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17 21:40최종 업데이트 19.03.19 10:00
33인 가운데 오화영은 매우 독특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목사 출신인 그는 일제 때 무려 세 차례나 감옥생활을 했다. 1919년 3.1독립선언서에 서명하여 구속된 이래 1929년 광주학생사건,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 등에도 연루돼 수감됐다. 이밖에도 그는 신간회, 물산장려회 등에서도 간부로 활동했으며, 해방 후에는 정계에 투신해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3.1혁명 참여 과정에서 박희도·정춘수 등과 밀접하게 교류하였으나 이들처럼 변절하지 않은 것도 특기할 만하다.

감리교 목사로 3.1선언 동참
 

오화영

 
오화영(吳華英)은 1879년 4월 5일 황해도 평산군 금암면 대촌리에서 오석조(吳錫祚)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본관은 고창(高敞), 호는 국사(菊史), 다른 이름으로는 화영(華泳), 하영(夏英)이 있다. 어려서는 고향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에 가담하여 활약하다가 만주로 망명하였다고 하나 구체적인 행적은 알 수 없다. 오재식의 책에 따르면, 1904~1908년 사이에 상업과 농업에 종사하였다고 하나 이 역시 자세한 내용은 알려진 것이 없다.

1906년 만주에서 돌아온 그는 미국 남(南)감리교의 기이남(奇二男, Rev W.G.cram)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개종 동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구국의 열정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1909년부터 남감리회 소속 전도사로서 그는 전도 활동을 시작하였다. 개성 서구역(1909~1911), 개성 북부교회(1911~1913) 전도사를 거쳐 1913년 9월 원산 상리교회로 자리를 옮겼다. 1914년 8월 23일 김영학·최태곤 등과 함께 앳킨스(Atkins) 감독에게 집사목사 안수를 받았다.


<감리교인물사전>에 따르면, 그는 원산 상리교회 전도사 시절 원산여(女)선교회 창립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최초의 원산여선교회는 앨리스콥 성경학원에서 발족되었는데 흔히 보혜(普惠)여자성경학원 혹은 원산여자성경학원으로 불렸다. 이 성경학원은 전도부인과 여성 지도자들을 많이 양성하였으며 이후 원산여선교회의 구심점이 되었다. 당시 원산여선교회의 사업을 주관하고 있던 노이즈( Noyes)는 아래와 같은 증언을 남긴 바 있다.

"이곳(원산) 상리교회 전도사 오화영의 제안에 따라 여성들이 스스로 회(band)를 하나 만들었는데 매달 봉급의 20분의 1을 내서 전도부인 1명을 보조할 계획입니다. 올해는 주님 사업에 있어 기쁨과 축복으로 가득 찬 해였습니다."

1917년 서울 도렴동 종교(宗橋)교회로 부임한 그는 이듬해 10월 장로목사 안수를 받았다. 1918년에는 감리교 목사들의 사관학교 격인 협성신학교를 졸업했다. 종교교회 담임목사 시절 그는 도도히 흐르는 3.1혁명의 역사적 물줄기와 만나게 된다.

3.1혁명 보름 전인 1919년 2월 16일, 정춘수가 그가 시무하고 있던 종교교회에서 설교를 하였다. 당시 원산에서 목사로 활동하던 정춘수는 오화영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됐다. 그날 밤 정춘수는 YMCA 간사로 있던 박희도에게서 들은 말이라며 귀가 번쩍 뜨일 만한 얘기를 들려주었다. 천도교 측에서 모종의 독립운동을 추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오화영 역시 신문을 통해 파리강화회의 소식과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대해 듣고서 조선독립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던 차였다. 한일병탄 후 '심한 고통과 불안감'을 갖고 있던 그로선 단비와도 같은 희소식이었다.

이튿날 두 사람은 사실 확인을 위해 박희도를 만났다. 박희도의 말은 전부 사실이었다. 3일 뒤인 2월 20일 밤, 오화영은 창신동 박희도 집에서 이승훈·신홍식·오기선·정춘수 등과 만나 천도교단과 연합하는 문제에 대해 논의하였다. 그리고는 자신은 개성 지역을 담당하기로 했다. 이 무렵 그는 신석구에게 동참을 권하였고, 27일 그로부터 최종적으로 약속을 받아냈다.

이튿날 21일에는 함태영·이승훈·현순·박희도·신홍식·오기선·안세환 등과 함께 이갑성의 집에 모여 천도교 측과의 연합 문제를 다시 논의하였으나 결론을 얻지는 못하였다. 이 자리에서 오화영은 개성을, 이갑성은 경상도를 맡기로 했다. 또 일본 정부 등에 제출할 청원서는 함태영이 책임지고 준비하고 현순은 상해로 가서 파리평화회의에 통지를 하기로 합의하였다.

22일, 그는 약속한 대로 개성으로 떠났다. 개성 남부예배당에서 김지환·오세진·이경중·최중순·이강래 등을 만나 서울의 거사 준비 소식을 알려주면서 동참을 호소했다. 23일에는 보통학교 교사 이만주와 미국인 교장 이영덕에게도 서울 소식을 전해주었다. 이날 그는 남성(南星)병원으로 친동생 오은영(吳殷英)을 만나러 갔다. 그리고는 그에게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나의 집을 돌봐 달라'고 부탁했다.

서울로 돌아온 그는 25일 박희도로부터 거사일이 3월 4일에서 1일로 변경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26일에는 함태영·이승훈·박희도·이갑성·이필주·안세환·최성모 등과 만나 일본에 보낼 기독교 대표로 안세환을 결정했다. 이날 이들은 한강 인도교에서 만났다가 주위 사람들이 많아서 인근 일식집으로 옮겨 얘기를 나누었다.

27일 이필주 집에 이승훈 등 10명이 모여 선언서와 청원서 초고를 살펴보았다. 거사 전날 28일 밤, 재동 손병희 집에 동지들이 모여 최종점검을 하였다. 이 자리에서 이갑성이 학생 등 많은 사람이 공원에 모이다 보면 소요가 발생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결국 거사장소를 탑동공원에서 명월관으로 변경하기로 했다.

3월 1일 오후 2시, 민족대표들은 예정대로 명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33인 가운데 참석자는 29명이었다. 선언식이 끝난 후 33인 일행은 총독부와 종로경찰서에 나온 관헌들에게 체포돼 남산 왜성대 경무총감부로 끌려갔다.

당일부터 경찰이 취조를 하였고 얼마 뒤부터 재판이 이어졌다. 3월 21일 서대문감옥에서 있은 검찰 취조 때 '이후에도 조선독립운동을 할 것이냐?'는 일본인 검사의 질문에 그는 '기회만 있다면 할 것이다'라고 단호하게 답했다.

재판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독립운동에 나서게 된 연유 등을 당당하게 밝혔다. '언제부터 독립운동을 하고 싶은 마음을 가졌느냐?'는 재판장의 질문에 그는 '남의 조선이 된 조선이 또 다시 나의 조선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벌써부터 갖고 있었다'고 답했다. (매일신보, 1920.7.16.)
 

오화영 심문기사(매일신보, 1920.9.25.) (매일신보)

 
3일 뒤 열린 재판에서는 허헌(許憲) 변호사의 문제제기로 '공소 불수리' 문제로 논란이 됐다. 그러자 오화영은 피고석에서 일어나 재판장을 향해 '지금까지 재판장이 심문하는 방법을 보건대 피고들에게 이 사건이 생긴 근본원인은 물어보지도 않고 재판장 생각에 피고들이 죄가 될 만한 점만 물어보고 정 물어볼 것은 물을 줄도 모른다'며 강하게 힐난했다. 그의 신문조사 가운데 일부를 발췌해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문: 그대는 선언서를 배포하였는데 어째서 그럴 일을 하게 되었는가?
답: 조선은 일본이 합병하였으므로 그것에 대하여 분개하고 있다가 대정8년(1919년) 2월 16·17일경 원산에서 온 야소교 목사 정춘수가 조선도 독립국이 될 수 있다고 하므로 그 일에 대하여 동의하고 있었다.
문: 그 선언서에 따라 조선을 독립하려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답: 합병한 지 10년이 지난 오늘날 생각해보면 이전보다 발전되었다고는 하지만 우리 민족은 도저히 일본사람과 동화할 수 없는 형편이고 또한 조선은 상당한 역사가 있으므로 독립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며 합병은 강제적으로 된 것이기 때문에 이제 독립을 위한 선언서를 작성하여 배포한 것이다.
문: 그대는 이 선언서 외에도 또 다른 서면을 작성한 일이 있는가?
답: 청원서가 있으나 최린이 관계하고 있으므로 상세한 것은 모르겠다.
문: 그대들은 독립을 시켜달라는 청원에 대하여 만일 이 일이 성립된다든지 안 된다든지 하면 어찌 할 것인가?
답: 불성립 될 경우에는 어떻게 하자는 것은 정하지 않았으나 된다고 하면 국민대회를 개최하여 모든 일을 결정할 것이다.
문: 그대가 야소교인이니까 외국 사람의 원조와 후원으로 이 일을 하려고 한 것이 아닌가?
답: 그런 것은 아니다.
(3월 1일, 경무총감부에서)

문: 피고는 이후에도 조선독립운동을 할 것인가?
답: 기회만 있다면 할 것이다.
(3월 21일, 서대문감옥에서)

문: 피고는 이 운동이 조선독립의 목적을 달(達)한 줄로 생각하는가?
답: 나는 한일합병의 취지가 조선이 독립될 때까지 합병하는 것이지 영구히 합병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이번 민족자결의 제창이 있자 조선독립을 일본이 허락할 줄로 알았다.
문: 민족자결은 전쟁(제1차 세계대전)에 관계없는 조선과 같은 지역에는 문제의 범위 밖인 줄 알지 못하는가?
답: 민족자결은 전 세계 민족에 대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일본이 (파리)강화회의 5대 강국의 하나로서 열국과 교섭하고 있으므로 민족자결이라는 문제가 제창되고 있는 이 때 일본이 조선을 독립시킴으로써 타국에 대하여 정의를 주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5월 1일, 경성지방법원 예심에서)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 판결에서 그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6개월을 선고받았다. 여느 독립운동가 집안도 다 마찬가지였겠지만 그가 수감된 뒤 집안 형편은 몹시 어려웠다. 33인 유족들의 생활상을 전한 동아일보 기사(1922.1.2.)에 따르면, 당시 집안은 개화학당 교사로 있던 장녀(응선)가 꾸려가고 있었다. 옥중의 그 역시 곤궁하였던 모양이다. 딸에게 보낸 편지에서 '1원만 더 차입해 달라'고 부탁했다.

세 차례나 옥고... 전향하지 않고 지조 지켜

1922년 5월 5일 그는 이갑성과 함께 만기출옥 했다. 이튿날 동아일보가 전한 그의 출옥소감은 이색적이다. 감옥에서 영적·사회적으로 한층 더 성숙해진 모습이다.

"내가 일찍이 교역자 생활을 여러 해 하였으나 이번 감옥생활을 하는 동안 같이 영적 감응(感應)을 얻은 일은 없었다. 밖에서는 우리 민족의 전도(前途)에 대해 매우 비관하였으나 감옥에 들어간 후에는 조선 사람도 앞으로는 살 수가 있다는 생각이 났다. 조선인에게 제일 급한 것은 교육이니 우리 모두 그 방면으로 힘을 써서 배우고자 하되 학교가 없는 현상을 구제해야 할 것이다."

출옥 후 그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곧장 수표교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한 그는 그 해 9월 다시 종교교회(宗橋敎會) 목사로 옮겼다. 1925년 9월에는 개성 북부교회로 옮겼다가 2년 뒤 1927년 9월에 다시 수표교 교회 목사로 부임했다. 이곳에서 1년간 목회활동을 한 후 그는 YMCA 종교부 간사가 되었다.

그 무렵 그의 대외활동도 매우 활발했다. 1926년 10월 말에 열린 조선민흥회(朝鮮民興會) 창립총회에 준비위원으로 참여하였다. 이듬해 2월 15일 개최된 신간회 창립대회에서는 간사 35명 중 1인으로 선출되었으며 이어 서무부장, 경성지회 검사위원에 선임되기도 했다. 또 1929년 6월에 창립된 기독신우회(信友會)의 평의원으로 참여해 기독교인들의 사회참여를 확대하는 일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1932년에는 조선물산장려회 고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29년 11월초 광주에서 일어난 한국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 간의 충돌은 급기야 광주지역 학생들의 대규모 반일시위로 이어졌다. 이른바 '광주학생독립만세사건'이다.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장 주요한, 의사 이용설, 목사 박연서 등과 자택에서 모여 사후대책을 강구하던 중에 체포돼 두 번째 옥고를 치렀다. 이 일로 그는 이듬해 9월 수표교 교회에서 사임하였다.

그러나 공백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1931년 다시 1년간 수표교 교회 목사로 파송되어 시무한 후 상동과 연화봉 교회로 각각 1년간 파송되어 담임목사로 일하였다. 그 후 1935년에 수표교 교회 담임목사로 다시 파송되었다가 1937년 중부연회에서 퇴회(退會)하여 수표교 교회 본처목사(本處牧師)가 되었다. 본처목사란 개신교의 감리교회에서 휴직 중에 있는 목사를 일컫는 말이다.

독립선언 건으로 감옥을 살고 나온 오화영이 종교교회 담임목사로 복귀해 근무하고 있던 시절의 일이다. 1925년 3월 22일, 그는 서울 사직동 신흥우(申興雨) 집에서 결성된 흥업구락부에 참여하였다. 실업단체로 위장한 흥업구락부는 1920~1930년대 기독교계의 민족운동단체였다. YMCA 총무 출신의 신흥우가 이상재·윤치호를 중심으로 YMCA·감리교 등 기독교계 인사들로 조직했다. 회원 가운데는 오화영처럼 신간회 결성에 참가하거나 비밀리에 미국의 이승만에게 자금을 보내기도 했다.

문제가 터진 것은 이로부터 12년 뒤였다. 이 단체가 미국의 이승만과 연결되어 있음을 포착한 있던 일제는 1937년 가을 신흥우·장덕수·유억겸 등 청구구락부 관계자들을 먼저 잡아들였다. 이어 이듬해 5월 흥업구락부 간부회원 60여 명을 대거 검거하였다. 이들 중 52명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실형을 선고받았다. 바로 이 사건에 오화영도 연루돼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신흥우 등 대다수는 전향서를 쓰고 풀려난 뒤 친일로 돌아섰으나 오화영은 끝까지 지조를 지켰다.

해방 후엔 정계 투신... 북한군 퇴각 때 납북

1945년 8.15 해방과 함께 그는 정치무대 전면에 나섰다. 그 시작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반들을 환영하기 위해 구성된 한국지사(志士)영접위원회 참여였다. 그는 허헌 등과 함께 위원으로 참여하였으며 임정세력을 적극 지지하였다. 이어 건국준비위원에 선출되었으며, 조선민족당을 결성해 당수로 추대되었다. 또 신탁통치를 둘러싼 논란의 와중에서 반탁운동에 앞장섰으며, 미군정의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원,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위원장, 독립전취(戰取)전국대회 회장 등을 맡아 신생조국 건설에 힘썼다.

해방 직후 남한의 정국은 극도로 혼란했다. 국내파·해외파로 나뉜 데다 초창기 미군정의 용인으로 좌파진영까지 합세해 대립과 갈등이 극에 달했다. 그는 한 일간지에 기고한 글에서 각 정파 간의 단결과 합심을 호소했다.

"(3.1혁명 때) 독립운동을 시작한 것은 지금의 각 당이 각각 독자(獨自)의 입장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것과 흡사하다. 그러나 통일단결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기독교에서 천도교로 혹은 불교에서 학생에게로 '우리는 죽음으로 독립을 찾기 위하여 운동을 합치자'고 대표를 보내면 즉시 서로 양해 성립되어 서로 부여잡고 얼싸안았다. 다같이 죽음으로 독립을 찾자는 생각에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랴마는 지금을 그때보다 결심의 도가 약하다 할 수 없다. 우리의 독립운동을 직접 총칼로 위협할 압력이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독립을 전취(戰取)키 위해서 죽음으로 단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서는 3.1 그때와 같은 충동과 결심은 우리 민족의 가슴에 다시 한 번 환기해야만 될 것이다." (자유신문, 1947.2.27.)
 

건국대 정치대학 설립 축하식에서 축사하는 오화영(오른쪽) ⓒ 건국대학교

 
1947년 12월 중간파 세력의 결집체인 민족자주연맹에 참여했다. 이듬해 4월에는 평양에서 열린 남북협상에 참여하기 위해 북행길에 올랐다. 그 해 건국대학교의 전신인 조선정치대학관을 세워 이사·관장을 지냈으며, 1949년에는 조선정치대학 학장이 되었다. 정치대학관의 초대 이사장은 3·1혁명 당시 민족대표 48인 중 한 사람이었던 강기덕이었다. 강기덕은 연희전문의 김원벽과 함께 학생들을 규합하여 후속 시위를 주동하다가 3월 5일 서울역 시위 때 체포돼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선거 때 오화영은 서울 종로구에서 당선되었다. 그러나 채 한 달도 안 돼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북한군 퇴각 때 납북되었다. 1956년 7월 2~3일 열린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결성대회에서 주석단의 1인으로 참석해 최고위원 3인 중 1인, 상무위원 11인 중 1인, 집행위원 29인 중 1인으로 선임되었다. 그 후 한동안 그의 생사를 알 수 없었다. 2002년 통일신보 보도에 따르면, 오화영은 1960년 9월 2일 사망해 평양 근교의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오화영 추모비(고양시 덕양구) ⓒ 고양시

 
한동안 그는 남한사회에서 금기의 인물로 치부돼 왔다. 독립유공자 포상 또한 대상에서 제외됐다. 그러다가 1987년 '6월 항쟁' 이후 민주화 분위기 속에서 월·납북 문학인들의 작품 해금과 함께 이들에 대한 재평가가 시작됐다. 그 일환으로 1988년 12월 국가보훈처는 월·납북된 독립유공자 26명에 대해 포상을 결정했다. 이듬해 3월 1일 정부는 조소앙·김규식·안재홍·유동열·윤기섭·조완구·최동오·엄항섭·백관수·박열 등에 대해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오화영은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받았다.

세브란스 간호부장 출신의 아내 함명숙(咸明淑·1973년 작고)은 생전에 그를 두고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에도 꺾이지 않는 의지의 사나이였다"고 추억했다.(경향신문, 1966.2.25.)

그러나 지금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서울 동작동 현충원에는 묘소 대신 위패가 봉안돼 있다. 감리교신학대는 1978년 그를 포함해 이 대학 출신 민족대표 6명의 흉상(부조)을 교내에 건립했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선유동 산자락에는 2014년 고창오씨 대종회에서 세운 추모비가 서 있다.


<참고문헌>
- 이병헌, <3.1운동비사(秘史)>, 시사신보사 출판국, 1959
- 오재식, <민족대표 33인전(傳)>, 동방문화사, 1959
-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오화영 편
-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1, 1990
- 기독교대한감리회 역사위원회, <한국감리교인물사전>, 기독교대한감리회, 2002
- 오화영, '3·1운동과 나 -부럽다 당시의 단결력, 각 당 각파가 혼연일치', <자유신문>, 1946.2.27
- 허동현, '3·1운동에 미친 민족대표의 역할 재조명 : 기독교계 대표 오화영과 유여대를 중심으로', <한국민족운동사연구> 46,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6
- 오순덕, '국사 오화영의 리더십 연구 : 3·1 독립운동과 광복 후 정치에서의 역할을 중심으로', 연세대학원 행정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1.8
(그밖에 매일신보, 동아일보, 자유신문, 경향신문, 통일신보 등 기사 참조)



3.1 혁명을 이끈 민족대표 33인

정운현 지음, 역사인(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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