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14 13:25최종 업데이트 19.03.14 13:25
신홍식(申洪植)은 1872년 3월 1일 신기우(申驥雨)씨와 최살랍(崔撒拉)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생일과 3.1 거사일이 같다. 유년기에는 이름을 홍식(弘植)이라고 썼으나 장년이 된 후 홍식(洪植)으로 고쳤다.

출생지를 두고 논란이 있었다. 한동안 청주군 가덕면 인차리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제적등본에는 청주군 문의면 문산리 25번지로 돼 있다. 일경의 신문 때는 문의군(文義郡) 동면 대일리(垈一里)라고 밝힌 바 있다. (문의군은 청주군과 함께 공주부 산하에 있었는데 1914년 4월 청주군에 병합되었다)

연이은 과거 낙방에 방탕한 생활

 

신홍식

 그의 회고에 따르면, 어려서 총명하고 재주가 많아 대재(大才), 신동(神童)으로 불렸다. 13세 때 시문을 짓고 16세 때는 사서삼경까지 독파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16세 때 부친이 사망하여 편모 슬하에서 어렵게 성장하였다. 20세 때 분가하여 호주가 되었는데 이때부터 가장노릇을 하였다. 그 무렵 그는 서울을 오가며 과거시험 준비를 하였다. 당시 그에게 과거는 유일한 돌파구였다. 그러나 끝내 성공하진 못했다.

과거에 실패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서자 출신이어서 신분차별의 벽을 넘지 못했다. 게다가 조선 후기 당시는 실력보다는 뇌물이 힘을 쓰던 매관매직의 시대였다. 벽촌의 서출인 그가 이런 현실을 극복하기에는 무리였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세상이 한번 뒤집어지길 기대했다. 그러나 그 꿈마저 결국 허망하게 끝나고 말았다. 그는 양반 허울을 벗어던지고 생업을 위해 장사꾼으로 나섰다.


큰 자본도 경험도 없이 시작한 장사가 잘 될 리가 없었다. 얼마 뒤 그는 몇 푼 안 되는 밑천까지도 모두 날리고 말았다. 이후 그는 8~9년을 술로 날을 지새우며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당연히 가정에는 소홀하게 되었고 결국 이혼도 하게 됐다. 그는 이 시기를 두고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실패자'라고 썼다.

그가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 계기는 기독교와의 만남이었다. 1904년경부터 그는 청주읍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첫 시작은 순수하지 못했다. '예수교회는 힘이 있어서 뭐든 하고 싶은 일은 다 할 수 있다'는 뜬소문을 듣고 교회 문을 두드렸다. 말하자면 교회의 힘을 빌려 이익을 얻고자 함이었다. 당시 주변엔 그런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본질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성경의 힘이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회개를 통해 참 신자로 거듭났다.

입교 2년 만인 1906년, 그는 미 북감리회 서원보((徐元輔, W. C.Swearer) 선교사에게 발탁돼 세례를 받았다. 그해 말 충북 보은으로 파송되면서 그는 목회자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충북 지역의 직산, 입장, 목천, 진천 등지에 파견돼 목회활동을 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를 전후로 감리교 협성신학교에 입학하여 1913년 제2회로 졸업하였다. 이해 집사목사 안수를 받고서 공주지방 순회목사로 활동하였다. 다음해에는 연기(燕岐) 구역 내 교회들을 담임하였으며, 1915년에는 장로목사 안수를 받고 공주읍교회로 파송되었다.

1915년 온양 구미동교회에서 부흥회 도중에 신비한 영적 체험을 한 그는 이후 '신령한 부흥사'로서 활약하였다. 1917년 그는 태어나서 기독교에 입문하고 목회활동을 처음 시작한 충청도를 떠나 멀리 평양으로 활동무대를 옮기게 됐다. 그해 6월 평양 남산현교회에서 열린 미 감리회 제10차 조선연회(年會)에서 그는 행사 개최지인 평양 남산현교회로 파송되었다. 평양은 낯설고 물 설은 땅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또 하나의 신천지와도 같았다.

당시 평양은 '한국의 예루살렘'으로 불렸다. 서울에 협성신학교가 있다면 평양에는 평양신학교가 있었다. 당시 평양 장대현 교회는 '영계의 거장'으로 불린 길선주 목사가 담임을 맡고 있었다. 평양은 장로교의 본거지였다. 이처럼 평양은 기독교세가 강한 데다 일제에 저항적인 기독교인들이 많아 총독부가 늘 주목하던 지역이었다. 소위 '105인 사건'이 일어난 곳도 평양 등 평안도가 주 무대였다. 그가 평양에서 3.1혁명과 연이 닿은 것은 어쩌면 예견된 일인지도 모른다.

신홍식이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하게 된 결정적 계기를 마련해준 사람은 해석 손정도 목사였다. 손 목사는 당시 평양시내 기휼병원에 입원해 있던 신흥우 병문안을 갔다가 그곳에 입원해 있던 남강 이승훈(李昇薰)을 만나게 됐다. 그 후 손정도는 이승훈 병문안을 갈 때 신홍식을 동행하여 이승훈에게 연결시켜주었다. 그때 이승훈은 이미 서울 쪽과 접촉하고 있던 때였다.

감리교 인사 가운데 이승훈과 연결돼 제일 먼저 3.1거사에 참여하겠다고 밝힌 사람은 신홍식이었다. 2월 16일, 이승훈은 천도교 측의 면담 요청으로 서울로 올라갔다. 3일 뒤 19일 신홍식도 혼자 서울로 올라왔다. 상경 목적은 이승훈과 감리교 측과의 연대에 중개역할을 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우선 YMCA 간사로 있던 박희도를 찾아가 이승훈이 독립운동 건으로 서울에 체류 중이라고 알려주었다. 이로써 감리교의 박희도와 장로교 측 이승훈의 만남을 성사시켰다.

22일까지 서울에 머무르는 동안 신홍식은 총 세 차례 모임에 참석하였다. 1차 모임은 2월 20일 오후 7시 30분경 수창동 229번지 박희도 집에서 열렸다. 신홍식 외에 이승훈, 정춘수, 오화영, 박희도, 오기선 등 총 6명이 참석했는데 장로교의 이승훈 말고는 전부 감리교 소속이었다. 이 자리에서는 다 함께 조선독립을 위해 나서자는 데 의견일치를 보았다. 또 독립을 청원할 것인가, 선언할 것인가를 두고는 오화영의 제안대로 독립청원서를 일본정부에 보내기로 합의했다.

천도교와의 연대(합동) 문제를 놓고는 의견이 엇갈렸다. 박희도는 양측의 제휴가 교리 상으로 부합되지 않으며 양 교단 사이에 그간 교류가 없어서 행동 통일이 원활하지 않을 것이라며 반대 입장을 폈다. 정춘수 역시 천도교 측이 위험할지 모른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하였다. 반면 신홍식과 이승훈은 이 문제는 좀 더 두고 생각해보자고 신중론을 펴 결론을 내지 못했다.

2차 모임은 2월 21일 오후 2시에 남대문 이갑성의 집에서 열렸다. 함태영, 이승훈, 안세환, 김세환, 김필수, 오상근 등 장로교 측 인사와 박희도, 오화영, 신홍식, 오기선 등 감리교 측의 인사가 함께 모였다. 이날 모임에서는 청원서 초안 작성 문제가 논의되었다. 또 천도교와의 연대 문제는 종파를 초월해 거족적으로 전개해야 한다는 의견이 주효하여 이 논의에 상당한 진척이 있었다. 이밖에도 국제정세와 강화회의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파악하기 위하여 현순을 상해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21일 저녁 7시 이갑성의 집에서 3차 모임을 가졌다. 신홍식을 포함해 함태영, 이승훈, 박희도, 오기선, 안세환, 김세환, 현순, 이갑성, 오화영 등이 참석했다. 천도교와의 연대 문제가 다시 거론됐으나 이날도 확실한 결론을 도출하지 못했다. 다만 천도교의 독립 출원 방식을 확인한 후에 결정하기로 하되 독립청원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그밖에 기독교와 천도교 간의 역할분담, 전국 각지에서의 동지 모집 문제 등을 의논하였다. 신홍식은 평안남도(평양)를 맡기로 했다.

주요 현안을 매듭짓기도 전에 신홍식은 서울을 떠나야만 했다. 여비도 부족한데다 주일(2.23)을 성수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동지들에게 모든 사항을 위임하고 2월 22일(토) 평양으로 향했다. 2월 25~26일경 신홍식은 안세환을 통해 서울 소식을 전해 들었다. 천도교와 연대하며 독립청원 대신 독립선언을 추진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정부에 제출할 청원서에 찍을 도장은 중화 구역의 이창주 전도사를 통해 박희도에게 전달하였다. 평양에 머물고 있는 그로서 할 수 있는 것은 그게 전부였다.

"조선 독립은 하나님의 뜻" 3.1선언에 투신

신홍식이 3.1독립선언에 동참하게 된 요인을 두고 고성은은 다음 네 가지를 들었다. 1)조선의 독립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신앙적 요인 2)한일병탄 이후 일제의 무단통치에 대한 반발 3)윌슨의 민족자결주의와 도쿄 2.8독립선언의 영향 4)독립운동의 요람이자 배일사상이 투철한 서북지역의 정서 등이 복합적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분석했다. 여기에 하나 더 보태자면 그의 독실한 신앙심과 애국심일 것이다.

3.1혁명 당시 신홍식은 민족대표로서 독립선언식에 참석한 것뿐만이 아니었다. 앞서 그는 서울 3차 모임에서 평양지역의 동지를 규합하는 책임을 맡기로 했다. 그는 약속대로 평양지역 감리교회 교역자들을 접촉하기 시작했다. 1차로 평양성 내에 위치한 아펜젤러기념교회 김찬홍 목사, 이문리교회 주기원 목사, 신양리교회 김홍식 목사 등을 접촉했다. 이들은 민족대표로서 3·1독립운동에 참가하기 보다는 평양에서 3·1독립 만세운동을 주도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는 평양 지역에서 3.1거사를 준비하는 데도 막후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우선 그는 숭덕여학교 교사로 있던 박현숙을 찾아가 태극기 제작을 요청했다. 박현숙은 송죽결사대 대원들과 숭의여학교 학생들을 불러 태극기 제작과 애국가(혈성가) 등사를 담당하였다. 이들과는 별도로 남산현교회 부담임 박석훈 목사도 300여장의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평양에서의 거사준비가 착착 진행되자 신홍식은 2월 28일 서울로 향했다. 뒷일은 박석훈 목사에게 맡기기로 했다.

3월 1일 평양에서의 거사는 성공적이었다. 서울보다 1시간 앞선 오후 1시에 남산현 교회와 장대현 교회 옆에 위치한 숭덕학교 교정 그리고 벽암리 천도교에서 고종황제 봉도(奉導) 및 독립선언서 낭독이 각각 개최되었다. 전국에서 가장 먼저 3·1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날 남산현 교회에는 교인과 학생 등 800여명이 운집했는데 독립선언서 낭독은 주기원 목사가 맡았다.

이 일로 평양지역 교회는 큰 타격을 입었다. 심지어 지방회를 감옥에서 했으면 좋겠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평양성 내 다섯 교회의 목회자 6명이 체포되었다. 남산현교회의 신홍식 목사와 박석훈 목사, 아펜젤러기념교회 김찬홍 목사, 박구리 교회 송득후 목사, 이문리교회 주기원 목사, 신양리교회 김홍식 목사 등이 그들이다. 이들 가운데 남산현교회 부목사로 있던 박석훈은 1919년 11월 16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신홍식은 거사 전날인 2월 28일 새벽 4시 기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서울역에 도착한 시각은 오전 9시경이었다. 그는 일단 박희도 집으로 갔다. 거기서 최성모와 이필주를 만나 국장 행렬 연습 장면을 구경하였다. 그리고 그날 저녁 7시경 손병희의 집으로 모였다. 최종점검회의 격인 이날 모임에서는 거사 장소를 탑골공원에서 태화관으로 급히 변경하였다. 만에 하나 소요사태가 날 것을 우려한 때문이었다.

3월 1일 오후 1시반경 신홍식은 최성모, 이필주 등과 함께 태화관에 도착했다. 오후 2시경 불교 대표 한용운이 독립선언의 취지를 설명한 후 다 함께 만세삼창을 하였다. 곧이어 일제 관헌이 들이닥쳤고, 참석자 29명 전원은 남산 왜성대 경무총감부로 연행되었다. 3월 14일 민족대표들은 구속 기소되어 서대문감옥으로 이감되었다.

 

신홍식 심문기사(매일신보, 1920.7.16.)

 
연행 당일 경찰 조사에서 그는 '경성에 무슨 목적으로 왔느냐?'는 질문에 대해 '다른 용무는 없고 조선독립운동에 참가하려고 왔다'고 당당하게 밝혔다. 그는 경찰 취조와 재판과정에서 자신의 독립의지를 명쾌하게 피력하였다. 이 소식이 신문을 통해 알려지자 그가 시무했던 평양의 교인들은 갈채를 보냈다. 그의 신문조서 가운데 일부를 발췌해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문: 피고는 조선이 독립이 될 줄로 생각하는가.
답: 될 줄로 알고 있다. 그 이유는 하늘은 조선을 독립시켜줄 것이며 또한 우리는 정의를 주장하고 있으므로 일본은 당연히 조선을 독립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 일본은 동양의 평화를 역설하고 있으나 동양의 평화를 보장하려면 조선의 독립이 필요한 것이다. 또 우리가 이번 일을 하는 것은 일본을 배척하자는 것이 아니고 온화한 수단으로 독립을 청원함으로써 일본은 이것을 양해하고 허용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문: 피고는 앞으로도 또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
답: 최초에 운명이 막혔으니 말할 수 없다.
(3월 12일, 경무총감부에서)

문: 피고는 어떠한 일에 불평불만이 있어 조선을 독립하려고 하는가.
답: 한일이 합병된 후 나는 종교 신앙으로 볼 때 이것도 하느님의 뜻인가 생각하였다. 그 후 망국의 민족이 되고 보니 일본사람이 우리를 보기를 얕게 보고 있어 차별대우가 심하므로 민족자결 문제가 제창되고 있는 이번 기회에 조선도 하느님의 의사로 독립국이 되리라고 믿고 가담하였다. 그러나 일본을 배척하기 위하여 독립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4월 25일, 경서지방법원에서)

문: 그런 마음(불평불만)이 어느 때부터 생겼나.
답: 십년동안 자유를 빼앗긴 본인인고로 합병 후부터 불평을 가져왔다.
문: 불평심을 발표하려고 한 것은 언제부터인가.
답: 물론 일한합병 이후부터였다.
문: 대정7년(1918년) 정월(1월)에 윌슨 미국대통령이 14개조의 강화교서를 발표한 것 가운데 민족자결을 보고 그때부터 생긴 것이 아닌가.
답: 원래 있던 마음에 민족자결주의라는 여섯 글자를 보고 내가 하고자하는 마음이 더욱 맹렬해진 것은 당연한 이치다.
(7월 1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은 민족대표들에 대해 최종판결을 내렸다. 신홍식은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1년 8개월간의 미결수 생활을 마치고 기결수가 된 후 서대문감옥에서 생활하다가 1921년 2월 마포 공덕동 경성감옥으로 이감되었다. 주요 일과는 묵상과 기도, 노역은 그물 짜기 작업을 했다. 옥중에서 그는 육적(肉的) 재판만 받은 것이 아니라 영적 재판을 받는 신비한 체험을 하기도 했다. 오화영 역시 감옥에서 '영적 감응'을 얻은 바 있다.

출소 후엔 절제운동 전개... 청년운동 펼치기도

 

독립선언서 사건의 손병희 등 48인 기소장 ⓒ 독립기념관

 신홍식은 1921년 11월 4일 경성감옥에서 만기출옥 하였다. 이튿날 오후 그는 그리운 사람들이 기다리는 평양에 도착했다. 평양역에는 가족과 그가 시무했던 남산현교회 교인 등 많은 사람이 마중을 나왔다.

뒤이어 거대한 환영행사가 예고됐다. 그러자 당국에서 제동을 걸고 나섰다. 11월 9일 평양경찰서장은 평양시내 교회의 목사 전원을 불러 총독의 주의사항을 전하였다. 핵심은 3.1혁명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에 대한 추도회나 비석 건립, 환영회 행사를 열지 말라는 것이었다. (매일신보, 1921.11.11.)

출옥 후 그는 평양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1922년 초 인천 내리교회 제9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이듬해 그는 <인천 내리교회의 역사>를 저술하였다. 1927년에는 <기독신보>에 '신통여행'이라는 동화를 연재하기도 하였다. 이는 그가 금주(禁酒)강연회 강사로 활동하면서 느낀 바를 민중계몽용으로 쓴 것이다.

그 무렵 기독교계는 금주·금연·공창폐지·소비절약·도덕성 회복을 골자로 하는 절제운동을 전개하였다. 금주·금연운동은 단순히 개인 차원을 넘어 사회운동으로까지 발전하였다. 매일신보 기사(1933.2.17.)에 따르면, 원주읍 감리교회 교인 400명은 주일에 금주단연기(禁酒斷煙旗)를 들고 금주가를 부르며 원주 시내를 행진하기도 했다. 1929년에 그는 절제운동의 일환으로 <장수옹>이라는 책도 펴냈다.

절제운동 못지않게 그가 심혈을 기울인 것은 청년운동이었다. 그는 설교를 통해 조선이 기독청년들에게 함정에 빠진 민족과 혼돈에 빠진 교회를 위해 나서라고 호소하였다. 감리교회 청년공동체인 엡윗청년회(懿法靑年會)와 교계 매체인 <기독신보>를 이용하여 활동을 전개했다. 1916년 공주교회에서 엡윗청년회를 시작으로 인천 내리교회, 횡성 등지에서 청년회를 조직하여 야학과 주일학교를 열었다. 이밖에도 그는 '농무회(農務會)'를 조직하여 문맹퇴치와 농촌계몽운동을 펴기도 했다.

1927년부터 1935년까지 원주와 강릉에서 감리사로 시무하던 신홍식은 1935년 원주읍교회에서 은퇴하였다. 은퇴 후 한동안 원주에서 살던 그는 1937년 고향 청주로 낙향하였다. 하지만 은퇴 후의 삶도 그리 편안치 못하였다. 일제의 감시와 병마 때문이었다. 1925년에 가입한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자주 시달려야 했다. 또 1933년 4월부터는 급성 풍단병(風丹病·신장질환)으로 여러 날씩 혼수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신홍식 동상(청주 삼일공원) ⓒ 33인유족회

 
젊은 날의 방황을 딛고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거듭난 신홍식. 그는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해 2년여 옥고를 치렀다. 또 유력한 부흥사로, 기독교 저술가로 활동하였으며, 청년과 농촌 살리기에도 앞장섰다. 1939년 3월 18일 그는 "하나님을 잘 믿고 충성하며 민족의 독립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 말을 남기고 68세로 삶을 마쳤다. 그의 유해는 고향에 묻혔다.

1962년 정부는 고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추서하였다. 1969년 3.1혁명 50주년을 맞아 그의 묘소에 묘비가 세워졌다. 그가 졸업한 협성신학교의 후신인 감리교 신학대는 1978년 이 학교 출신 민족대표 6명의 흉상(부조)을 교내에 건립했다. 또 1980년에는 청주 삼일공원에 그를 포함해 충북지역 민족대표 6인의 동상이 건립되었다.


<참고문헌>
- 이병헌, <3.1운동비사(秘史)>, 시사신보사 출판국, 1959
- 오재식, <민족대표 33인전(傳)>, 동방문화사, 1959
-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1, 1990
- 국가보훈처, '이달의 독립운동가-신홍식', 2006.3
- 기독교대한감리회 역사위원회, <한국감리교인물사전>, 기독교대한감리회, 2002
- 김정권, '동오(東吾) 신홍식(申洪植) 선생', <2000년> 통권 302호, 현대사회문화연구소, 2008.6.1
- 고성은, '신홍식의 생애와 민족 목회 활동에 관한 연구', 호서대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2
- 조혁연, '충북 독립운동가 열전-신홍식, 충북일보, 2015.3.22.
(그밖에 매일신보, 동아일보, 충북일보 등 기사 참조)



3.1 혁명을 이끈 민족대표 33인

정운현 지음, 역사인(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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