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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9.01.04 09:21수정 2019.01.04 11:44
제법 추운 음력 섣달 날씨가 이어졌다. 뭔가 뜨끈한 국물로 몸을 좀 녹였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술집 주인장이 혹시나 그런 수프를 끓여놓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감을 함께 안고 '1001 M.U.N'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주인장은 개수대 앞에서 솔로 뭔가 돌멩이 같은 것들을 열심히 쓱싹쓱싹 닦고 있다가 풍경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려 나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형님, 어서 오세요. 날씨가 많이 춥죠?"
"응, 정말 추운걸. 소한이 가까워서 그런가, 아주 귀 떨어져 나갈 것 같아."
"안쪽으로 앉으세요. 마침 멸칫국물에 매운 고추 좀 넣고 우려 놓은 게 있으니 국물 드시면서 몸 좀 녹이고 계세요."


그는 행주로 젖은 손을 닦고는 스프 그릇에 맑은 국물을 담고 잘게 썬 쪽파를 띄워 내게 내밀었다. 그릇째 들고 한 입 후루룩 마시자 잘 우러난 멸치와 다시마, 그리고 제법 매운 고추 향의 국물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면서 순식간에 얼었던 몸을 녹여주었다. 나는 연신 국물을 들이켰고, 작은 수프 그릇의 국물은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냈다. 그는 내게 '많이 추우셨나 보다'고 웃으면서 다시 국물을 채워줬고, 나는 이번에는 선비답게 숟가락으로 조금씩 떠먹으면서 그가 하고 있는 작업을 유심히 쳐다 보았다.

"그건 뭔가? 뭘 씻고 있나 보네?"
"예, 통영에서 올라온 굴이에요. 겉 껍데기에 남은 뻘이랑 해조류들 좀 살짝 닦아내고 찜을 하려구요. 형님도 굴 드시죠?"
"딱히 가리는 음식은 없네만…"
"그럼 잠깐만 국물 좀 더 드시고 계세요. 찜기에 김 올리고 있으니 금방 쪄질 거에요."


그는 남은 굴과 가리비들을 부지런히 닦고는 채반에 받혀 살짝 헹구었다. 그가 조리용 장갑을 벗자 추운 날씨에 차가운 물로 작업을 하느라 장갑을 끼고도 빨갛게 부풀어 오른손이 보였다. 그는 화구 위에 올려진 냄비를 잠깐 열어보더니 불을 중약불 정도로 줄였다. 이윽고 냄비의 뚜껑 위로 김이 오르기 시작했다. 뭔가 다른 것을 넣은 듯 김에서는 물이 아닌 술 냄새 비스름한 향이 났다. 나는 그의 작업 모습을 흥미 있게 바라보고 있었고, 그는 뚜껑을 열고 채반에 받혀 놓았던 굴과 가리비를 차곡차곡 쌓아 올린 후 다시 뚜껑을 닫았다.

"한 10분 정도만 찌면 되니까 금방 드실 수 있을 거예요."

주인장은 잠시만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타이머를 맞추더니, 와인 한 병을 들고 돌아왔다. 투명한 병에는 커다란 글씨로 'CHABLIS' 라고 적혀 있었다.

"와인인가?"
"예, 겨울철 굴에는 수학 공식처럼 따라붙는 환상의 짝꿍이죠. 프랑스 부르고뉴의 샤블리(Chablis) 마을에서 나오는 화이트 와인이에요. 와인 이름도 마을 이름을 따라 샤블리라고 부르죠."
"포도 이름도 샤블리인가?"
"하하, 아뇨. 포도는 샤도네이(Chardonnay)라는 청포도 품종인데요,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생산하고 많이 마시는 화이트 와인용 포도죠. 부르고뉴 지방에서는 레드와인은 피노누아(Pinot Noir), 화이트와인은 샤도네이 품종만 사용하는데요, 그래도 마을마다, 밭마다 토양 성분의 미묘한 차이 때문에 맛이 사뭇 다르죠."


그는 입으로는 설명을 하면서, 손으로는 자연스럽게 와인의 코르크마개를 열었다. 보관 온도가 차가웠던 듯, 그가 와인잔에 와인을 따르자 잔에 하얗게 김이 서렸다. 우리는 가볍게 잔을 부딪쳐 건배를 한 후 와인의 향을 맡아 보았다. 와인에서는 아주 희미하게 꽃향기 비슷한 향이 나긴 했지만 강렬하게 기억이 날 정도의 향은 아니었다. 입에 한 모금 머금고 주인장을 따라 씹듯이 돌리면서 맛을 보았는데, 아주 묘한 쇠의 맛이 났다. 그 뒤로 새콤한 맛이 이어졌는데, 여운이 길거나 입안에서 깊은 풍미를 느낄 수는 없었다.

잔을 들어 와인의 색을 보니 볏짚 같은 색이었는데 딱히 멋지다거나 예쁘다고 감탄할 만한 색은 아니었다. 전체적으로 주인장이 이전에 내게 맛 보여줬던 와인들에 비해 맛있다거나 훌륭하다고 할 만한 점을 찾기 어려워서 슬쩍 그의 눈치를 살폈는데, 그는 그런 와인 맛도 꽤 즐겁게 음미하고 있었다.

"온도가 조금 차긴 한데 생굴이 아니라 찜으로 먹는 거니 이 정도 온도도 괜찮을 것 같네요. 형님 드시기엔 맛이 어때요?"
"흐흠…글쎄. 내가 아직 공부가 부족해서 뭐라고 딱 꼬집어 설명은 못하겠고, 맛이 썩 나쁘진 않은 것 같군."
"하하하, 그냥 솔직히 말씀해주셔도 괜찮아요. 과일향도 별로 없고, 맛은 시큼한데 별로 진하지는 않고, 어딘가 모르게 쇠나 돌 맛도 좀 나고 그렇죠?"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네. 돌이라니까 말이지만 예전에 곰방대로 담배 필 때 쓰던 부싯돌이 있었는데, 언젠가 그 부싯돌은 무슨 맛이 날까 궁금해서 핥아본 적이 있거든. 이 와인이 딱 그 부싯돌 맛이 나는구먼."


 

겨울철 굴에 가장 잘 어울리는 와인으로 꼽히는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의 화이트 와인 '샤블리(Chablis)'. 샤블리는 부르고뉴 북부의 작은 마을 이름이며, 이 마을에서 청포도 품종인 '샤도네이(Chardonnay)'로 담근 화이트 와인을 마을 이름을 따 샤블리라 부른다. ⓒ 이건수


그는 내 말을 듣다가 뭔가 놀랍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내가 혹시 잘못 표현했거나 너무 얼토당토않은 맛을 얘기해서 그가 어이 없어 하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들었다. 그런데 솔직히 그 와인에서는 진짜 '부싯돌' 맛이 났다!

"부싯돌 맛이라니 좀 터무니없긴 하지?"
"아뇨, 늘 형님의 미각에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긴 하지만, 오늘은 특히나 더하군요. 굴이 얼추 다 쪄졌으니 우선은 드시면서 얘기하시죠."


그가 설정해 놓은 시간이 끝났는지 조리대 한쪽 벽에 붙여놓은 타이머에서 '띠리릭 띠리릭'하는 요란한 경보음이 울렸고, 그는 타이머를 끈 후 화구의 불도 껐다. 뚜껑을 열자 비릿하면서도 달달한 향이 훅 밀려 올라왔다. 그는 내 앞에 언젠가 맛보여줬던 이탈리아산 올리브유 병과 앞접시, 조개 껍데기를 까고 속살을 꺼내는 데 쓸 작은 칼, 그리고 빈 껍데기를 버릴 통 등등을 올려놓고 냄비 안에서 잘 쪄져 껍데기 사이가 벌어진 굴이며 가리비들을 큼직한 접시에 산더미처럼 쌓아 올렸다.

"자, 형님, 이렇게 벌어진 틈에 칼을 끼워 넣고 살짝 벌리신 후에 위 껍데기는 버리시고, 아래 껍데기에 올리브유를 살짝 뿌려서 드세요. 굴을 드시고 그 맛이 입안에 남은 상태에서 아까 드신 와인을 다시 드셔 보시고요."

나는 시키는대로 껍데기를 벌리고 통통하게 쪄진 굴 속살에 올리브유를 살짝 뿌려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나는 원래 굴의 비린 맛을 썩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쪄진 굴은 정말 풍부한 맛이 났고, 비린 맛도 거의 없었다. 거기에 약간 매콤한 맛의 올리브유가 곁들여지자 풍미가 더 좋아져 입안에서는 온통 여름날 바닷가 파도 위에서 춤추는 바람과 햇살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순식간에 깐 굴 하나를 삼키고는 그를 따라 와인을 한 모금 마셔 본 순간,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밋밋하고 별 향도 없던 데다, 심지어 쇠와 부싯돌 맛까지 나던 와인이 굴의 맛과 합쳐지면서 놀라운 혼연일체의 풍미를 보여주고 있었다. 어느 것이 굴의 맛이고, 어느 것이 와인의 맛인지 구분이 되지 않은 정도였다. 그는 놀라는 내 표정을 보며 하하하 하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아까하고는 맛이 사뭇 다르지요?"
"정말 그렇군! 왜 그런 거지? 굴이랑 같이 먹어서 그런 건가?"
"예, 맞아요. 사실 샤블리는 샤도네이 품종으로 만든 화이트 와인들 중에서는 이제 그렇게 손꼽을 정도의 명품 와인은 아니에요. 오히려 형님이 처음 느끼셨던 것처럼 약하고 밍밍하다고 느끼기 쉬운데요. 일반적인 샤도네이 와인들이 풍미를 높이기 위해 오크통에 숙성시키면서 참나무 특유의 향에 바닐라의 달달한 향까지 복합적으로 나는 거에 비하면 그야말로 '빈약하고 평범한' 화이트 와인이죠.

그런데 이 샤블리가 굴과 만나면 아주 놀라운 마리아주(mariage, 영어의 marriage)를 보여 주거든요. 기억하시죠? 언젠가 말씀드린 술과 음식의 궁합이요. 사실 샤블리 마을의 포도밭은 석회질과 점토질 토양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런 포도밭을 파보면 지금도 화석화된 굴 껍데기가 가득하다고 해요. 예전에는 지금의 땅이 바다였다는 증거죠. 그렇게 화석화된 굴 껍데기로 가득한 땅에서 자란 포도들은 자연히 바다의 풍미를 그 속에 품게 되고, 그래서 그 안에 숨어있던 굴의 풍미가 실제 굴 요리를 만나면서 폭발하게 되는 거에요. 샤블리 마을에서 재배하는 샤도네이 포도들이 다른 곳보다 유독 쇠나 돌 맛이 강하게 느껴지는 것도 그런 토양의 영향 때문이라고 볼 수 있는 거죠."


나는 나도 모르게 허벅지를 치며 감탄을 했다. 우리는 다시 먹는 데 집중해서 순식간에 우리 앞에는 수북하게 굴 껍데기와 가리비 껍데기가 쌓여 갔다. 와인병도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고, 우리의 먹는 속도도 점차 느려졌다.
 

석회질 자갈로 덮인 샤블리 마을의 포도밭. 석회질과 점토질이 섞여 있고, 고대의 화석화된 굴껍질들로 이루어진 샤블리 마을의 토양은 포도 재배 시에 독특한 미네랄 풍미를 만들어 내고, 와인을 만들었을 때 굴과 가장 멋진 마리아주를 이루게 만들어 준다. ⓒ Bourgogne-wineblog.com


"아, 정말 맛있군. 굴을 이렇게 맛있게 먹어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네. 난 사실 생굴을 썩 좋아하는 편은 아니거든."
"하하하, 저도 그래요. 전 어렸을 적에 생굴은 그 특유의 식감과 향 때문에 못 먹었어요. 유일하게 먹었던 굴 요리는 어리굴젓인데, 이건 할아버지 덕분에 먹을 수 있었죠."
"조부 덕분에?"
"예. 할아버지께서도 꽤 미식가셨어요. 그래도 이런 서양식 요리야 아예 드실 기회도 없으셨지만요. 대신에 할아버지께선 밥과 반찬의 궁합을 꽤 중요시하셨죠. 예를 들어 가을에 갓 담근 어리굴젓을 드실 때는 늘 팥밥에 드셨어요."
"팥밥?"
"예. 지금 생각해보면 팥밥이 가지고 있는 달달하면서도 특유의 미네랄 맛이 마치 지금 이 굴찜에 샤블리 와인을 곁들인 것처럼 어리굴젓에 잘 어울렸던 것 같아요. 그런 날이면 팥밥 한 솥 지어 삼촌들까지 대식구가 오로지 어리굴젓과 팥밥만 먹곤 했죠."
"오, 그렇군. 난 늘 젓갈은 흰 쌀밥에만 먹어야 하는 줄 알았는데!"


그는 대답 대신 빙그레 웃으면서 앞에 수북이 쌓인 조개 껍데기들을 치웠다. 나는 배가 부르고 와인까지 마셔 알딸딸한 상태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아까 궁금했던 점이 떠올랐다.

"근데 아까 보니 굴을 찔 때 물로만 찐 게 아닌 것 같은데? 김 올리면서 줄곧 술냄새가 나던데…혹시 술을 섞어 찐 건가?"
"형님 코는 못 속이겠군요. 맞아요. 물 대신 샤도네이 와인으로 김을 올려 쪘습니다. 물보다 와인이나 술로 김을 올려 찌면 상대적으로 낮은 온도에서 증기가 발생하기 때문에 굴이 더 부드럽게 쪄지거든요. 술 향기가 배면서 굴의 풍미도 자연스럽게 더 좋아지고요. 사람마다 취향이 있겠지만 식감이나 향 때문에 생굴을 잘 못 먹는 사람도 이렇게 술 찜으로 하면 대부분 잘 먹더군요. 거기에 올리브유를 살짝 떨어뜨리면 질감과 향도 배가 돼서 와인과의 마리아주가 더 좋아지는 것 같아요. 물론 제 개인 의견입니다. 하하하"


그는 그릇들을 다 치운 후 아까 처음에 내게 줬던 멸칫국물에 국수를 말아 내줬다. 굴과 와인으로 배가 터질 지경이었지만 시원하고 얼큰한 국물에 만 국수는 또 다른 별미였다. 결국 국수까지 한 그릇을 다 비운 우리는 흘러내릴 것 같은 배를 부여잡고 숨을 몰아쉬었다. 주인장은 소화에 도움이 될 거라며 잘 우려낸 생강차를 한 잔 내줬다. 질 좋은 생강을 말린 것인 듯 차의 향은 너무 맵거나 자극적이지 않고 적당한 맛으로 입안을 개운하게 해줬다.

배가 부르니 그제야 아까는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와인병의 라벨을 가리키며 그에게 물었다.

"아까 샤블리는 마을 이름이라고 했지? 그럼 와인을 만든 사람은 누구인건가? 이 밑에 써있는 이…루이스 자도트(Louis Jadot)? 이 사람이 만든 건가?"
"하하, 그건 프랑스식으로 루이 자도라고 읽은 거고요, 말씀하신 것처럼 그 집에서 만든 게 맞습니다. 루이 자도는 1859년부터 무려 5세대에 걸쳐 부르고뉴에서 와인을 만들고 유통시켜 온 집안이에요. 그런데 이 집안은 특이하게도 농사를 직접 짓지는 않고 오로지 양조와 유통만 담당했죠. 포도는 일반 농가에서 재배한 포도를 사들였구요. 이렇게 직접 농사를 짓지는 않고, 유통과 판매만 담당하는 사람들, 또는 회사들을 네고시앙(Negociant)이라고 불러요. 그렇다고 해도 농사를 전혀 안 짓는 건 아니구요, 이 루이 자도 가문만 해도 자신들의 밭을 따로 갖고 있기도 하죠."
"그렇군. 이 사람 얼굴은 누군가? 이 사람이 루이 자도인가?"
"아뇨. 그건 서양의 술의 신인 박쿠스(Bacchus)에요. 루이 자도 본사 정문에 저 박쿠스의 두상이 붙어 있죠."
"하하하, 그렇군! 난 또 저 두상이 자기네 조상인가 했지 뭔가?"


우리는 아랫배에서 전해져 오는 따스한 술과 차 기운에 몸이 나른하게 풀려가는 것을 느끼며 유쾌하게 얘기들을 주고받았다. 밤이 깊어지면서 추위가 더 심해지는지 창문에 온통 김이 서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26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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