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0.14 18:19최종 업데이트 18.10.14 18:19
 

1910년 8월, 한일병탄 조약문으로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정부에 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 그리고 영구히, 일본국 황데 폐하에게 양여"이라 기록되어 있다. ⓒ 눈빛출판사 제공

 
박재혁은 사회에 나왔으나 나라의 사정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상태에 놓여 있었다. 

대한제국을 강탈한 일제는 폭압과 수탈을 일삼았다. 먹잇감을 독차지한 맹수처럼 사납게 물어뜯고 닥치는 대로 집어 삼켰다. 


사회초년생으로서 일제의 만행을 지켜본 박재혁은 회사일을 하면서도 울분에 차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날이 많았다. 정의감이 남달리 강한 그는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의 다짐을 하였다. 학생 시절의 항일운동이 의분에 찬 정의감이었다면 지금 조선천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제의 만행에는 민족현실을 직시한 역사의식이었다.

박재혁이 의열단원이 되고 의열투쟁으로 생명을 바친 데는, 이때 조선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민족현실이 크게 작용하였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본다.     
  

데라우치 마사다케 초대 총독 ⓒ 이승우

 
조선을 무력으로 병탄한 일제는 무력에 의한 강압통치를 '시정방침'으로 삼았다. 초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데라우치 마사다께는 제1성으로 "조선인은 일본 법규에 복종하거나 아니면 죽음뿐이다" 라고 협박하면서 혹독한 고문과 수탈의 무단통치를 자행하였다. 일제가 조선을 병탄시킨 후에 가장 먼저 설치한 기구가 총독부 산하의 헌병경찰이었다. 

1910년 9월 10일 칙령으로 조선주차헌병조래를 발표하여 헌병이 군사경찰과 치안유지에 관한 행정을 담당하도록 한 것이다. 데라우치는 조선을 지배할 조선총독부는 헌병경찰이 뒷받침하도록 하는 제도를 마련하였다. 의병 학살의 과정에서 창설된 "소지역 완전 군사점령체제"이던 헌병경찰제도를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하여 전대미문의 무단통치체제를 구축하였다. 

데라우치는 서울을 비롯, 광주ㆍ대구ㆍ평양의 3개 지역에 77개의 헌병분대와 전국에 562개의 파견소를 두고, 일본인 헌병 1명에 조선인 보조원 3명 씩을 붙여서 이들을 정보와 염탐, 착취와 고문의 하수인으로 활용하였다. 헌병대와 함께 서울의 경찰국, 각 도의 경찰부를 중심으로 전국에 경찰서 254개소, 주재소 222개처, 파출소 242개소를 두고 2만 1.000여 명의 순사를 배치시켜 전국을 물샐 틈 없는 감시체제로 만들었다.
  

경술국치 전후 조선에 파견된 일본 헌병들 ⓒ 눈빛출판사 제공

 
조선인에 대한 고문과 감시는 주로 헌병경찰(3ㆍ1혁명 이후에는 보통 경찰로 명칭 변경)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이들은 독립운동가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무고한 사람들까지 잡아다가 고문하고 재산을 강탈했으며 여성들의 겁탈도 다반사로 자행하였다. 일제의 헌병 경찰제는 조선에서 거의 초법적인 권력을 행사했는데, 헌병 경찰의 법적인 권한은 다음과 같다( <경성부사> 3).

 ①군사경찰ㆍ의병의 토벌, 첩보 수집 등
 ②정치사찰ㆍ신문 및 출판물의 단속, 집회 및 결사 단속, 종교 단속, 기부금 단속 등
 ③사법권 형사범죄의 즉결, 신생쟁송의 조정, 검사업무의 대리, 집달리의 업무, 호적 사무 등
 ④경제경찰ㆍ학교 및 서당의 사찰, 일어의 보급 등
 ⑤외사경찰ㆍ외국 여권 교부, 일본행 노동자 및 재한 중국인 노동자의 단속, 재류 금지자 단속, 국내외 거주 이전 등
 ⑥조장행정ㆍ법령보급, 납세의무 유시, 농사 식림의 개량, 부업장려
 ⑦위생경찰ㆍ종두보급, 해수구제(害獸驅際), 전염병 예방, 도축단속 등 
 ⑧기타 해적경계, 우편호위, 도로수축, 묘지매장, 화장단속, 우량(雨量) 수위의 측량, 도박,무인(巫人), 예창기(藝娼妓), 매음, 풍속 등의 단속.

이와 같이 헌병경찰은 군사를 비롯하여 행정, 사법 기타 잡무에 이르기까지 간섭하지 않은 곳이 없어서 가히 헌병만능의 시대가 되었다. 조선통치의 일선 하수인인 헌병경찰에게는 태형령이란 법제를 마련하여 고문과 구타를 합법적으로 보장하였다. 그들은 태형령을 근거로 하여 공공연히 고문을 자행하였다. 

갓 사회에 나온 박재혁은 이 같은 현실에 직면하였다. 일제가 병탄 후 처음으로 그들의 '공권력'을 동원하여 우리 독립지사들을 가혹하게 탄압한 것이 이른바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사건'이라는 날조된 사건이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