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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8.04.06 09:24수정 2018.04.06 14:36
군 시절 내무반 고참 서넛은 취침 소등 후에 당직사관의 눈을 피해 라면을 끓여 먹었다. 물론 그들은 먹기만 했다. 나는 국물 맛이라도 볼지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라면 끓이기를 자청했다. 전열 기구 사용이 금지돼 있던 터라 들키면 외박 금지 정도는 불사해야 했지만 라면을 끓여 갖다 바쳤다. 설거지를 명분으로 주변을 서성거리는데 고참이 부른다. "야, 강 일병 이리 와봐." 드디어 올 게 왔구나. 나도 한 젓가락 할 수 있겠구나 싶어 한걸음에 달려갔다. 그런데 다짜고짜 머리를 박으란다. "대가리 박고 앞으로 전진! 넌 살인미수야." 깜깜한 내무반에서 라면을 끓이느라 스프 봉지 쪼가리가 라면에 들어갔나 보다.


일명 원산폭격이라는 얼차려를 받고 있는 데도 웃음이 났다. 머리를 박으라고 하는 고참이나 라면을 탐하다가 머리를 박고 있는 나나 웃기기는 마찬가지였다. 그 사건은 재밌는 추억이 되어 지금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웃음을 자아낸다.

재미는 글의 첫 번째 요건이다. 2013년 출판사에 갔을 때 사장님의 특명(?)이 떨어졌다. 페이스북을 하라는 것이었다. 자신이 편집한 책을 홍보하기 위해서다. 처음에는 지하철로 출퇴근하며 일어난 일이나 느낌을 썼다. 호응이 시원찮았다. 재미가 없다는 게 이유였다. 그래서 아내에게 혼나는 이야기로 전환했다. 술 마신 다음 날 아침, 아내의 불호령에 혼비백산해서 회사에 출근해보니 서로 다른 신을 한 짝씩 신고 출근했더라는 이야기부터, 어느 날 아내가 보내온 문자, "너 오늘 혼날 일 있으니 일찍 들어와라"는 메시지를 받고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든다는 얘기까지 나의 일상을 올렸다.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회사에서, 그리고 청와대에서 글을 쓸 때 재미있다고 느껴본 적이 없다. 글을 쓰기 싫은 이유는 수십 가지 댈 수 있었지만, 써야 하는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 '써야 한다'는 것. 써야 하기 때문에 썼다. 주변에서 글쓰기가 재미있다는 사람을 보면 쥐어박고 싶었다. 글쓰기가 재미없으니 재밌는 글도 쓰지 못했다.  

재미있는 글을 쓰려면 우선, 글 쓰는 사람이 즐거워야 한다. 내가 찾은 방법이 있다. 글과 함께 노는 것이다. 그러려면 매일 써야 한다. 그것이 첫 번째 조건이다. 학창시절을 생각해보면 공부할 때가 가장 마음 편했다. 수업 빼먹고 연소자 관람 불가 영화를 보고 다시 햇빛 아래 섰을 때 얼마나 안도했던가. 궤도를 이탈해 우주를 유영하다 지구에 안착한 기분. 글도 쓰기 전보다는 쓰고 있을 때가 편안하다. 책상에 앉기 전 아랫목에서 뒤척일 때가 더 힘든 법. 마치 겨울 바다에 뛰어들까 말까 해변을 서성일 때처럼. 막상 물에 들어가면 안온하다. 일상적으로 쓰지 않는 사람은 늘 글쓰기 전 상태이고 글쓰기가 항상 힘들다.

매일 쓰기 위해서는 글의 성장을 도모해야 한다. 고등학교 때 육체미 도장에 다녔다(당시엔 헬스클럽을 그렇게 불렀다). 매일 역기를 들었다. 무게를 조금씩 늘려갔다. 하루하루 가슴둘레를 쟀다. 역기 무게와 가슴둘레 수치가 그 힘든 일을 지속하게 만들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친구들과 축대에서 뛰어내리며 놀았다. 조금씩 더 높은 곳에 올라가 뛰었다. 스릴 만점에다 성취감도 쏠쏠했다. 위험한 놀이를 즐길 수 있었던 것은 조금씩 높아지는 높이였다.

꾸준히 쓰면 내가 쓴 글의 숫자가 늘어난다. 또한 이전에 쓴 글을 보면서 실력이 올라가는 것을 확인한다. 내가 블로그에 2년 전 쓴 글을 보면 마치 중학생이 쓴 것처럼 느껴진다. 그사이 질적으로 그만큼 성장한 것이다.

이쯤 되면 독일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말한 ​노동(labor)의 수준을 뛰어넘는다. 남이 시켜서, 먹고살기 위해 하는 노동이 아니다. 글쓰기 작업(work)이다. 나의 재능을 발휘하고 보람과 재미를 느끼는 창조 활동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면 재미가 덜하다. 행위(action)로 발전해나가야 한다. 행위는 개인을 넘어 공동체 안에서 타인과 소통을 나누며 공적 가치를 실현하려는 활동이다. 나는 글 쓰는 일로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작은 보탬이라도 되겠다는 생각으로 블로그와 홈페이지에 글쓰기에 관한 글을 쓴다. 이렇게 나의 글쓰기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다.

글 자체가 재미있어야 글쓰기가 재밌다


글과 놀다 보니 재미도 있다. ▲첫 문장이 생각났을 때, ▲자다가 꿈에서 글의 실마리를 찾았을 때, ▲이걸 정녕 내가 생각한 것인가 싶을 정도로 좋은 비유가 떠올랐을 때, ▲글 쓰다 재밌는 일이 생각 나 혼자 피식 웃을 때, ▲글을 쓰다 몰랐던 뜻과 지식을 알게 됐을 때, ▲이전에 쓰지 않던 단어를 내 글에서 구사할 때 ▲장님 문고리 잡듯이 더듬거리다 마무리가 잘됐을 때, ▲내가 쓴 글이 크건 작건 변화를 일으키고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쳤을 때 등. 나는 이런 때 끝도 없는 글쓰기 사막에서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을 만난다.

이뿐만 아니다. 요즘에는 무엇을 쓸까 생각하는 시간을 즐긴다. 어떻게 끝이 날지 모른 채 암중모색하는 상황을 즐긴다. 다 쓰고 나서 한 글자 한 글자 고치는 재미를 즐긴다. 쓴 글을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설렘과 흥분을 즐긴다.

뭐니 뭐니 해도 내가 쓰는 글 자체가 재미있어야 글쓰기가 재밌다. 그렇다면 재미있는 글은 어떤 글인가. 단지 웃기는 글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무서운 영화, 스릴 넘치는 영화, 심지어 슬픈 영화를 보고도 재미있다고 한다. 할머니가 들려주신 옛날이야기를 생각해보면 재미 요소는 네 가지다.

첫째, 교훈이 있다. 주제 의식이 분명하고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다. 깨달음은 짜릿한 재미를 안겨준다. 

둘째, 갈등이 있다. 싸움 구경이 재밌듯 대립과 갈등, 긴장은 재밌는 이야기의 기본이다. 혼자 하는 갈등과 적대자와의 갈등이 있다. 혼자 하는 갈등은 할까 말까,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망설인다. 보수와 진보, 이상과 현실, 변화와 안정, 명분과 실리 사이에서 고민하고 방황한다. 적대자와의 갈등은 주인공을 괴롭히는 사람이나 주인공이 미워하는 사람과의 대립이 있고, 선악의 대결도 있다. 정의와 불의, 아군과 적군, 가해자와 피해자, 도망자와 추격자가 맞선다. 갈등의 씨앗이 복선으로 깔린다. 갈등은 갈수록 증폭된다. 어느 지점에서 파국 직전의 위기를 맞는다. 그리고 극적인 반전이 있다. 악인이 선해지고 선인이 악해진다.  

셋째, 시련이 있다. 바닥까지 내려갔다 올라온다. 실패와 좌절은 처절할수록 좋다. 독자는 이런 이야기에 솔깃한다. 아니 눈길이라도 보낸다. 극복 과정은 맵고 쓰고 짤수록 좋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극복의 노하우다. 노하우가 없으면 앙꼬 없는 찐빵이다. 독자는 여기서 자기 문제의 해법을 찾는다. 희망과 자신감을 얻는다. 단, 조심할 게 있다. 가르치려고 해선 안 된다. 자기 스스로 우쭐하지도 말아야 한다. 과정을 담담하게 서술하기만 해야 한다. 

넷째, 행복한 결말이다. 화해나 응징, 문제 해결을 통해 갈등이 말끔히 해소된다. 그렇지 않으면 찜찜해 한다. 주인공이 성공하면 독자는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실패하더라도 각성의 계기가 된다.  

나는 가벼운 사람이 되기로 작정했다

재밌는 글은 어떻게 쓸 수 있는가. 감각이 중요하다. 어느 글이 먹히는지, 어느 부분에서 독자가 재밌어할지 아는 감각이다. 같은 소재로 글을 써도 이런 감각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글은 차이가 크다. 그것은 마치 같은 영화를 보고 나와도 줄거리를 재밌게 말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다. 어떻게 해야 이런 센스를 키울 수 있을까. 가장 효과적인 것은 대화다. 대화는 먹히는 말과 그렇지 않은 말을 수시로 판별해준다. 즉각적인 반응을 통해 먹히는 말을 골라내는 학습을 한다. 개그 프로그램이나 영화를 즐겨보는 것도 방법이다. 그렇게 익힌 감으로 쓰면 된다.

감각을 갖추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재미있는 제재를 머릿속에 많이 넣고 있어야 한다. <태백산맥>에는 '이념 대결'이란 제재가, <장발장>에는 '누명'이란 제재가 쓰였다. '신분 위장'이란 제재는 <왕자와 거지>, <춘향전>을 비롯해 이곳저곳에 자주 등장한다. 제재는 글의 기본 요소다. 재밌는 제재를 많이 갖고 있으면 재미있는 글을 쓴다. 
 
사랑이란 제재도 그냥 사랑이 아니라 짝사랑, 근친과의 사랑, 친구 애인과의 사랑 등을 생각해볼 수 있다. 제재 측면에서 보면 행복보다는 단연 불행이다. 불행은 이별, 패배, 이별, 가난, 소외, 실패, 병고, 죽음, 고독, 사고, 배반, 파산 등 다양하다. 행복은 단순하고 정상적이다. 정상적인 가족 관계, 육체적 건강, 물질적·정신적 여유를 갖춘 상태는 재미없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에 나오는 첫 문장처럼 행복한 모습은 비슷하지만 불행의 모습은 제각각이다. 비정상 상태인 불행이 풍부하고 재미있다. 물론 비정상 상태에만 머물러 있어서도 재미없다. 정상과 비정상을 넘나들어야 재밌다.

대학교수인 친구를 만났다. <대통령의 글쓰기>를 재밌게 읽었다면서, 자기는 재미있게 쓰지 못하겠단다. 나는 속으로 발끈했다. '재미있게 쓰지 못하는 게 무슨 자랑이라고.' 이 친구의 '재미있다'는 말에는 가볍다는 폄훼를 깔고 있다. 심하게 말하면 '웃기다' 정도로 깔보는 뜻이 담겨 있다. 억지 쓰는 게 아니다.

우리 사회에는 고상한 것, 고차원적인 건 지루할 수밖에 없고, 심지어 지루한 것이 수준 높은 것이라는 편견이 있다. 그런 분위기에서 유머나 조크는 재밌는 게 아니고 수준 낮은 게 되기 십상이다. 우리 사회 주류들이 근엄하기만 한 데서 기인한 측면이 크다. 그들은 스스로가 재밌지 않다. 재밌는 것을 배우지도 못했고, 재미를 누릴 여유도 없었으며, 애당초 재미를 발휘할 역량을 타고나지 못했다. 자신들이 잘하는 엄숙과 권위의 옷이 편하다. 당연히 그들에게 재미는 수준 낮은 것이고 깊이 없는 것이며, 질 높은 사람들은 추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학창 시절, 쉬는 시간이면 내 자리 주변은 친구들로 북적였다. 아마도 내 얘기가 재미있었나 보다. 그러나 나는 재밌는 사람인지 몰랐다. 국민의 정부 시절, 식목일 식수를 마치고 청와대 직원들과 버스 타고 오면서 내가 마이크를 잡고 한 시간 넘게 얘기했고, 사람들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밌어했지만 그때도 몰랐다. <김어준의 파파이스>라는 팟캐스트에 나가서도 나는 진지한데 사람들이 빵빵 터지는 걸 보고 어리둥절했다.

이제 예순을 향해가고 있지만 나는 가벼운 사람이 되기로 작정했다. 그러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앞으로 3년, 5년 후 얼마나 더 웃기는 사람이 되어 있을지, 얼마나 더 재밌는 글을 쓸 수 있을지 궁금하고 기대된다. 웃을 일 없는 세상에서 사람들이 내 글과 말로 웃을 수 있다면 그게 어딘가.
덧붙이는 글 필자 강원국은 청와대 연설비서관을 역임했으며 2014년 <대통령의 글쓰기> <회장님의 글쓰기>를 출간한 이후 글쓰기 관련 강연과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강원국의 글쓰기'는 3월 26일부터 매주 월·수·금 <오마이뉴스>에 연재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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