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0.29 16:21최종 업데이트 18.10.29 16:21
 

1919. 3.1 종로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하는 군중들 (사진출처:서문당) * 당신은, 우리는 저 자리에 함께 할 수 있겠는가? ⓒ 서문당

 
박재혁이 상하이 등지에서 무역업에 종사하다 독립운동가들과 접촉하다가 1918년 6월 귀국하여 부산에 머물고 있을 때이다. 3ㆍ1혁명은 부산에서도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개항 이후 부산민들에 대한 일본의 경제적 수탈과 횡포는 어느 곳보다 심하였으며, 조선을 식민지화한 뒤에는 우리 민족의 애국심ㆍ독립정신ㆍ반일정신을 뿌리뽑기 위하여 역사적ㆍ전통적인 문화 유물을 고의적으로 철거ㆍ폐허화하였다. 
 
부산에는 사립학교ㆍ노동야학 등이 설립되어 일제의 식민노예교육에 맞서 민족의식을 고취시켜 왔다. 사립학교ㆍ노동야학 교사와 학생들 중 반일민족의식으로 무장된 인사들이 많았다. 이들은 손에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기숙사를 뛰쳐나와 좌천동 거리를 누비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거리의 대중이 여기에 호응하였으며, 학생들은 태극기를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들은 3ㆍ1운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경남지방에서 최초로 <독립선언서>가 배포된 곳은 부산ㆍ마산이었다. 이갑성의 지시를 받은 이용상에 의하여 독립선언서 200매가 이 지역에 전달되었다. 같은 무렵 부산은 서울의 학생대표가 직접 내려와 경성학생단 명의로 부산지역 각 학교 대표들에게 <독립선언서>를 전달하고 궐기를 호소하였다. 
 
이는 3월 11일 부산시위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3월 3일 부산ㆍ마산에 독립선언서가 배포되고, 서울의 시위소식이 전해지면서 시위는 불붙기 시작하였다. 3월 11일 기독교계 일신여학교 학생들과 기독교인이 중심이 되어 경남지방 최초로 3ㆍ1운동의 횃불을 치켜세웠다.   

11일 수업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와 저녁식사를 마친 고등과 학생 11명은 교사 주경애ㆍ박시연 등과 합류한 시위군중 수백명은 감격에 넘친 힘찬 시위를 전개하였으나 출동한 일본군경에게 학생 11명과 두 여교사는 검거되어 학생들은 징역 6개월, 교사는 각각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의거에는 학생 신분이 아닌 박연이라는 16세의 소녀도 학생들과 같이 옥고를 치렀다. 일신여학교 학생 의거는 경남 3ㆍ1혁명의 효시를 이루어 항쟁의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였을 뿐 아니라 부산 주민들의 항일의식을 한층 높여갔다.
 
4월 3일 학생ㆍ주민들이 주동이 된 대대적인 독립만세시위가 다시 부산진 거리에서 일어났다. 부산진공립보통학교 학생 배수원 등은 동교 교사 홍재문과 더불어 논의를 거듭한 뒤 수백명 주민들의 호응을 얻어 궐기하였다. 

시위군중은 기독교인들로 오후 2시 30분경 주동 인물들은 독립만세라고 크게 쓴 플래카드를 좌천동 거리에 세우고 군중들과 더불어 대한독립만세를 고창 연호하면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시위로 주동인물 10명이 검거되었다. 8일 오후 8시경 부산진공립보통학교 김애련ㆍ전호봉ㆍ이갑이 등이 만세 시위를 주동하자, 일신여학교 여학생 약 50명과 인근 수백 명 군중들이 호응하였다.

좌천동에 살던 김태곤ㆍ박성해ㆍ최익수 외 16명은 동래고등보통학교ㆍ부산상업학교ㆍ일신여학교의 남녀 학생과 주민들을 규합하여 9일과 10일 양일에 걸쳐 좌천동에서 대대적인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하지만 이 계획은 일본 경찰에 탐지되어 주모자들이 피검됨으로써 무산되고 말았다. 
 
영도에서는 부산상업학교 출신 이남식이 영도의 사립 옥성학교 교사 정인찬의 지도를 받아 학생들과 더불어 학교 뒤편 송림 사이에서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시내로 행진하려다가 일본경찰에 검거되었다. 정인찬은 독립군 지원을 목적으로 한 '조선국권회복단'의 단원이었다. 이는 1910년대 활동하던 각종 비밀결사조직이 3ㆍ1혁명을 확산하고 조직하는 데 앞장선 실례에 해당된다.
 
부산에서 독립선언서ㆍ격문을 비밀리에 작성하여 배포한 안희제 등도 조선국권회복단과 관계를 맺고 있던 인물이었으며, 부산항일구국단 출신의 최천택(崔天澤)도 각 시위에 앞장서 활약하였다. 
 
부산지방의 3ㆍ1혁명은 양상을 달리하면서도 4월 하순까지 지속되었다. 

4월 중순 이래 3ㆍ1혁명은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소강상태에 접어들 때 노동자계급에 의해 계승ㆍ발전되었다. 4월 20일 전차 운전수 50여 명과 조선와사전기회사 노동자들이 동맹파업을 단행하였으며, 5월 16일에는 만주철도관리국 철도공장 초량 분공장의 조선인 직원 200여 명이 독립파업을 단행하는 등 위세를 떨치었다. 

부산의 3ㆍ1혁명은 초기에 지식인ㆍ청년ㆍ학생층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노동자를 비롯한 민중도 점차 독자적으로 시위를 조직ㆍ주동하여 나갔다. 
 
이들이 투쟁의 선봉에 나선 것은 일제 수탈의 최대 피해자로 누구보다도 반일의식이 강렬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3ㆍ1혁명 과정에서 민족해방운동의 주력군으로 등장하였다. 1920년대 들어서 부산지역의 노동운동이 적극적인 양상을 띤 것도 3ㆍ1혁명을 통하여 체득한 민족적ㆍ계급적 자각과 투쟁 경험 때문이었다. 

1920년대 전반기의 대표적인 파업투쟁인 1921년 부두노동자를 중핵으로 하는 운수부문 노동자의 총파업투쟁과 1922~1923년 수차례에 걸쳐 전개된 조선방직 노동자들의 파업투쟁, 1925년 말인 쇄직공들의 총파업투쟁 등이 그것이다.
 
3ㆍ1혁명 직후 부산은 비밀결사운동도 활발히 전개되었다. 1919~1922년에 조직된 비밀결사는 민족부활단결사대ㆍ의우단ㆍ의용단 등이 있다. 이밖에 의열단ㆍ대한민국임시정부ㆍ대한독립군정서ㆍ하와이조선독립단 등의 해외 독립운동조직이나 흥한민회 등 국내 다른 비밀결사와 연계된 조직사건이 빈발하였다. 초기에 친목단체의 성격을 지녔던 부산 각지의 청년단체들은 3ㆍ1혁명 이후 고양된 민족의식 속에서 성격을 변화시켜 갔다. 
 
개별분산적인 청년단체들을 지역단위의 민족해방운동의 구심체로 결집해 내고자 7개의 청년단체가 연합하여 부산청년회를 조직하여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각종 여성단체ㆍ종교단체ㆍ소년단체ㆍ예술단체ㆍ친목단체 결성은 대중적 기반을 확대해 나갔으며, 전 계급적 민족운동의 지역적 토대라고 할 수 있는 주민운동이 대중의 생활 요구와 결합하여 지역 단위에서 심화되어 간 것도 3ㆍ1혁명에서 역사적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주석 1) 박재혁도 각종 항일 지하단체에 은밀히 참여하였다.

주석
1> 홍순권, <한국독립운동사사전(3)>, 335~336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의열지사 박재혁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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