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16 21:20최종 업데이트 19.03.16 21:21

33인 가운데 오세창만큼 다양한 이력을 가진 사람도 드물다. 구한국 정부의 관료 출신인 그는 <한성순보> 기자와 <만세보> <대한민보> 사장을 지낸 언론인 출신이기도 하다. 또 3.1혁명 준비과정에서 천도교 측 핵심인사로 참여한 독립운동가이지만 그보다는 서예가이자 금석학의 대가로 더 유명하다. 그밖에 천도교의 중진으로서 내부갈등 조정에도 큰 역할을 했으며, 해방 후에는 정치인으로도 활동했다.

역관 집안 출신... 금석학의 대가로도 유명
 

오세창

 
<만세보>는 광무 10년(1906)는 6월 17일자로 창간됐다. 천도교의 후원으로 창간됐는데 초대 사장은 오세창이 맡았다. 그는 창간 사설을 본인이 직접 썼는데 창간호 1면에 머리기사로 실렸다. 사설을 통해 그는 신문을 만드는 목적, 신문이 지향해야 할 바를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문명 개화론자였던 그는 신문을 통한 민중계몽을 추구했다. 창간 사설의 첫머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만세보(萬歲報)라 명칭한 신문은 하(何)를 위하야 작(作)함이요. 우리 한인민(韓人民)의 지식 계발키로 위하야 작(作)함이라. 오호라. 사회를 조직하야 국가를 형성함이 시대의 변천을 수(隨)하야 인민의 지식을 계발하야 야매(野昧)한 견문으로 문명에 진(進)케 하며 유치(幼稚)한 지각(知覺)으로 노성(老成)에 달(達)케 함은 신문 교육의 신성(神聖)함에 무과(無過)하다 위(謂)할지라. 시(是)로 이(以)하야 환구만방(環球萬邦)에 유통하는 근세 풍조가 인민의 지식 계발하기를 제일주의로 인정하야 신문사를 광설(廣設)하고 문단(文壇)에 우이(牛耳)를 집(執)하고..."


오세창의 개화사상은 집안내력과 무관치 않다. 그의 부친은 역관(譯官·통역)을 지낸 오경석(吳慶錫·1831~1879)이다. 오경석은 추사 김정희의 제자이자 같은 역관 출신인 이상적에게 한어(漢語·중국어)와 서화·금석학을 배웠으며 북학파 박제가의 실학을 공부했다. 업무 차 북경을 십여 차례 드나들면서 그는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고통 받는 청국을 보면서 조선의 자주적 개화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오경석은 유대치,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와 함께 '개화파의 비조(鼻祖)'로 불린다.

오세창은 1864년 7월 15일(음) 한성(漢城·서울)에서 오경석의 독자로 태어났다.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중명(重明), 호는 위창(葦滄)이다. 그의 집안은 8대가 역관을 지낸 전형적인 중인 계급이었다. 부친과 함께 개화파로 활동한 유대치를 스승으로 모시고 수학하였는데 16세(1879년) 때 역과(譯科)에 합격하였다. 이듬해 사역원에서 관료생활을 시작한 그는 1886년 박문국 주사로 차출돼 <한성순보> 기자로 활동하였다.

갑신정변 후 박문국이 폐지되자 오세창은 다시 역관으로 돌아갔다. 이듬해에는 청나라 사신을 맞았다. 1894년 갑오개혁 당시 유길준·김학우 등의 노력으로 군국기무처가 설치됐다. 오세창은 이곳에서 김홍집 총재의 비서 격인 낭청(郎廳)을 지냈다. 1895년 1월에는 정3품으로 승진하여 공무아문(工務衛門) 참의(參議)에 올랐다. 관제 개정 이후에는 농상공부 참서관(參書官)을 거쳐 다시 우정국(郵政國) 통신국장에 임명되었다. 당시 나이 30세, 직급은 주임관(奏任官) 3등이었다. (<고종실록> 33권, 1895.9.5.)
 

일본 망명 시절의 모습. 앞줄 오른쪽부터 오세창, 손병희, 권동진 (자료사진)

 
1897년 9월 일본 문부성의 초청으로 도쿄에 가서 도쿄 외국어학교 조선어과 교사로 1년 동안 근무하였다. 이때 일본서 근대문물을 접하고서 개화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후 귀국하여 국내에서 활동하던 그는 1902년 유길준이 '일심회'와 함께 모의했던 쿠데타, 소위 '개화당 사건'에 연루돼 1902년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곳에서 동학혁명의 주모자로 몰려 망명해 있던 천도교 제3대 교주 손병희와 만나게 됐다. 중인 출신인 두 사람은 금세 의기투합하였다.

거기서 만난 사람은 손병희뿐만이 아니었다. 구한국 정부의 무관 출신의 권동진(權東鎭)과 관료 출신의 양한묵(梁漢默)도 만나게 됐다. 이들은 일본 망명 시절 손병희를 좌장으로 모시며 평생 동지로 결의하였다. (나중에 이들은 천도교 측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하였는데 바로 이때의 인연에서 비롯됐다) 이들은 구본신참(舊本新參), 즉 옛것을 근본으로 하여 서양문명을 절충한다는 대한제국 정부에 맞서 서구의 근대화를 모델로 한 문명 개화론을 주장하고 나섰다.

상소를 통한 개혁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손병희는 방향을 바꾸어 행동에 나섰다. 그는 동학 지도자 40여 명을 비밀리에 일본으로 불러들였다. 그들에게 동학교도들을 규합하여 민회(民會)를 조직할 것을 지시했다. 민회는 처음에는 대동회라고 했다가 중립회(中立會)로 바꾸고 나중에는 다시 진보회(進步會)로 개칭했다. 이 무렵인 1904년 오세창은 도쿄에서 손병희·양한묵 등의 권고로 동학에 입교했다. '사람의 마음은 곧 하늘이다'라는 교리를 믿고 입교했다고 한다.

한편 진보회는 1904년 말 송병준의 일진회(一進會)와 통합하였다. 그런데 이 일진회가 1905년 11월 4일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위임하라는 내용의 선언서를 전격 발표했다. 그로부터 13일 뒤에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었다. 이용구의 매국행위로 동학교도들의 반발이 나오자 손병희는 그해 12월 1일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했다.

국내사정이 급변하자 손병희는 귀국을 서둘렀다. 도일한 지 만 4년만인 1906년 1월 5일 귀국한 손병희는 먼저 교단을 정비하였다. 그해 9월에는 이용구와 그 휘하의 62명을 출교(黜敎) 조치를 취하고는 교인들에게 일진회에서 탈퇴하라고 지시했다.

손병희 등과 함께 귀국한 오세창은 1906년 2월 10일 천도교 교수(敎授)로 임명됐다. 이후 중앙총부 이문관장(理文觀長), 현기관장(玄機觀長) 등을 맡아 천도교의 조직과 제도 및 교리 근대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귀국 후 그가 맡은 중책은 또 있다. <한성순보> 기자 경력을 살려 그해 6월 천도교 기관지 <만세보(萬歲報)>를 창간했다. 신문을 통해 대중을 계몽하고 정부의 개혁정책을 견인할 생각이었다. 주필은 이인직(李人稙)이 맡았는데 그는 <만세보>에 최초의 신소설 '혈의 루'를 연재하였다.

당시 애국계몽운동에 주력했던 오세창은 1907년 11월 대한자강회 출신 인사들과 함께 대한협회를 창립해 부회장에 추대되었다. <만세보>가 창간 1년 만에 문을 닫게 되자 대한협회 기관지로 <대한민보>를 창간해 다시 사장을 맡았다. 이밖에도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 평의원, 재일유학생 단체인 대한학회 후원단체인 대한학회 찬성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하는 등 각종 계몽단체에서 활동하였다. 당시 그는 선진 일본과 동맹을 맺어 문명개화를 주장했을 뿐 이용구와 같은 합병론자는 아니었다.

1910년 한일병탄으로 나라가 망하자 그는 칩거하였다. 그가 사장으로 있던 <대한민보>마저 문을 닫게 되었다. 그는 모든 사회활동을 중단하였다. 이 시기에 그가 관심을 두었던 곳은 서화계 하나뿐이었다. 김가진, 안중식, 이도영 등과 함께 오늘날의 화랑 격인 서화포(書畵鋪) 개설에 참여하였으며, 1911년 서화미술회가 개설되자 회원으로 참여하였다. 1918년 6월에 서화협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19년 11월, 4년여에 걸친 제1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렸다. 전쟁이 끝나자 전후처리를 위해 이듬해 1월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렸다. 미국의 윌슨 대통령을 비롯해 연합국 측 27개국 대표가 모였다. 골자는 독일 등 패전국의 전쟁 책임과 영토 조정, 평화유지를 위한 조치 등이었다.

윌슨 대통령은 전쟁 중인 1918년 1월 '세계평화 수립의 원칙' 14개 조항을 발표했다. 그 가운데서도 소위 '민족자결주의'는 전 세계 약소국들로부터 큰 관심을 끌었다. 일본 망명 시절에 일본어를 익힌 오세창은 귀국 후에도 <대판매일신문(大阪每日新聞)>과 <대판조일신문(大阪朝日新聞)>을 구독했다. 신문을 통해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한 사실을 접한 그는 조선인들도 민족자결 의사를 밝힐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계기는 일제의 차별정책 때문이었다.

오세창의 처음 생각은 독립선언 형태는 아니었다. 차별대우로 인한 불평에서 기인한 것이다 보니 처음에는 아주 소극적이었다. 심지어 그는 한일병합도 반대하지 않았다. 만약 일제가 조선인에게 좀 더 자유를 주고 평등한 대우를 해준다면 총독정치도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 당시 오세창의 생각이었다. 3.1독립선언으로 구속된 후 그해 4월 19일 경성지방법원 예심공판 때 그는 그런 진술을 했다.

오세창은 또 재판장이 '왜 조선의 독립운동을 하려고 했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그것은 민족자결에서 나온 것이다'라고 답했다. '앞으로도 조선 독립운동을 그만두지 않을 생각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나는 선언서에 이름을 냈으므로 독립운동을 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최초부터 성공할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역사에 그것을 남기고 조선민족을 위하여 기염을 토한 것에 지나지 않으며, 금후 그런 운동을 한다 하더라도 도저히 성공할 수는 없을 것이다.'라고 장황하게 답했다.

위 내용에서 보다시피 당시의 오세창한테서 결연한 독립의지를 찾기는 어렵다. 오히려 앞으로도 독립운동은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비관론을 펴고 있다. 그의 이런 생각은 출발이 좀 달랐기 때문이다. 1918년 12월말 오세창은 조선의 민족자결을 실현하는 방안으로 우선 조선의 자치(自治)를 제창할 생각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자치란 일제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이 아니라 '자율적 행정' 같은 것을 말한다. 그는 일본으로 가서 일본정부에 행정자치 청원운동을 할 생각도 갖고 있었다.

천도교 인사로 3.1선언 실무에 두루 관여

그런데 이듬해 1919년 초부터 생각이 조금 바뀌기 시작했다. 중국 상해 등 재외 한국인들이 파리강화회의에 대표자를 보내 독립의지를 밝히기로 한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게다가 최린을 통해 재일유학생 송계백(宋繼白)이 2·8독립선언을 준비 중이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 그 무렵 송계백은 선언서를 찍을 인쇄기 구입 및 독립운동 자금마련을 위해 비밀리에 입국해 있었다. 급기야 오세창은 손병희·권동진·최린과 협의하여 자치권 청원 대신 독립청원 방식을 추진키로 했다.

그런데 뜻밖에 변수가 하나 생겨났다. 1월 중순경 손병희는 박영효를 방문하여 조선총독부에 제출할 국민대회 청원서에 협조를 부탁했다. 그런데 결과는 보기 좋게 거절당하고 말았다. 박영효는 총독부가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이 일로 천도교 지도부는 독립청원 방식이 비현실적이라고 판단했다. 그 와중에 오세창은 2월 25일경 당시 인천에서 발행되던 <조선신문>에 실린 '피비와 같이(血雨)'라는 기사를 보고 2.8독립선언 소식을 알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 손병희는 독립선언을 발표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냈다.

2월 25일 오세창은 손병희·권동진과 함께 천도교 기도회 종료보고와 고종 국장에 참배할 목적으로 상경한 천도교도 박준승·홍기조·홍병기·김완규 등에게 독립운동에 관한 계획을 알리고 이들을 설득하여 찬동을 얻어냈다.

천도교 밖의 동지를 규합하는 일은 최린이 맡았다. 최린은 우선 한용운을 만나 자초지종을 설명한 후 불교계의 참여를 이끌어냈다. 그 다음엔 당시 기독교계에서 신망이 높던 이승훈을 통해 기독교계도 동참시켰다. 2월 20일 오세창은 권동진의 집에 모여 최린·이승훈 등과 민족대표로 천도교 15인, 기독교 15인, 불교 2인 총 32인으로 하자고 결정하였다. (2월 27일 밤 신석구 목사가 참여해 총 33명이 됨)

오세창은 거사 기획에서부터 실무 전반에 이르기까지 두루 참여하였다. 권동진으로부터 선언서 원고를 받아 베끼기도 하고 이종일에게 서명자 변동 상황을 알려줘 바로잡기도 하였다. 2월 27일에는 천도교 지도자들과 함께 재동(齋洞) 김상규 집에 모여 독립선언서 등 최종 확인 작업을 하였다. 이밖에도 그는 독립선언서 인쇄용지 보급 등 인쇄 작업을 지원하기도 했다.

3월 1일 오후 2시, 예정대로 민족대표들이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가졌다. 한용운의 인사말에 이어 만세삼창이 끝날 무렵 일제 관헌들이 들이닥쳤다. 선언식 참석자 29명 전원은 현장에서 체포돼 남산 경무총감부로 연행됐다. 당초 거사장소로 삼았던 탑골공원에서는 학생과 시민들이 모여서 별도의 독립선언식을 가졌다.
 

오세창 심문기사(매일신보, 1920.9.22.) (매일신보)

 
일경의 취조는 연행 당일 경무총감부에서부터 시작됐다. 13일 뒤 서대문감옥으로 이감됐는데 결국은 '내란죄'로 기소돼 재판에 넘겨졌다. 그해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은 오세창은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그러나 이듬해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은 최종판결을 내리면서 원판결을 취소하였다. 대신 그에게 손병희·이승훈·최린 등과 같은 징역 3년을 선고하였다. 1919년 4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신문내용 가운데 일부를 발췌해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문: 그것(민족자결)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품고 있었는가.
답: 미국 대통령이 제창하고 있는 것은 입만으로 하는 것이고, 강화회의에서 조선을 독립시켜 줄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문: 민족자결이란 것은 병합 또는 정복된 전 세계의 모든 나라를 포괄하는 것으로 생각했는가, 또는 직접 전란에 관계가 있는 나라에 국한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했는가.
답: 그것은 전란에 관계된 나라에 대해서는 실행되고, 그 밖의 나라에 대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문: 그런데 손병희의 집에서 회합한 뒤, 조선에서 민족자결의 취지에 의하여 독립선언을 발표하고, 운동을 하게 된 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
답: 그것은 세상의 풍조를 생각하고, 다른 사람이 주창하므로 가담했는데, 하나는 전 세계의 사람이 민족자결로 소요하고 있는데 홀로 조선만이 침묵하고 있기보다, 실행은 되지 않더라도 역사에 남기기 위하여 조선인도 민족자결의 의사가 있다는 것을 발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문: 그러면 피고는 이 시기에 조선의 독립을 바라고 있는가.
답: 그렇다. 될 수만 있다면 독립하고 싶었던 것이다.
문: 일한병합에 대해서 피고는 반대하고 있는 것인가.
답: 일한병합 당시에는 조선민족이 일본민족과 나란히 까지는 않더라도 가깝게 서 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병합 후 10년간의 상황을 보면 조선민족은 점점 뒤떨어져가므로 독립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병합 당시에는 반대는 아니었다.
문: 병합 후 조선은 교육이 보급되고, 산업이 일어나 크게 진보했다고 생각되는데 어떤가.
답: 그 점은 인정하지만, 일본민족과 조선민족은 평등해야 하는데 평등하지 못하므로 그것이 불복이다.
문: 그러면 피고는 총독정치에 반대하고 있는 것인가.
답: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조선인에게 좀 더 자유를 주고, 평등한 대우를 해주면 좋겠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
문: 어떤 점이 부자유이고, 불평등인가.
답: 교육 정도가 뒤떨어져 있고, 출판, 언론, 집회 등의 자유를 얻지 못하고 있다.
문: 그러면 그것의 개선을 요구하면 족할 것이고, 독립선언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어떤가.
답: 내가 독립선언에 참여하게 된 것은 방금 말한 바와 같은 사정인데, 다만 총독부에 개선을 구하는 것만으로는 요구가 허용될 것 같지 않고, 독립선언을 하면 자연히 요구를 들어 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세창을 비롯해 권동진 등 17명은 독방을 썼다. 33인 대다수는 종교인이어서 신앙생활과 독서로 시간을 보냈다. 수감자들은 감옥에서 노역에 동원됐다. 매일신보 기사(1920.11.14.)에 따르면, 오세창은 이승훈·권동진 등과 함께 그물 짜는 일을 했다. 반면에 한용운·최린·최남선 등은 모자 만드는 일을 했다. 다들 평소 해보지 않은 일이어서 손에 익숙지 않았다. 식사는 검은 콩밥에 멸치와 감자를 넣은 국이 전부였다. 소위 '5등식(五等食)'이었다.

아내 박명화(朴明華·1976년 작고)의 옥바라지는 눈물겨웠다. 그가 옥고를 치른 3년 동안 매년 여름마다 아들 4형제를 데리고 서대문감옥 입구에 천막을 치고 지냈다. 담배를 좋아했던 남편을 위해 꽁초를 말아 밥 속에 넣어 전해주기도 했다. 해방 이듬해 8월 15일에 미군정 하지 중장이 일본에 빼앗겼던 구한국 정부의 옥새를 찾아서 돌려주었다. 그때 오세창이 국민대표로 이를 인수하였다. 이를 두고 박명화는 생전에 "생애 최고의 감격스러운 일"이었다고 회고했다.(경향신문, 1966.2.25.)

오세창은 해방 후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3.1혁명을 배경을 세 가지로 설명했다. 우선 원인은 천도교에서 국치의 울분을 폭발시켜 민족의 위대한 힘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며, 근인(近因)은 1차 세계대전 종식 후 '민족자결' 사조(思潮)에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끝으로 직접적인 동기는 도쿄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이라고 했다. 3.1거사를 맨 처음 발기한 사람은 오세창, 권동진, 최린 세 사람이었다.

오세창은 1921년 12월 22일 경성감옥에서 가출옥했다. 이때 같이 출옥한 사람은 최린·권동진·이종일·한용운·김창준·함태영 등 총 7명이었다. 출옥 후 그는 정치적 발언은 극도로 자제하였다. 대신 서예활동과 고서화 수집에 정신을 쏟았다.
 

오세창이 쓴 봉황각 현판

 
당시 돈의동에 있던 그의 집은 골동품과 황성신문 등 고신문으로 넘쳐났다. 그는 명필로 불렸는데 특히 전서(篆書)를 잘 썼다. 3.1혁명 1년 전인 1918년 6월에 조직된 서화협회 조직에 발기인으로도 참여하였다. 이밖에도 그는 창덕궁 비원(秘苑) 중수공사에도 참여하였다. 당시 그는 서예는 물론 주택설계, 감리 등 만능예술가로 불렸다고 한다.

1922년 6월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가 열렸다. 오세창은 서화협회의 권고로 작품을 출품했다. 그는 전서 부문에서 1등 없는 2등을 수상했다. 당시 사이토 총독이 전람회 구경을 왔다가 그의 작품을 보고 감탄하기도 했다.(매일신보, 1922.6.1.) 그의 서예솜씨와 골동품 사랑은 부친으로부터 피를 물려받았다. 부친 오경석은 무역을 통해 번 돈을 전부 골동과 서화 구입에 쏟았다고 한다. 오세창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 전통문화의 정수가 헐값에 일본으로 팔려 나가는 것을 막고자 했다.

오세창은 골동 서화 수집에만 그치지 않았다. 작품들을 작가별로 분류하여 학문적으로 정리하였다. 1928년에 출간한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이 그것인데 이는 국내 최초의 고서화 인명사전으로 불린다. ('근역(槿域)'은 무궁화 꽃이 피는 지역, 즉 조선을 말하며, '징(徵)' 은 모은다는 뜻임) 최남선은 <동아일보>에 쓴 서평에서 "암해(闇海)의 두광(斗光)", 즉 '어두운 바다의 북극성'이라고 극찬했다. 이 책에는 신라시대의 솔거에서부터 책 출간 직전에 세상을 떠난 정대유까지 화가 392명, 서가 576명, 서화가 149명의 작품과 생애에 관한 원문과 그 출전이 수록돼 있다.

이밖에도 그는 우리나라 명필 1,100명의 작품을 모은 <근역서휘(槿域書彙)>와 명화 251점을 모은 <근역화휘(槿域畵彙)>, 그리고 우리나라 문인·화가 830여 명의 성명·자호(字號)·별호 등을 새긴 인장의 인영(印影) 3,930여 점을 묶어 <근역인수(槿域印藪)>(전6권)을 펴냈다. 이만하면 그를 가히 근대 금석·박물학의 최고봉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후학들은 그런 그를 잊지 않았다. 1995년 8월 '오세창 서예기념비'를, 이듬해 3월에는 예술의전당 서예관에서 '오세창 특별전'을 개최했다.

권동진과 함께 끝까지 반일... 해방 후엔 서울신문 사장도

한편 1920년대 들어 천도교는 보-혁 간에 노선투쟁이 치열했다. 보수파는 손병희의 사위 정광조를 중심으로 하였고, 혁신파는 동학 2대 교주 최시형의 아들인 최동희가 주축이었다. 오세창은 권동진·최린과 함께 중재에 나섰다가 이내 보수파에 가담하였다. 혁신파의 사회주의적 경향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1922년 5월 19일 교주 손병희가 사망하자 천도교는 위기감에 사로잡혔다. 보수파 지도자들은 교주제가 아닌 종리사(宗理師) 합의제의 집단지도체제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오세창 등 보수파는 종리사 선거에서 전원 당선돼 교권을 장악하였다. 그러자 혁신파는 교단을 이탈했다. 사태가 수습되자 이번에는 신·구파로 분열해 새로 갈등이 생겨났다. 신파는 최린·정광조를 우두머리로 하였고, 구파는 오세창·권동진·이종린 등이 주도하였다. 이들 가운데 오세창과 권동진을 빼고는 모두 친일로 돌아섰다.

8.15 해방 당시 오세창은 82세의 고령이었다. 그 또래 가운데 끝까지 지조를 지킨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좌우 정치세력 모두에서 그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오세창은 해방 직후 제일 먼저 결성된 건국준비위원회 위원과 인민공화국의 고문으로 추대됐다.

그러나 그의 지향점은 달랐다. 그는 김성수 등이 주도하는 한국민주당에 가담하였으며, 임시정부 및 연합군 환영준비회 위원으로 활약했다. 또 권동진과 함께 천도교 주도의 정치세력화를 꿈꾸며 신한민족당을 결성하여 부당수를 맡기도 했다.

1948년 정부 수립 후 그는 부통령 후보로 거론됐으나 고사하였다. 그는 자리 욕심을 내지 않았다. 해방 후 각종 국민대회에서 개회사나 축사를 하거나 김구·나인협 등 동지들의 장례위원장이 고작이었다.

<서울신문> 사장을 맡은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해방 후 잠시 정간을 당하였다. 그러다가 1945년 11월 22일부로 제호를 <서울신문>으로 바꿔 속간되었다. 초대 사장에 오세창이 추대되었는데 체제가 잡히자 19일 만에 명예사장으로 물러났다.
 

오세창 묘소(서울 망우리) ⓒ 오마이뉴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대구로 피난을 갔다. 고령에다 병을 얻어 1953년 4월 16일 피난지에서 90세로 별세했다.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는데 국회의원들은 세비의 1할을 갹출하여 조의금으로 전달했다. (국회 본회의 제59차 회의록, 1953.4.21)

정부는 1962년 고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이 추서하였다. 그의 묘소는 서울 망우동 공동묘지에 있다. 인근에 만해 한용운과 의암 손병희의 사위 방정환(方定煥)의 묘소가 있다.


<참고문헌>
- 이병헌, <3.1운동비사(秘史)>, 시사신보사 출판국, 1959
- 오재식, <민족대표 33인전(傳)>, 동방문화사, 1959
-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1, 1990
- 국가보훈처, '이달의 독립운동가-오세창 편', 2004.3
- 이승연, <위창 오세창>, 이화문화사, 2000
- 예술의전당, <위창 오세창-한국서예사특별전 20>, 2001
- 조규태, '3·1독립운동과 천도교계의 민족대표-오세창과 나인협을 중심으로', 민족대표 33인 제3차 학술회의, 33인유족회, 2005.2.28
- 허경진, <조선의 중인들>, RHK 두앤비컨텐츠, 2015
- 김삼웅, <의암 손병희 평전>, 채륜, 2017
(그밖에 만세보, 매일신보, 동아일보, 경향신문, 중앙신문 등의 기사와 고종 실록, 국회 회의록 등 참조)



3.1 혁명을 이끈 민족대표 33인

정운현 지음, 역사인(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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