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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3.15 09:51 수정 2019.03.15 09:51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는 33인이다. 최린은 이 숫자 '33'을 두고 자서전에서 "1은 2를 낳고 2는 4를 낳지만 3은 무한을 낳는다는 말이 있다. 그런 3이 둘이나 있으니 민족대표 33인은 우리 민족사에 담긴 무한한 정신유산을 계승하였고 민족의 미래에 대해서도 무한한 가능성과 희망을 던져주었다고 할 수 있다"고 썼다.

그런데 3월 1일 선언서 발표 이틀 전까지만 해도 민족대표는 '32인'이었다. 2월 27일 밤 신석구가 합류하면서 비로소 '33인'이 됐다. 그는 비록 뒤늦게 참여했지만 열정과 강도는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기독교 구국론에 감화돼 신앙 생활

 

신석구

 신석구(申錫九)는 1875년 5월 3일 충북 청원군 미원면 금관리 초개동에서 신재기(申在綺)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평산(平山), 호는 은재(殷哉) 또는 춘정(春汀)이다. 7세 때 어머니를, 15세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어린 시절을 불우하게 보낸 그는 13세 때 비로소 소학 책을 손에 쥐었다. 그의 자서전에 따르면, 그는 소학이 참사람을 만들어 주는 책이라고 여겨 겨울 석 달 동안 무릎을 꿇고 앉아서 읽었다고 한다.

25세 때 그는 어느 고을 군수의 요청으로 군수 아들 가정교사 노릇을 하게 됐다. 그러나 10개월 만에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 실상을 목격하고 더 머물다가는 자신도 타락할 것을 우려한 때문이었다. 엄격한 유교 가풍에서 자란 그는 20대 초반에 한때 방랑하며 '타락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근본은 수신제가에 뿌리를 두고서 양심적인 면모를 갖고 있었다.

27세 되던 해 친구 김진우(金鎭宇)의 전당포에서 서기로 일하게 됐다. 그런데 5년 뒤 전당포는 망하고 김준우는 사기 횡령죄로 감옥에 갈 판이었다. 그러자 노모를 봉양하고 있던 친구를 대신해 감옥행을 자처했다. 병을 핑계로 옥살이 3개월 만에 풀려난 그는 거짓으로 사망신고를 한 후 피신하였다. 당시 그에게는 23세 때 결혼한 아내와 아들(태화)이 하나 있었다.

이듬해 1907년 초 그는 시골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한 친구의 소개로 도사(都事) 윤자정의 아들을 가르치며 지내던 중 친구 김진우를 다시 만나게 됐다. 김진우의 제안으로 두 사람은 경기도 장단군 장남면 고랑포로 가서 집 한 채를 빌려 약국을 열었다. 이때 이미 기독교 신자였던 김진우는 그에게 입교를 강권하였다. 김진우는 고랑포 교회에 같이 나갈 것을 수차례 권하였다. 그러나 그는 한사코 거절하였다. 권하면 권할수록 오히려 기독교에 거부감이 생겨났다. 오랫동안 유교를 신봉하면서 다른 종교는 이단시해온 때문이었다.

완강히 버티던 그도 3개월이 지나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그때가 1907년 7월 14일이었다. 그가 예수를 믿게 된 동기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유교에 대한 불신과 실망감의 표출이었다. 바로 위의 형이 30세에 죽는 걸 보고 유교에서 말하는 복선화악(福善禍惡), 즉 선하게 살면 복을 받고 악행을 저지르면 화를 입는다는 말 따위는 믿지 않게 되었다. 반면 사람을 사람 되게 이끈다는 기독교 교리에 매료되었다. 둘째는 소위 '기독교 구국론'이다. 그는 기독교를 믿으면 나라가 부강해지고 국민들도 잘살게 된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의 눈에 세계의 문명국은 전부 예수를 믿는 나라로 보였다.

1908년 3월 신석구는 개성 남부교회에서 미국인 선교사 왕영덕(王永德·왓슨)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해 4월 서울 협성신학교(감리교 신학대학교 전신)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목회자의 길로 들어섰다. 이듬해 2월 개성 북부교회의 책임을 맡은 이후 감리교 강원도 홍천·가평구역장으로 활동하였다. 1915년 10월부터 3년간은 춘천지방에서 부흥 사업에 종사하면서 국민계몽활동을 하기도 했다. 기독교 교리를 전파하는 것이 국권회복운동의 한 방편이라고 여겼던 그는 근 10년간 전도 사업에 매진하였다.

새벽기도 후 '음성' 듣고 결단... 마지막으로 33인 합류

1917년 9월 그는 남감리회 연회(年會)에서 집사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듬해 1918년 11월에는 서울 수표교 교회 담임목사로 파송돼 서울로 올라오게 됐다. 당시는 제1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리고 윌슨 미국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가 민족진영에서 화두로 떠오르던 때였다. 이미 상해 등 재외 한인단체에서는 모종의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었다. 파리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는 문제를 논의하거나 어떤 단체에서는 독립선언서 발표를 준비하기도 하였다.

1919년 2월 19·20일경 신석구는 서대문 안 피어선 성경학원(이후 피어선신학교를 거쳐 현 평택대학교)에서 같은 감리교 목사 오화영을 만났다. 오화영은 기독교계에서 독립운동을 추진하고 있다면서 그에게 참여할 뜻이 있느냐고 물었다. 신석구는 즉답을 하지 않는 대신 며칠 생각해보겠노라고 했다.

그에게는 두 가지 고민이 있었다. 하나는 교역자로서 정치운동에 참가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을지, 다른 하나는 천도교 교리 상으로 볼 때 같이 하기가 어려운데 그들과 합작하는 것이 이 또한 하나님의 뜻에 맞는지가 의문이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정도 지난 2월 27일 승동(承洞) 예배당에서 오화영을 다시 만났다. 오화영은 그에게 지난번에 나눈 얘기를 잘 생각해 봤느냐고 물었다. 그제야 그는 그 일에 찬성한다며 동참하겠다고 말했다. 신석구가 이런 결론을 내린 데는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 오화영을 처음 만나고 돌아온 후 그는 새벽마다 기도를 올렸다. 그러던 중 2월 27일 새벽에 다음과 같은 '음성'이 들렸다고 한다.

"4천 년 전(傳)하여 내려오던 강토를 네 대(代)에 와서 잃어버린 것이 죄인데 찾을 기회에 찾아보려고 힘쓰지 아니하면 더욱 죄가 아니냐."

그는 이 음성을 듣고 곧바로 결정을 내렸다고 자서전에 썼다. 그날 정오 무렵 그는 오화영을 따라 정동교회 내에 있던 이필주 목사의 집으로 갔다. 기독교 대표자들이 그곳에서 회합을 갖기로 돼 있었다. 이날 모임에는 이승훈의 주도로 ·이갑성·함태영·박희도·최성모·김창준·오화영·박동완·신석구 등 10명이 참석하였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신석구는 가장 마지막으로 대열에 합류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민족대표는 32인이었는데 그의 합류로 인해 '33인'이 되었다.

 

태화관

 
이날 모임의 목적은 함태영이 가지고 온 '독립선언서' 초안과 일본정부와 조선총독부에 보낼 '독립청원서' 초안을 심의하는 일이었다. 참석자들은 이 초안에 서명한 후 완성본이 나오면 서명하도록 함태영에게 인장을 맡겼다. 거사 전날인 28일 밤에는 가회동 손병희 집에서 기독교·천도교·불교 대표자회의 겸 최종점검회의가 열렸다. 신석구도 참석하였다. 이날 모임에서는 거사장소를 당초의 탑동공원에서 명월관 지점(태화관)으로 변경하였다. 시위군중과 일경 간의 충돌사태를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3월 1일 오후 2시, 민족대표들이 태화관에 모였다. 33인 가운데 참석자는 총 29명이었다. 이들은 예정대로 독립선언식을 마친 후 전원 남산 왜성대 경무총감부로 연행되었다. 연행 당일 경무총감부에서부터 취조가 시작되었다. 구류 13일 만에 33인 일행은 서대문감옥으로 이감되었다. 그를 비롯해 17명은 독방에 수감되었다. 그는 검사의 신문에 당당하게 조선독립의 의지를 피력하였다.

 

신석구 심문기사(매일신보, 1920.9.25.)

 
그는 누구처럼 한일합병에 반대하지 않았다는 그런 말은 일절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독립의지를 명쾌하게 밝혔다. 5월 5일 경성지방법원 예심공판 때 재판장이 "피고는 독립국이 꼭 되려고 선언하였는가, 그렇지 않으면 선언을 하는 데만 그치려고 한 것인가?"라고 물었다. 이에 신석구는 "금일 (당장) 조선독립은 성립되고 있지 않으나 씨를 심을 때는 추수가 있을 것을 판단하는 것과 같이 청원한다."며 장차 독립에 대한 강한 열망을 피력했다. 그의 신문조서 가운데 일부를 발췌해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문: 이 운동에 학생과 외국 사람과 연락한 일이 있는가.
답: 그런 관계는 없다.
문: 피고는 조선독립이 될 줄로 아는가.
답: 그렇다. 될 줄로 생각한다.
문: 장래에도 또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
답: 그렇다. 나는 한일합병에도 반대하였으니 독립이 될 때까지는 할 생각이다.
(3월 18일, 서대문감옥에서)

문: 피고는 한일합병에 반대하는가.
답: 그렇다. 조선은 4천년의 역사를 가진 나라로서 타국에 병합되는 것은 누구든지 싫어한다. 나는 한일합병에 반대한다.
문: 한일합병 전의 조선은 대단한 악정(惡政)으로 인민은 노예와 같은 대우를 받고 있었으나 합병한 후부터는 자유와 행복을 누렸다고 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가.
답: 그런 것도 있다 하지만 독립국이 된다면 선정(善政)을 할 때가 필연코 올 것이다.
문: 병합하여 영원히 선정을 하여 인민이 행복하면 좋지 않은가.
답: 병합한 후 조선은 식민지가 되어 조선 사람은 열등한 대우를 받고 있는데 조선인민에게 행복이 올 리가 없다.
문: 조선은 문화발전이 되지 않고 인민의 생활정도가 일본보다 낮으므로 그 정도에 응하여 교육제도의 시설을 하여야 하지 않는가. 그리고 조선인에 대한 대우를 말한다 하더라도 인민의 행복과 자유가 점차 커지고 있지 않은가
답: 조선 사람으로서는 동등한 대우를 한다 하여도 그런 것을 희망하지 않는다. 그것은 조선 사람으로 하여금 조선 정신을 잃어버리기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교육에서도 정도가 낮을 뿐 아니라 일본정신의 주입식 교육을 실시하므로 병합에 반대하고 있다. 가령 종처(腫處·뾰루지)가 있다면 치료할 수가 있지 않은가.
문: 그 치료를 하기 위하여 합병한 것이 아닌가.
답: 그렇지 않다. 조선 사람으로서는 그러한 치료를 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문: 그러면 피고는 조선의 국민성을 잃지 않고 있다가 기회만 있으면 조선독립을 계획하려고 생각하고 있는가.
답: 항상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5월 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경성복심법원은 1920년 10월 30일 선고공판에서 징역 2년을 선고했다. 결심공판에서 검사가 구형한 형량보다 1년이 줄었다. 1921년 11월 4일 그는 경성감옥에서 만기출옥 하였다. 선고 형량은 2년인데 실지로는 2년 8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이날 출옥한 사람은 서대문감옥에서 풀려난 1명(이종훈)을 포함해 총 17명이었다.

출옥 직후 신석구는 함경남도 원산 남촌동 교회로 부임해 이곳에서 만 4년간 시무하였다. 이듬해 1922년 3월에는 입학한 지 14년 만에 협성신학교를 졸업하였다. 잦은 교회 이동에다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이었다. 1923년 9월 1일 서울 수표교회에서 개최된 남감리회 6회 한국 연회(年會)에서 그는 보아스 감독에게 '장로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어 이듬해 9월 개성 중앙교회에서 열린 제7회 연회에서 '완속 회원'이 됨으로서 장로사(현 감리사)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됐다.

1920년대부터 그는 전국을 돌며 목회활동에 진력하였다. 원산을 시작으로 강원도 고성구역장, 춘천읍교회 목사, 경기도 가평구역장을 마치고 1928년 9월부터 1년간은 서울에서 부흥 사업에 종사하였다. 1930년대 들어 다시 강원도 철원구역장을 시작으로 황해도 한포(汗浦)구역장, 강원도 이천구역 담임 겸 이안(伊安)지방 감리사, 충남 천안구역 담임 겸 천안지방 감리사(1935~1939) 등을 차례로 지냈다.

 

장남 결혼식의 주례 거부 해프닝(동아일보, 1925.5.19.)

 
원산 시절 웃지 못할 해프닝이 하나 있었다. 1925년 5월 12일자 동아일보에 그의 장남 태화(泰華)의 결혼식 예고기사가 실렸다. 주례는 남감리교회 미국인 장로사, 결혼식 장소는 그가 시무하던 남촌동 교회.

결혼식은 이날 정오에 열릴 예정이었는데 정각이 되도록 집례 목사가 나타나지 않았다. 알고 보니 신부의 집에서 술장사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미국인 장로사는 신성한 목사의 아들이 그런 집안 딸과 결혼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며 집례를 거부하였다. 사태가 이러니 조선인 목사들도 전부 사양하였다. 할 수 없이 그가 아들 결혼식 집례를 해야만 했다.(동아일보, 1925.5.19.)

철원 시절에는 유임 청원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1929년 9월 그는 철원읍교회에 부임했다. 부임 1년이 되자 연회에서 타 지역으로 발령을 냈다. 그러자 교인들이 들고 일어나 신석구 목사 유임운동을 펼쳤다. 부임 1년 만에 교인을 배 이상으로 늘린 이런 좋은 목사를 보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교인 80여 명은 연서하여 양주삼 연회장과 정춘수 철원지방 장로사에게 신 목사 유임 청원을 하였다.(동아일보, 1930.10.12.)

목회 활동 이외에 간간히 대외활동도 하였다. 철원 구역장 시절 철원소비조합 창립(1930.9) 때 이사로 참여했다. 그 무렵부터 동아일보사 주관으로 브나로드운동, 즉 농촌계몽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이 운동의 일환으로 당시 이천학우회에서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하자 그는 교회 아래층을 강의실로 제공하였다. 이밖에도 그는 틈나는 대로 청년단체 같은 곳에 가서 전도활동과 함께 애국 강연을 하였다.

1937년 7월에 발발한 중일전쟁 이후 일제는 황국신민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조선 사람을 일본인화 시키기 위해 일본어 상용(常用), 신사참배, 창씨개명 등을 잇따라 강요하였다.

친일로 변질된 감리교단 지도부 역시 신사참배에 동조하였다. 그러나 당시 천안지방 감리사로 있던 신석구는 이를 정면으로 거부하였다. 독실한 기독교 목사이자 민족지사였던 그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국 그는 불경죄로 1938년 7월 천안경찰서에 연행되었다. 심한 고문 끝에 등창을 얻어 구금 2개월 만에 풀려났다.

출옥 후 그는 멀리 평안남도 용강군으로 갔다. 1939년 5월에 진남포 지방 산유리 교회로 파송을 받아갔다. 이 교회는 행정구역상으로는 평남 용강군 양곡면 산유리에 속했다. 그러나 진남포에서 불과 5Km 정도 떨어져 사실상 진남포나 마찬가지였다. 이곳은 전국에서 일본 신사가 없는 유일한 마을이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고역을 치른 그로서는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그러나 일제가 전쟁에 광분한 뒤로는 이런 시골마을도 예외가 아니었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불령선인'이라는 이유로 그를 예비검속했다. 해방을 불과 3개월 앞둔 1945년 5월에는 전승기원 예배와 일장기 게양 지시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용강경찰서에 구금하였다. 그는 용강경찰서에서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 북한정권과 갈등... 총살로 생 마감

1945년 8.15 해방으로 일제는 물러갔다. 그러나 그의 고난의 역정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국토가 두 동강이 나면서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섰다. 그는 월남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나 교회를 지키기 위해 북한에 남았다.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는 공산세력과 기독교 세력과의 갈등은 이미 예견되었다.

직접적인 계기는 1946년 3월 1일 평양방송에서 행한 3.1절 기념방송이 문제가 됐다. 북한당국은 3.1혁명은 공산당이 영도하지 못해 실패했다는 내용의 원고를 주면서 남한정권을 비방할 것을 강요했다. 그러나 그는 방송에서 원고의 내용을 반박하고 북한정권을 비판했다. 이듬해 3월 1일 진남포 도립극장에서 열린 기념강연에서도 그는 비슷한 내용의 강연을 했다. 이 일로 그는 두 차례나 정치보위부에 연행됐다.

상황은 갈수록 악화되어 갔다. 1946년 6월 15일 그는 돌연 북한 당국에 검거되었다. 당시 기독교감리회 서부연회장으로 있으면서 그가 관여하고 있던 기독교민주당이 북한 인민정권을 전복하려 했다는 혐의였다. 또 평안남도 광양만(廣梁灣)교회 시절에는 그들이 주는 3.1절 공로 표창장을 거부하고 용공적인 감상문을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다시 붙잡아갔다.

결정적인 사건은 1949년 4월 19일의 소위 '진남포 4·19사건'이다. 당시 진남포에서는 기독교 목사들이 주축이 돼 '맹호단(猛虎團)'을 결성해 공산정권에 반대투쟁을 하였다. 그는 이 단체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는 이유로 이날 새벽 3시 진남포 문애리 교회 사택에서 정치보위부에 연행되었다.

재판에 회부된 그에게 평남재판소는 사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최고재판소는 그의 독립운동 공적을 들어 10년형으로 감형시켰다. 당시 최고재판소의 재판장은 국어학자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두봉(金枓奉)이었다.

평양형무소 수감 중 이듬해에 한국전쟁이 터졌다. 개전 초기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북한군은 연합군의 참전으로 퇴각하게 되었다. 평양을 버리고 떠나던 북한군은 이때 형무소 수감자들을 대거 학살했다. 1950년 10월 10일 신석구는 평양교외 비류(沸流)강변에서 총살로 생을 마쳤다. 그의 나이 76세였다. 그는 돈독한 신앙심으로 절조를 지킨 지사적 종교인이었다.

 

신석구 동상(청주 삼일공원) ⓒ 33인유족회

 
1963년 정부는 고인에게 국민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추서하였다. 1962년에 서훈을 받은 다른 동지들보다는 1년이 늦다. 이는 그가 해방 후 북한 땅에 남은 것이 한 원인이 아닐까 추측된다. 1968년 9월 정부는 신석구를 비롯해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순교한 주기철 목사 등 독립운동가 18명을 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안장했다.

그가 졸업한 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는 1978년 그를 포함해 이 대학 출신 민족대표 6명의 흉상(부조)을 교내에 건립했다. 2년 뒤에는 그를 포함해 충북지역 민족대표 6인의 동상이 청주 삼일공원에 세워졌다.


<참고문헌>
- 이병헌, <3.1운동비사(秘史)>, 시사신보사 출판국, 1959
- 오재식, <민족대표 33인전(傳)>, 동방문화사, 1959
-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1, 1990
- 국가보훈처, '이달의 독립운동가-신석구', 1996.3
- 이덕주, <신석구>, 신앙과지성사, 2013
- 김승태, <신석구 : 자유 독립을 위한 밀알>, 역사공간, 2015
- 유준기, '3.1운동과 기독교계 민족대표의 활동 : 양전백·신석구를 중심으로', <총신대논총> 제25집, 2006.2
- 백병권, '신석구 목사의 생애와 민족운동 연구', 목원대 신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8.2
- 허돈, '은재 신석구 목사의 민족의식 재고찰 : 3.1 독립민세운동을 중심으로', 협성대 신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8.8
- 조혁연, '충북 독립운동가 열전-신석구', 충북일보, 2015.3.15
(그밖에 매일신보, 동아일보, 충북일보 등 기사 참조)



3.1 혁명을 이끈 민족대표 33인

정운현 지음, 역사인(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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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언론사에서 근무했고, 친일청산 등 역사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평소 그 무엇으로부터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글쓰기'를 갈망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