화'이다. 이러한 그의 설경산수는 매우 인기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았다. 특히 1971년 6대가전 이후 이러한 경향이 매우 강해진다. 고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박승무의 그림 중에는 설경산수만을 찾았고, 그는 그에 맞추어 많은 산수화를 그렸다.

설경산수화에 고정된 박승무의 이러한 전형성은 생활인으로 살아가는 데에는 많은 경제적 보탬이 되었다. 그러나 화가로서는 오히려 독이 되고 말았다. 더 이상 새로운 작품을 모색하는 동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더욱이 대전이라는 지역에 묻혀 운둔하듯이 살아 중앙화단과의 교섭도 적어 화가로서 많은 자극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점차 그의 화풍은 설경산수에 매몰되어 더 이상의 발전을 가져오지 못했다. 겨우 지역의 대표화가로서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고, 간혹 중앙화단의 일에 관여하는 정도의 활동이 그의 활동의 중심이 되었다.

결국 '설경산수'라는 매너리즘에 빠진 그의 화풍은 더 이상의 새로운 모습을 창조하지 못하고 만다. 게다가 한 지역 화단의 어른으로서 살아온 그는 많은 제자를 양성하지도 못하여 제대로 자신의 화풍이 이어지지도 못한다. 여기에 자신의 그림 또한 정체되어 한국미술사에 큰 획을 긋지 못한 아쉬움을 남긴다.

그렇더라도 박승무는 근대기 한국 동양화단의 대표적인 화가일 뿐만 아니라 충청 지역 화단의 명맥을 이어온 화가로서의 역할이 적다곤 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박승무라는 화가에 대해 다시금 회고해 볼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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