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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8.04.09 09:04수정 2018.04.09 09:04
돌아보니 권투선수처럼 살았다. 청와대와 회사 재직 시절 모두 하루하루가 그랬다. 글을 쓰다 보면 녹다운 직전까지 간다. 이리저리 피해 봤지만 그때마다 여지없이 난타당했고 곧 쓰러질 것 같았다. 몸이 너덜너덜해진다. 만신창이가 됐다. 흰 수건을 던지며 소리 지르고 싶었다. "항복!" 그럴 때마다 희한하게도 '종'이 울렸고, 코피를 흘리며 코너로 돌아갔다. 하룻밤 몸을 추스르고 정신을 차렸다. 상처에 연고를 바르고 다음 날 또 링에 올랐다. 글쎄, 지금도 다르지 않다. 오늘도 책 쓰기 링에 오른다. 시작 종소리에 맞춰 습관적·반사적으로 출정한다.

나는 요즘 글 쓸 때마다 평소에 사용하지 않는 안경을 쓴다.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이 완전군장 하듯 안경을 낀다. 왠지 마음이 편안해지고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어쩌다 그 안경을 집에 두고 온 날은 안절부절못한다. 글쓰기에 집중이 안 된다. 그날은 공친 날이다. 이제 안경 쓰는 일이 글쓰기 전 의식이 됐다. 일종의 루틴이다. 루틴은 특정한 직업을 실행하기 위한 일련의 명령, 혹은 규칙적으로 하는 일의 통상적인 순서와 방법을 뜻한다.

강원국의 글쓰기 7편 ⓒ 고정미


이런 루틴은 운동선수들이 자주 활용한다. 수영선수 박태환은 몸과 마음의 컨디션을 최상으로 유지하기 위해 물에 뛰어들기 전 음악을 듣는다.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는 퍼팅하기 전에 웅크리고 앉아 공의 속도와 커브를 계산한다. 야구선수가 타석에 나서기 전에 방망이를 휘두르는 것, 농구선수가 자유투를 던지기 전에 공을 몇 번 튀기는 것도 루틴이다. 방망이를 휘두르고 공을 튀기는 횟수가 선수마다 일정하게 정해져 있다.

루틴은 운동선수만 쓰는 것이 아니다. 시험을 앞둔 학생이 책상을 정리하고 계획표를 짠 후 머릿속으로 '나는 잘할 수 있어'를 세 번 외치고,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리며 긴장을 해소하고 집중력을 높인다면 이 또한 루틴이다.

글 쓰는 습관을 들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으면 나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 하나는 반복이고, 다른 하나는 의식이다. 일정한 장소, 시간에 반복적으로 글쓰기를 시도해야 하고, 시도하기 전에 의식을 치러야 한다. 직업적으로 글 쓰는 대부분의 작가는 그렇게 한다고 들었다. 글을 쓰는 시간대가 있고, 글을 쓰기 전에 나름의 의식을 치른다.

글쓰기 전에 정장으로 갈아입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필기구를 가지런히 정돈하는 사람도 있다. 특정 장소에 가야 글이 잘 써진다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아침 신문을 읽고, 또 어떤 사람은 산책한 후 글을 쓴다. 음악을 들어야 글이 써지는 사람도 있고, 담배가 글동무인 사람도 있다. 외국 작가 중에는 관에 들어갔다 나오는 사람도 있고, 옷을 모두 벗고 써야 글이 써진다는 사람도 있다. 루틴은 자신만의 고독한 싸움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한 안간힘이다. 글 쓰는 어려움을 달래는 스스로의 위로이자 고무 의식이다.

3주 동안만 되풀이하면 뇌가 도와준다

학교 다닐 적에는 늘 공부가 싫었다. 방안을 뒹굴뒹굴하면서 '공부해야 하는데' 걱정한다. 점점 더 불안하고 괴롭다. 그 괴로움이 책상에 앉아 공부하는 괴로움보다 커지는 순간이 온다. 그때 벌떡 일어서 책상에 앉는다.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진다. 공부하는 것이 생각만큼 괴롭지 않다.

2014년 <대통령의 글쓰기>를 집필할 때다. 글이 써지지 않았다. 20여 일을 허송했다. 어느 날부터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글이 써졌다. 나중에 알고 보니 습관의 힘이었다. 글이 안 써지는 20여 일 동안 뇌가 글쓰기를 거부하고 저항했다. 그럼에도 나는 시도했다. 매일 아침 일어나 산책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카페에 들러 커피를 샀다. 그리고 집에 와서 샤워하고 거실 한구석에 있는 앉은뱅이책상에 앉아 글을 썼다. 이를 반복했다. 글이 써지지 않을 때에도 되풀이했다.

이렇게 일정 기간 되풀이하니 산책을 시작하면 뇌가 이제 글을 쓰려나 보다 생각한다. 그래도 쓰지 않기를 기대한다.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 커피를 사면 잠깐 고민한다. '이전 같이 버틸까? 버티는 것도 만만찮게 힘들었는데? 언제까지 이렇게 싸워야 하지? 이 사람은 계속 이럴 것 같은데? 내가 언제까지 이래야 하나. 아, 너무 힘들다.' 그리고 이내 체념한다. '차라리 도와주고 끝내자. 그게 편하겠어.' 머리를 감거나 샤워를 하면 뇌가 생각을 마구 던져준다. '이런 내용 어때요? 이것 한번 써보세요.' 빨리 끝내고 싶은 거다. 책상에 앉으면 술술 써진다.  

뇌는 글쓰기를 반기지 않는다. 아군과 적군을 구분하고, 싸워서 이길 대상과 도망가야 할 대상을 알아차리는 게 우선 관심사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뇌에게 글은 적군이요, 글쓰기는 도망쳐야 할 대상이다. 그래서 글을 쓰려고 마음먹으면 쓰기 싫은, 쓰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서너 가지 등장한다. 마감이 아직 이틀 남았다든가, 어제 술을 많이 마셨으니 오늘은 글쓰기에 적절하지 않다든가 하는 것은 뇌의 작용이다.

그럼에도 지속적으로 시도하면 '내가 언제까지 이래야 되나' 생각한다. 어느 순간이 되면 거부하는 것도 힘들다. 이쯤 되면 도와주고 끝내자고 마음먹는다. 글쓰기에 필요한 생각을 길어 올려준다. 저항하는 뇌가 도와주는 뇌가 된다. 여기에 걸리는 시간은 대개 20여 일이라고 한다. 3주 동안만 같은 시간, 같은 장소, 같은 환경에서 글쓰기를 되풀이하면 뇌가 도와준다. 나아가 60일이 넘으면 습관이 굳어지고, 습관대로 하지 않으면 부자연스럽고 불편해진다. 매일 조깅하는 사람이 하지 않으면 몸이 뻐근한 것 같은 상태가 되는 것과 같다.   

글쓰기는 습관이다. 습관을 들이면 글쓰기가 편하다. 습관은 무의식이 만든다. 내 무의식에는 술 먹는 습관이 내장되어 있다. 평소 술을 꾸준히 마셔온 결과다. 습관은 강력한 유혹이다. 술 마시고 싶은 생각이 들면 그것을 피할 수 없다. 다른 선택을 하지 않는다. TV에 술 먹는 장면만 나와도 술이 당긴다. 만약 이런 습관이 글쓰기로 옮겨오면 어떻게 될까. 글 쓰는 일이 얼마나 즐거울까.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무의식적으로 글을 쓰고 있지 않을까.

의지는 습관에 항복한다. 의지는 의식의 산물이다. 의식은 잠깐 마음먹은 일이지만, 무의식은 자기 나이만큼의 세월이 켜켜이 쌓인 것이다. 그만큼 무의식은 강력하다. 무의식은 항상 의식을 이긴다. 글을 써보자고 의지를 다져도 쓰기 싫다는, 쓰지 말라는 무의식이 작동하면 쓰지 못한다. 쓰지 않아야 할 핑계, 쓰지 못하는 이유를 찾게 된다.

무의식에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을 장착해야 한다. 어떻게 할 수 있을까. 하기 쉬운 일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하기 쉬운 일을 하는 이유는 무의식의 저항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쉬운 일을 하면 무의식이 발호할 명분과 틈이 없다. 나에게는 메모가 쉬운 일에 해당한다. 수시로 메모한다.

쉬운 일은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무엇이건 상관없다. 글쓰기와 관련된, 자신에게 맞는 쉬운 일을 먼저 찾는다. 그리고 되풀이한다. 쉬운 일과 반복이 만나면 습관이 만들어진다. 반복과 함께 목표, 테마, 장소, 시간도 정해놓는 것이 바람직하다. 나는 하루 3줄 이상 쓰는 게 목표다. 테마는 '글쓰기'이며 말하기, 소통, 리더십으로 범위가 넓혀지기도 한다. 장소는 주로 카페다. 시간은 강의 시작하기 한두 시간 전이다. 강의 장소에 일찍 가서 근처 카페에서 쓴다. 

트랙 위를 달리는 것이 글쓰기다

직장에서도 습관의 힘으로 보고서를 쓸 수 있다. 남들에게 방해받지 않는 시간대를 정해 그 시간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글을 쓴다. 쓰기 전에 하기 쉬운 일 한 가지를 한다. 예를 들면 칼럼을 한 편 읽는다든가. 두 가지면 더욱 좋다. 커피를 마시면서 신문을 읽는 것으로 이제부터 글을 쓸 것이라는 신호를 뇌에 보내준다. 그리고 30분간 글을 쓴다. 이 일을 반복한다. 그러면 쓰기 싫은 글을 뇌가 쓴다. 보상을 해주면 더욱 좋다. 쓰고 난 후에 자신만의 방식으로 '고생했어, 잘했다. 고마워' 뇌를 격려해준다. 축구선수가 골을 넣은 후 세리머니하는 것처럼.

글을 쓰려면, 쓰고 싶은 '동기'가 있어야 한다. 이런 '동기'는 '계기'가 만든다. 좋은 문장을 접하거나 글쓰기 책을 읽은 것이 계기가 될 수도 있고, 글을 못 쓴다고 상사에게 호되게 혼난 것도 계기가 될 수 있다. 계기가 주어져 시작했으면 '유지'해야 한다. 유지하려면 습관이 필요하다. 유지의 결과물은 '보상'이다. 오래 하다 보면 어떤 식으로든 결과물이 나오고, 이것은 보상이 된다. 보상은 다시 쓸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한다. 나는 동기-계기-유지-보상-동기가 글쓰기 트랙이라고 생각한다. 그 트랙 위를 달리는 것이 글쓰기다. 이런 트랙을 만드는 핵심이 습관이다.

습관은 글쓰기를 대하는 태도도 바꾼다. 태도는 세 가지 측면이 있다. 글쓰기를 쉽거나 어렵게 생각하는 역량 측면이 그 첫 번째이고, 글쓰기를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감정 측면이 두 번째이며, 글쓰기를 반기거나 기피하는 행동 측면이 세 번째이다. 글쓰기 습관을 들이면 이 세 가지 모두가 변한다. 매일 쓰니까 어렵지 않다. 가끔 쓰는 게 어렵다. 매일 쓰니까 글쓰기가 익숙하다. 우리는 익숙한 것을 좋아한다. 매일 쓰면 반기기까진 않더라도 기피하지도 않는다. 기피하는 게 더 힘들기 때문이다. 

명가수도 집에서 노래 부를 때는 그저 평범하다. 문인들이 지인과 카톡하는 글을 보면 우리네와 다를 바 없다. 노래나 글뿐만 아니다. 한번은 에베레스트산 정상을 오른 등반가와 관악산을 오른 적이 있는데, 그도 헉헉거리기는 마찬가지였다.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는 크지 않다. 미세한 차이다. 그 차이를 만드는 것은 습관이다. 프로는 글을 쓸 때 아리송한 단어가 나오면 사전을 찾아보는 습관, 새로운 생각이 나거나 좋은 문장을 만나면 메모하는 습관, 사람이나 사물을 볼 때 유심히 관찰하는 습관이 있고 아마추어는 그것이 없다. 프로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글을 쓰는 습관이 있고, 아마추어는 없다.

오래된 영화지만 줄리아 로버츠가 나온 스릴러물 <펠리컨 브리프>를 본 사람이 있을 것이다. 원작자인 존 그리샴이 발표하는 작품마다 베스트셀러를 기록하는 흥행 보증수표가 된 비결이 하나 있다. 하루 한 쪽 소설 쓰기를 거르지 않았다는 것. 소설가 김훈은 '일필오'로 유명하다. 하늘이 두 쪽 나도 1일 필히 원고지 5매는 쓴다는 규율을 스스로 정해놓고 지킨다고 한다. 일본의 무라카미 하루키 역시 하루 5시간 쓰기를 습관화하고 있다. 우리도 이렇게 하면 김훈이나 하루키만큼 못 쓸까.

글 잘 쓰는 비결을 말하라면 나는 '3습'을 얘기한다. 학습, 연습, 습관이다. 그중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코 습관이다. 단순 무식하게 반복하고 지속하는 것이다. 글쓰기 트랙 위에 자신을 올려놓고 글쓰기를 일상의 일부로, 습관으로 만드는 것이다. 밑 빠진 독에서도 콩나물은 자란다.
덧붙이는 글 필자 강원국은 청와대 연설비서관을 역임했으며 2014년 <대통령의 글쓰기> <회장님의 글쓰기>를 출간한 이후 글쓰기 관련 강연과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강원국의 글쓰기'는 3월 26일부터 매주 월·수·금 <오마이뉴스>에 연재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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