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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8.04.30 08:27수정 2018.04.30 08:27
아내와 연애할 때 수없이 핀잔을 들으면서도 고쳐지지 않는 게 있었다. 아내와 얘기하면서 옆자리 대화를 엿듣는 것이다. 요즘도 카페에서 글을 쓰다 나도 모르게 생면부지 남의 얘기를 듣고 있다. 패키지여행을 가면 나는 관광보다 일행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이 많다. 저쪽 일행은 어떤 사이이고, 이쪽 일행은 밥 먹고 버스 자리 잡을 때 얌체 짓만 한다는 둥 관찰하는 것을 즐긴다. 아들도 나를 닮았다. 엄마 아빠가 대화할 때 안 듣는 척하면서 다 듣고 있다.

글쓰기를 공부하며 읽은 책 중에 두 권이 인상 깊다. <생각의 탄생>(미셸 루트번스타인·로버트 루트번스타인 저, 박종성 역)과 <인지니어스>(티나 실리그 저, 김소희 역)다. <생각의 탄생>은 13가지 생각 방법을, <인지니어스>는 11가지 생각법을 소개하고 있다. 생각법이라기보다는 글쓰기 방법에 가깝다. 그런데 두 책 모두 공통으로 언급하는 한 가지가 있다. '관찰'이다.

글쓰기에는 '삼관(三觀)'이 필요하다. 아니 필수적이다. 관심, 관찰, 관계가 그것이다. 하나 더 추가하면 관점이다. 글을 쓰려면 쓸 대상이 있어야 한다. 쓸 사람, 쓸 사건이 필요하다. 그런데 '관심'을 두지 않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관심이 관찰하게 하고, 관점을 만든다. 있는 세상도 '관찰'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자세히 봐야 알 수 있고 해석할 수 있다.

글 쓰는 사람에게는 관찰이 중요하다. 사물, 사람을 잘 관찰하는 사람은 시와 소설을 쓴다. 기자는 사건을 잘 관찰하는 사람이다. '관계'도 중요하다. 진공상태에서 만들어진 글은 공허하다. 관념적이다. 현장감이 없다. 생생하지 않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 사회 속에서의 관계, 이 일과 저 일의 인과관계가 필요하다.

때로는 관심을 끊고 관찰을 멈추고 관계에서 벗어날 필요도 있다. 세상일에 '관심'을 끊고 나만의 세계에 파묻혀 살 필요도 있다. '관찰'하는 대상은 이미 있는 것이고, 남이 만들어놓은 것이다. 이전에 없던 새로운 것, 나만의 것을 만들기 위해선 관찰을 멈추고 나를 들여다볼 필요도 있다. 나만의 '관점'을 만들어야 한다. '관계' 없음도 필요하다. 고독하고 독립적이고 주체적이어야 한다. 스스로 왕따가 되고 독불장군이 되어 휩쓸리지 말아야 한다. 어쨌든 삼관은 글쓰기와 관련이 깊다. 소재가 없어 못 쓴다고 푸념할 일이 아니다. 경험이 없다고 핑계 댈 일이 아니다. 보지 못한 나를 탓해야 한다.

나는 해외여행을 가면 그 지역 미술관을 둘러보는 걸 즐긴다. 아내는 지루해하는 편이다. 나도 처음엔 그랬다. 처음에는 누가 그렸는지, 제목이 뭔지, 무슨 내용인지 정도만 궁금했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작가에 관심을 갖게 됐다. 어느 시대, 어떤 배경에서 이 그림이 탄생하게 됐는지 눈길이 갔다. 그림에 담긴 이야기도 알고 싶어졌다. 시기별 화풍과 작가의 기법에 관해 공부하고 싶어졌다. 400여 년 전 사람 카라바조의 그림을 보면 그 시대로 돌아가 내 안의 악마적 속성을 목도한다. 


관찰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든가. 대학을 졸업하고 '유공'이란 회사에 원서를 냈다. 당시 주유소를 가장 많이 가진 정유회사였다. 원서를 내기 전까지는 그 회사가 있다는 것만 아는 정도였다. 차도 없고 면허증도 없으니 당연했다. 그러나 원서를 접수하고 나니 새로운 세상이 내 앞에 펼쳐졌다. 면접을 보고 그 회사 문을 나서는 순간, 온 세상이 유공 천지였다. 사거리마다 보이는 것은 온통 유공 주유소였다. 그전까지 한 번도 눈여겨본 적 없는 유공 간판만 눈에 들어왔다. 컬러 배스 효과(color bath effect)다. 한 가지 색깔에 집중하면 그 색을 가진 물건만 눈에 띄는 현상이다. 무엇인가를 의식하면 그것만 눈에 보이게 마련이다. 관심이 생기니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세계가 있다. 수천, 수만 개의 세계가 있다. 편의점, 커피숍, 제과점, 헬스클럽, 택시 운전, 등산, 바둑, 골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계가 있다. 직업의 세계도 있고, 취미의 세계도 있고, 정치·경제·문화의 세계도 있다. ​

나는 오십 년 가까이 기껏해야 대여섯 개의 세계만을 경험했다. 증권업계, 홍보업무, 청와대, 재벌기업, 출판계, 글쓰기에 발을 디뎌보고 맛을 본 정도가 고작이다. 모든 세계에는 저마다의 우주가 있다. 밖에서 보면 알 수 없는 그들만의 세계가 있다. 그 안에 들어가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엄청난 사실과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세계는 존재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건강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 그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무한한 세계가 펼쳐진다. 건강이라는 한 가지 주제만으로도 수십, 수백 개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 독서의 세계만 해도 얼마나 오묘한가. 평생을 파헤쳐도 시간이 모자란다.

일생을 살면서 우리는 몇 개의 세계를 경험하고 떠나는가. 아니, 그런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기라도 하고 떠나는가. 얼마나 많은 미지의 세계를 남겨두고 떠나는가. 글감이 없다는 소리는 응석에 불과하다. 관심만 가지면 된다. 수도 없이 많은 이야기가 이곳저곳에서 기다리고 있다. 자기를 들여다봐달라고 손짓하고 있다. 관심의 지경(地境)만 넓히면 된다.

경험하지 않은 세계를 아는 길은 관찰뿐이다. 관찰은 고유한 느낌과 독창적인 생각을 만드는 출발점이다. 글을 쓰려면 관심을 갖고 들여다봐야 한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예사롭게 넘기지 않고 면밀하게 봐야 한다. 내 일이라고 생각하고 유심히 봐야 한다. 호기심과 의문, 문제의식을 가지고 봐야 한다. 남들의 말에 현혹되지 않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책이건 뉴스건 사물이건 사람이건 말이다. 들여다보면 볼수록 더 궁금해지고, 파면 팔수록 더 깊이가 느껴지는 또 다른 세상이 있다.

관찰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들여다본 지점까지만 내 세상이다. 그 밖은 없는 세상이다. 없는 세상에 관한 내 생각은 존재하지 않는다. 보는 것만 실재하는 세계이고, 글쓰기의 대상이 된다. 관찰한 만큼 보이고, 보인 만큼 쓸 수 있다.

어떤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반응은 다르다

관찰에도 단계가 있다. 1단계는 눈에 보이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 글로 옮겨보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이른바 묘사다. 일화나 에피소드와 같은 과거 경험에만 의존하면 금세 밑천이 바닥난다. 겪은 일은 한정돼 있기 때문이다. 이를 극복하고 돌파하는 방법은 현재에 집중하는 것이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에서 소재를 찾아낸다. 이런 소재는 일상의 관찰에서 나온다.

2단계는 느낌을 말하는 단계다. 감상을 쓰는 것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강요받아왔다. 각종 기념일 글짓기 대회 때마다 느낀 점을 쓰라 했다. 느낌이 없어도 써야 했다. 일기나 독후감 역시 마무리는 감상이었다. 그러다 진짜 느낌을 쓰는 게 무엇인지 김택근 시인이 쓴 <기적은 기적처럼 오지 않는다>를 읽고 알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어록에 주석을 단 이 책을 읽으면서 '관조란 이런 것이구나'를 깨달았다.

관조는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만든 것을 보는 것이다. 관찰하고 감상하는 것이다. 김대중의 말을 김택근은 관조한다. 김대중이 만든 것을 김택근이 보는 것이다. 그리고 주석을 단다. 그런데 주석이 주옥같다. 창조만이 대단한 것이 아니다. 관찰하고 주석을 다는 것도 위대한 일이다. 누군가 써놓은 글에 한마디를 달아보자.

3단계는 분석적으로 관찰하는 단계다. 나름의 시각과 관점, 해석 그리고 해법을 쓴다. 회사에서 쓰는 보고서, 각종 칼럼이 여기에 해당한다.

4단계는 내 주관과 기준으로 시시비비를 가리고 비판하는 단계다. 삐딱하게 관찰하고 통념에 휘둘리지 않아야 한다. 비평, 논증 등을 할 때 활용한다. 논리적인 글에도 관찰이 필요하다. 학창시절에 배웠다. 귀납법은 구체적 사실로부터 일반적 사실을 끌어내는 것이고, 연역법은 일반적 사실로부터 구체적 사실을 끌어내는 것이다. 귀납법은 경험을 해석한다. 연역법은 원리를 증명한다. 귀납법은 관찰과 성실함이 필요하다. 연역법은 추론과 참신함이 필요하다. 나이 든 세대가 귀납법에 강한 반면, 젊은 세대는 연역법에 강하다. 나는 귀납법이 편하다. 그래서 꼼꼼하게 본다.

5단계는 나를 보는 것이다. 양심과 정의감은 여기서 나온다. 나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양심이 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을 사랑한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정의로운 사회를 꿈꾸고 이를 위해 행동한다.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글을 쓴다. 

마지막은 없던 세계를 창조하는 단계다. 보이는 것 그 너머를 보는 것이다. 시나 소설 같은 문학에 필요한 눈이다. 글을 쓰는 데는 네 개의 눈이 필요하다. 육안(肉眼)은 사물을 본다. 지안(智眼)은 생각을 본다. 심안(心眼)은 느낌을 본다. 영안(靈眼)은 너머를 본다.

동물원에서 같은 원숭이를 봐도 어떤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반응은 다르다. 육안은 단지 구경한다. 지안은 학교에서 배운 진화론을 떠올린다. 심안은 갇힌 원숭이를 불쌍하게 여긴다. 영안은 원숭이가 지배하는 사회를 상상한다. 시인 장석주는 '대추 한 알'이란 시에서 대추를 이렇게 바라보았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글쓰기에 필요한 여섯 번째 눈으로 대추를 본 것이다.

제자는 큰 깨우침을 얻었다

어떻게 보는가도 중요하다. 같은 환경에서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보는 사람이 있으며, 보는 사람도 제각기 다르게 보기 때문이다. 기본은 저 안에 글감이 있다고 확신하며 보는 것이다. 사랑스럽게 애지중지하며 봐야 한다. 그러면 보인다. 반대로, 거리를 두고 볼 수도 있다. 눈에서 힘을 빼고, 뭔가를 찾으려는 욕심을 버리고 본다. 처음 본 것처럼 낯설게 본다. 휑한 눈빛으로 멍하게 관조한다. 그래도 보인다.

본 것에서 다른 무언가를 유추하고 연상해본다. 은유와 직유, 알레고리는 여기서 나온다. '이것은 무엇'이라고 의미 부여하면서 본다. 다시 말해 개념과 관점을 갖고 본다. 이 밖에도 보는 방법은 다양하다. 파고들기, 되새기기, 크게 보기, 꼬리 물기, 합해보기, 넓혀보기, 맺어보기, 톺아보기, 나눠보기, 견줘보기, 해보기 등이다.

<보바리 부인>을 쓴 귀스타브 플로베르에게 제자가 있었다. 몇 달이 지나도록 플로베르에게 배우는 게 없자, 제자가 불만을 토로했다. "제가 소설을 배우기 위해 선생님 댁 계단을 수천 번 오르내렸지만, 선생님은 아무런 가르침도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플로베르가 물었다. "알겠네. 그럼 자네, 우리 집 계단이 몇 개인지는 알고 있나?" 제자는 큰 깨우침을 얻었다. 그 제자가 바로 <여자의 일생>, <목걸이>를 쓴 기 드 모파상이다.
덧붙이는 글 필자 강원국은 청와대 연설비서관을 역임했으며 2014년 <대통령의 글쓰기> <회장님의 글쓰기>를 출간한 이후 글쓰기 관련 강연과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강원국의 글쓰기'는 3월 26일부터 매주 월·수·금 <오마이뉴스>에 연재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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