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7.16 21:57최종 업데이트 19.06.25 15:33

약산 김원봉 장군 약산 김원봉 장군은 1920년대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의열단’을 창설한 인물이다. 1930년대엔 중국 난징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세운 뒤 애국지사를 직접 길러냈다. 이후엔 항일운동의 선봉을 맡았던 조선의용대를 창설, 총대장을 맡았다. 일본은 약산에게 지금 가치로 320억 원 이상의 현상금을 걸었다. ⓒ KBS 다큐영상 캡처



미안했습니다. 과연 우리가 약산 김원봉 장군을 이렇게 대하는 것이 온당한가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던 것이, 약산 김원봉 장군은 한마디로 정리하면 백범 김구 선생보다 현상금이 컸던 유일한 인물입니다. 지금 가치로 320억원이 넘습니다. 

다들 잘 알겠지만 약산은 1920년대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의열단'을 창설한 인물입니다. 1930년대엔 중국 난징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이하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세운 뒤 직접 애국지사를 길러냈습니다. 이후엔 항일운동의 선봉을 맡았던 '조선의용대'를 창설, 총대장을 맡았습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사분오열된 항일운동을 통합하는 큰 축이 된 '조선민족혁명당'의 총서기도 맡았습니다. 1940년대에 들어선 김구 선생과 합심해 우리 민족사 최초로 좌우합작을 이뤘습니다.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된 뒤 광복군 부사령관을 역임했습니다. 동시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도 맡아 중국에서 마지막까지 항일운동에 전념했습니다.  

단언컨대 약산 김원봉 장군은 대한민국 항일운동사를 이끈 태산 중 한명입니다.

해방 후 친일경찰 노덕술에 얻어맞다

해방은 갑작스레 찾아왔습니다. 다들 그랬듯, 약산 역시 한순간에 다가온 조국의 독립을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1945년 12월, 약산은 한 달 먼저 돌아간 김구 선생에 이어 2진으로 귀국했습니다. 1진 때와 마찬가지로 초라한 행색이었습니다. 기상불량으로 김포공항 대신 전북 옥구비행장에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비행장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김원봉 장군은 꿈에 그리던 고국에서의 첫날밤을 논산의 초라한 여관에서 보냈습니다. 

1945년 12월 3일, 임시정부요인 귀국기념 사진 앞줄 가운데가 김구 선생, 오른쪽 상단에 부리부리한 눈매를 보이는 이가 김원봉 장군이다. ⓒ wiki commons



약산은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고국으로 돌아온 뒤 더욱 열정적으로 민족의 완전한 독립을 위한 노력을 다했습니다. 실제로 1946년 7월엔 좌우합작을 지지하며 정치적 동지이자 선배인 몽양 여운형 선생을 도왔습니다. 

몽양과 약산은 중국 난징에 있는 '금릉대학' 동문입니다. 전공도 영문학으로 같습니다. 항일투쟁 과정에서 두 사람이 직접적인 친분을 과시하진 않았지만 1926년 약산이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할 당시 여운형 선생이 다리를 놨습니다. 큰 틀에서 서로의 존재를 존중하고 도움 준 동지적 관계였습니다.

하지만 해방된 조국에서 현실의 벽은 그의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좌우합작의 꿈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중심이 됐던 여운형 선생은 해방 후 서울 한복판에서 십여 차례 이상 테러를 당했습니다. 침실이 폭발하거나 괴한에게 납치돼 끌려가기도 했습니다. 절벽에서 떨어뜨리려는 시도도 있었습니다. 

결국 1947년 7월, 여운형 선생은 서울 혜화동 로터리 근방에서 암살당합니다. 당시 여운형 선생의 나이는 62세였습니다. 김원봉 장군은 깊은 실망감과 심각한 위협을 느꼈습니다. 몽양 선생의 죽음은 약산이 '북으로 가야겠다'고 결심한 직접적인 계기가 됐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충격적인 사건이 같은 해 2월 발생합니다. 약산은 '남로당이 주도한 파업에 연루됐다'는 죄목으로 친일 악질경찰 노덕술에게 끌려갑니다. 이 상황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인지, 정치적 차이로 약산과 거리를 뒀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정화 여사조차 자신의 책 <장강일기>에 아래와 같이 기록했습니다.

"언젠가 약산이 중부경찰서에 잡혀 들어가 왜정 때부터 악명이 높았던 노덕술로부터 모욕적인 처우를 받았다는 말을 듣고 몹시 분개했던 일이 기억난다. 평생을 조국 광복에 헌신했으며 의열단의 의백이었고 민혁당의 서기장을 거쳐 임시정부의 국무위원 겸 군무부장을 지낸 사람이 악질 왜경 출신자로부터 조사를 받고 모욕을 당했다는 소리를 듣자 세상이 아무래도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약산은 풀려난 뒤 사흘을 꼬박 울며 "여기서는 왜놈 등살에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한탄을 했다고 합니다. 중국에서 활동하며 단 한 번도 일제에 잡히지 않았던 항일운동의 거두가 해방 후 반공투사로 변신한 친일경찰 노덕술에게 잡혀 말도 안되는 모욕을 당한 겁니다. 

김원봉과 김일성 김원봉 장군은 1948년 자발적으로 월북했다. 이후 북한의 국가검열상이 됐다. 사진 가운데가 수상 김일성, 왼쪽에 선글라스 낀 인물이 국가검열상 김원봉이다. ⓒ NARA / 박도



1948년 약산은 '자발적으로' 북으로 넘어갑니다. 김구 선생과 함께 남북협상에 참여했지만 서울로 귀환하지 않았습니다. 자발적으로 북에 갔다는 이유 때문에 대한민국 정부은 지금까지 그를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약산 김원봉 장군은 북으로 넘어간 뒤 국가서열 7위에 해당하는 국가검열위원장에 오릅니다. 이후에도 여러 고위직을 거쳤습니다. 놓치지 말아야할 점은, 김원봉 장군은 북에서도 '중립화 평화통일방안'을 주장했다는 사실입니다. 말 그대로 외세의 간섭에서 벗어나 민족의 단결과 통일을 이루어내자는 내용입니다. 

당연히 김일성 눈 밖에 났습니다. 1958년을 기점으로 약산은 전면에서 사라집니다. 이후 '국민당 장개석의 간첩이자 종파주의자'라는 말도 안되는 혐의를 씌워 김원봉 장군을 숙청해 버립니다. 김일성 입장에서는 항일투쟁에 선봉에 섰던 연안파와 김원봉 장군이 정치적 부담이었고, 결국 숙청을 위한 공작을 벌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입니다. 

형무소로 끌려간 김원봉 장군은 결국 울분을 참지 못하고 청산가리를 입에 털어넣었다고 전해집니다. 환갑 생일을 막 지나서의 일입니다. 항일운동의 거두였던 약산은 이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난징에 남은 약산의 흔적, 누군가는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사실 기대를 많이 했습니다. 약산 김원봉 장군은 난징에서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10대 시절 중국 텐진의 덕화학당에서 유학한 뒤 중국 최고 명문대학 중 하나인 난징 금릉대학 영문학과에 입학했습니다. 

성이 차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뜨거운 피를 감당할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얼마 뒤 약산은 금릉대학을 중퇴합니다. 이후 신흥무관학교로 다시 적을 옮깁니다. 이곳에서 만난 윤세주, 이종암 등 13명의 동지들과 함께 의열단을 창설합니다. 약산은 의백이 되고, 곧이어 일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인물이 됩니다.  

금릉대학교(현 난징대학교) 김원봉 장군은 금릉대학에서 수학한 뒤 신흥무관학교를 거쳐 의열단을 만들었다. ⓒ 김종훈



김원봉 장군은 의열 투쟁만으로는 부족함을 느꼈습니다. 더욱 효과적인 항일투쟁을 위해 군대의 필요성을 고민했습니다. 본인부터 체계적인 군사훈련을 받기 위해 광저우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고급 군사훈련을 받은 뒤 다시 난징으로 돌아와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설립했습니다. 이곳을 나온 이들이 저항시인 이육사 선생과 중국 인민군 군가인 '인민해방군가'를 작곡한 정율성 선생입니다. 

그래서 더 기대가 컸던 것 같습니다. 난징에서 약산의 업적이 워낙 거대했던 탓에 조선혁명간부학교 3기생들의 훈련장소인 천녕사에 갔을 때는 무언가 눈에 띄는 흔적이라도 남아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역시나 착각이었습니다.

난징 천녕사, 시내에서 차로 1시간 거리에 있습니다. 지금은 방치된 도교사원으로 쓰이고 있지만 그 어디에도 조선혁명간부학교 학생들이 훈련 받은 직접적인 흔적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천녕사라 적힌 옛 건물과 다 쓰러져가는 가옥, 건물 앞에 덩그러니 놓인 우물이  그 흔적의 전부입니다.
 

천녕사 초입에 세워진 가림막 조선혁명간부학교 3기생들이 훈련받은 천녕사에 오르기 위해선 폐건물 사이에 세워진 가림막을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 김원봉 장군과 관련된 흔적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 김종훈

 

천녕사 전경 지금은 폐허가 된 천녕사에서 조선혁명간부학교 3기생들은 훈련을 받았다. 역시나 아무런 흔적이 없다. ⓒ 김종훈

 

천녕사 내부 김원봉 장군과 조선혁명간부학교 생도들은 이곳 천녕사에서 훈련을 하며 조국 독립을 꿈꿨다. 지금은 폐허의 잔해만 남아있다. ⓒ 김종훈



문제는 이러한 흔적조차 제대로 보존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 많은 시민들이 방문할 수 있도록 관리돼야 하건만, 천녕사를 찾아가려면 첫 길목부터 난관에 봉착합니다. 공장 건물 벽과 폐가 사이의 통로를 따라 올라가야 하는데 이곳 또한 가림막으로 막혀있습니다. 천녕사가 있다는 확신이 없다면 발걸음을 옮기기 쉽지 않습니다. 길목에 작은 표지석 하나 없는 게 큰 아쉬움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관리돼야 할 곳은 조선혁명간부학교 3기생들의 훈련장소인 천녕사입니다. 어렵게 산 중턱에 자리한 천녕사에 올라가면 헛헛한 웃음만 밀려옵니다. 솔직히 말해 천녕사는 말만 사원이지 수풀 속에 자리한 폐허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곳에서 김원봉 장군과 조선혁명간부학교 생도들이 훈련받았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질 않았습니다. 김원봉과 조선혁명간부학교라는 이름조차 찾을 수 없습니다. 취재팀이 무리를 해서라도 천녕사 외벽에 '김원봉과 애국지사들이 있었다'는 낙서를 남기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광저우 황포군관학교 김원봉 장군은 보다 효과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1926년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했다. ⓒ 김종훈



광저우는 달랐습니다. 1926년 김원봉 장군이 정식군사훈련을 받은 황포군관학교는 중국의 국공합작으로 탄생한 사관학교입니다. 조선혁명간부학교처럼 불과 3년밖에 운영되지 않은 곳입니다. 하지만 관리 수준은 차원이 달랐습니다. 중국 국민들도 끊임없이 찾아와 자신들의 항일운동을 기억하고 기록했습니다. 천녕사와 너무나도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당시 의열단과 조선혁명간부학교 학생들은 우리말과 중국어, 일본어에 능통했습니다. 김원봉 장군은 영어와 독일어까지 익혔습니다. 시대를 앞서간 엘리트들이 모여 조국의 독립을 위해 수만 리를 건너와 싸우고 익히고 배운 겁니다. 훗날 이들은 독립운동의 최전선에서 싸운 조선의용대와 광복군으로 거듭났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의 발자취는 그 흔적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구이린에서 만난 약산의 흔적

약산이 장교로 거듭난 광저우 황포군관학교에 갔을 때도 김원봉 장군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었습니다. 취재팀이 전시된 수십 장의 사진을 비교해가며 어떻게든 약산의 흔적을 끄집어내고 싶었으나 방법이 없었습니다. 중국인들의 기록만 남기기에도 그 넓고 깨끗한 공간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구이린에 가서야 김원봉 장군의 미약한 흔적을 상상해 볼 수 있었습니다. 

구이린, 우리에겐 '계림'이라는 지명으로 더 유명한 곳입니다. 이곳 시내 중심에 칠성공원이 있습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10주년 기념으로 세워진 유료 공원입니다. 입장료가 70위안(1만2000원)에 이를 만큼 잘 꾸며진 곳입니다. 이곳에 조선의용대 계림 본부가 있었습니다. 우한에서 만들어진 조선의용대가 일제의 공격을 받아 계림으로 이동했고 김원봉 장군은 이곳에 본부를 차리고 조선의용통신을 발행했습니다.

칠성공원 내 조선의용대 본부 터 사진 속 좌측에 공터가 조선의용대 본부 터다. 현재 칠성공원 내 '화교' 입구에 있다. 역시나 아무런 표식이 없다. ⓒ 김종훈



구이린은 잘 알려진 대로 천하에서 가장 아름다운 땅이었습니다. 너무나 아름다워서 더욱 아쉬움이 컸습니다. 무엇보다 <how are you 임정> 취재팀이 칠성공원에서 촬영을 하고 있을 때 한국인 관광객이 단체로 지나갔습니다. 아무도 '그곳에 김원봉 장군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현지 가이드도 몰랐습니다. 오히려 저희와 대화를 나누던 어르신들이 일찍오지 않는다며 재촉하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더 당부 드립니다. 수많은 한국 관광객이 구이린에 옵니다. 칠성공원을 찾는 관광객도 적지 않습니다. 칠성공원 화교 앞을 찾아 조선의용대 본부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이곳을 거쳐간 애국지사들에게 인사를 드리는 것은 어떨까요? 이런 모습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우리 정부와 중국 정부가 구이린 칠성공원 내 화교 옆에 작은 표지석 하나 세울 날이 오지 않을까요?

충칭에서 만난 약산의 흔적, 이대로 가면 영원히 사라진다

어쩌면 중국 내에서 김원봉 장군과 관련된 얼마 남지 않은 흔적 중 하나가 바로 충칭 '대불단정가 172호'에 위치한 약산의 거주지일 겁니다. 시장통 한가운데 위치한 이곳 역시 방치되어 그 흔적만 남았습니다. 

취재팀이 방문한 지난 7월 6일, 이곳에 자리했던 1층 옷가게는 폐업정리 중이었습니다. 2층과 3층은 아예 사람이 살지 않았습니다. 재개발의 여파로 시장 초입까지 거대한 쇼핑몰이 밀고 들어온 상황, 약산이 마지막으로 생활했던 터전은 영원히 사라질 위기에 놓였습니다.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충칭 김원봉 장군 거주지 약산 김원봉 장군은 이곳에서 충칭 생활의 대부분을 보냈다. 현재는 폐업정리 중인 옷가게가 운영 중이다. 이마저도 동네 재개발로 완전히 사라질 위기에 놓여있다. ⓒ 김종훈



충칭이 더욱 의미 있는 이유는 김원봉 장군이 우리민족 처음으로 좌우합작을 이뤄내는 데 큰 역할을 했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약산의 결단이 돋보였습니다. 조선의용대 주력이 화북으로 떠난 사이, 김원봉 장군은 남은 조선의용대를 광복군에 편입시켰습니다. 광복군 부사령관 겸 광복군 1지대 지대장으로 취임했습니다. 이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무부장으로도 활동했습니다. 그러다 꿈에 그리던 해방을 맞이한 겁니다. 

돌아보면 우리는 왜 약산 김원봉 장군을 이리도 몰랐을까 하는 생각이 우선 듭니다. 남북 모두로부터 외면 받은 약산 김원봉 장군. 월북한 뒤 약산의 형제 4명은 보도연맹 사건으로 총살당했습니다. 그의 집안 역시 풍비박산 났고, 막내 동생 김학봉 여사 역시 수십 년 동안 오빠 김원봉에 대한 흔적을 지우고 살았습니다.

그나마 2015년 영화 <암살>과 <밀정>이 개봉한 이후 약산에 대한 관심이 약간 높아졌습니다. '나 밀양사람 김원봉이요' 이 한마디가 공개되기까지 해방 후 반세기가 넘는 시간이 걸린 겁니다. 우리 사회에 약산에 대해 알려진 게 거의 없었기 때문에 영화가 개봉했을 때 그의 일부 모습만으로도 주목을 받은 것 아닌가 싶습니다.

약산 김원봉 장군은 혁혁한 공에도 불구하고 외면과 무시를 당했습니다. 심지어 독립운동가의 산실 밀양에서 60여명의 애국지사가 훈장 추서를 받을 때조차 김원봉 장군은 제외됐습니다. 전후 과정을 살피지 않고 북에 자발적으로 갔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김원봉 총대장과 조선의용대 조선의용대 깃발 가운데 위치한 이가 김원봉 장군이다. 조선의용대는 1938년 10월 중국 우한에서 창설됐다. ⓒ 독립기념관



아무리 생각해도 약산 김원봉 장군을 이렇게 무시하고 방치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감히 한마디만 더 보탭니다. 김원봉 장군의 흔적을 찾는 일, 우리가 먼저 나서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먼저 난징 천녕사와 금릉대학, 충칭 김원봉 장군의 집 앞에 표지석을 세울 계획을 마련해 보는 건 어떨까요? 물론 중국땅에 김원봉 장군의 표지석을 세운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 둘, 김원봉 장군의 흔적을 찾으려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이어진다면 불가능한 일만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How are  you 임정> 취재팀이 제작 중인 로드다큐와 임정투어 가이드북이 시작점이 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다 쉽게 찾아갈 수 있도록 구체적인 방법과 의미를 영상과 책에 담겠습니다. 언젠가 기회가 닿아 천녕사를 다시 찾을 때는 시민들의 애정과 관심으로 만든 표지석을 하나 세워놓고 오겠습니다. 그것이 약산 김원봉을 대하는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합니다.
임정투어 가이드북_김원봉 편 

1. 금릉대학교(현 난징대학교) / 대례당
김원봉 장군과 여운형 선생이 수학한 곳이다. 약산은 금릉대학교 영문학과를 다니다 1919년 신흥무관학교로 적을 옮겼다. 이후 의열단이 창설됐다. 김원봉 장군은 1935년 금릉대학교 대례당에서 의열단을 포함해 5개 단체를 모아 조선민족혁명당을 탄생시켰다. 약산은 총서기를 맡았다.

2. 난징 천녕사 (조선혁명간부학교 3기 훈련 장소)
김원봉 장군이 1932년 7월에 세운 조선혁명간부학교 3기생들의 훈련 장소다. 난징 시내에서 차로 1시간 거리에 있다. 산속에 위치한 탓에 찾기가 쉽지 않고 입구부터 공장과 폐건물 사이를 지나야 한다. 그럼에도 중국땅에서 거의 유일하게 김원봉 장군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장소다. 그래서 더 표지석이 필요한 장소이기도 하다. 

3. 광저우 황포군관학교
김원봉 장군이 1926년 훈련받은 장소다. 김원봉 장군을 비롯해 70여명의 한인 학생들이 이곳에서 교육을 받았다. 무한분교까지 합치면 200여명이 넘는다고 전해진다. 중국은 황포군교기념관을 1965년에 복원, 1988년에 국가급 문물보호기관으로 지정했다. 우리와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4. 구이린 조선의용대 본부
구이린시 중심에 위치한 칠성공원에 있다. 칠성공원에서 서쪽 출입문 쪽으로 뻗은 '화교' 입구가 조선의용대 본부의 터다. 줄지어 들어선 매점 끝이다.

5. 충칭 김원봉 거주지
곧 사라질 위기에 봉착했다. 이미 1층에 있던 옷가게가 폐업정리 중이다. 시장 입구엔 거대한 쇼핑몰이 들어왔다. 지금 나서지 않으면 선생의 거주지는 영영 찾기 어려워진다. 이곳 역시 표지석이 반드시 필요하다. 

*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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