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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8.12.07 08:41수정 2018.12.07 08:41
어두워진 거리 위로 겨울비가 내리고 있었다. 빗물에서는 낮 동안 주위를 덮고 있던 먼지의 냄새가 났다. 오래된 담요에서 나는 것 같은 냄새. 쿰쿰하고 축축한, 습기에 얼룩진 책장을 넘길 때 나는 그런 냄새. 그 냄새를 맡고 있자니 커피 생각이 간절해졌다. 일리(illy) 커피 머신을 켜고 모노 아라비카의 에티오피아 원두 캡슐을 하나 넣었다.

잠시 후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예열이 끝났다는 파란 표시가 떴고, 나는 버튼을 눌러 아래 놓인 잔에 커피를 내렸다. 뜨거운 물을 받아 놓은 머그잔 위로 캬라멜 색의 크레마(crema, 에스프레소 커피 추출 시 발생하는 크림과 같은 거품층)가 덮이며 기분 좋은 커피향이 주변에 퍼졌다. 그 커피향이 마치 부적처럼 먼지와 곰팡이 냄새를 떨쳐주는 것 같았다.
 
다시 한 번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커피 추출이 끝났고, 나는 머그잔을 들어 코 아래 바싹 대고 커피향을 맡았다. 에티오피아 원두 특유의 약간 새콤한 붉은 베리류의 향이 기분 좋게 비강을 타고 흘러 들어왔다. 입에 커피 한 모금을 머금고 머그잔을 든 채로 테이블로 돌아와 읽던 책을 다시 펼쳐 들었다. 몇 번이고 읽었던 책이라 딱히 어디랄 것도 없이 책을 펼치자 눈에 익은 대사들이 책장에서 튀어 나올 듯이 다가왔다.
 
주님 : 그가 지금은 나를 뒤숭숭한 마음으로 섬기고 있지만 나는 그를 곧 맑게 갠 곳으로 인도하려고 한다. 마치 정원사가 초록으로 싹트는 어린 나무를 보면 이듬해에는 꽃이 피고 열매가 맺을 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
 
메피스토펠레스 : 무엇을 걸으시렵니까. 내기나 합시다. 그 자를 살짝 내 길로 끌어넣을 것을 당신이 허락만 해주시면, 그 자를 감쪽같이 빼돌려 당신을 배반시켜 보이겠습니다.
 
주님 : 그가 지상에 살고 있는 동안은 네가 무슨 짓을 해도 말리지 않겠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기 마련이니까.
 
메피스토펠레스 : 진정 고맙습니다. 나는 원래 죽은 놈과 상종하는 것은 딱 질색입니다. 나는 토실토실 살아 있는 붉은 뺨이 제일 좋습니다. 죽은 혼이 찾아오면 면회사절입니다. 내 방법은 고양이가 죽은 쥐를 상대하지 않는 거나 마찬가지라 할 수 있지요.
 
주님 : 좋다. 그러면 너에게 맡기겠다. 그 사람의 영혼을 삶의 근원에서 송두리째 뽑아 내어, 만일 네가 그를 붙잡을 수 있다면 너의 길로 그를 꾀어내 보아라. 그러나 결국 너는 수치스럽게 다시 내게 와 고백하게 되리라. 착한 사람은 비록 어두운 충동 속에서도 올바른 길을 잊지 않는다고.
 
메피스토펠레스 : 좋습니다.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습니다. 이번 도박에 질 염려는 털끝만큼도 없습니다. 내가 목적을 달성하는 경우에는 마음껏 승리의 개가를 부르게 해주십시오. 티끌을 그 자식에게 먹이겠습니다. 기꺼이. 마치 나의 아주머니뻘 되는 저 유명한 뱀처럼.
 
[신원문화사. 괴테 작, 김정진 역. 파우스트. 23~24쪽]
 
순간 어둠이 덮쳐왔다. 몇 번 비슷한 일을 겪고 난 뒤라 난 침착하게 그 순간을 맞았다. 흔들리는 빛과 함께 다시 주변이 밝아왔다.
 
그 곳은 온통 기하학적인 구조를 가진 목조 건물의 내부였다. 나는 20세기 초 유럽 농부의 차림으로 몇몇 다른 농부들과 함께 서 있었다. 우리 앞에는 짙은 눈썹과 깊숙한 눈동자를 가진 인물이 조용히 우리 얘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농부가 그에게 요즘 들어 토양이 너무 피폐해지고 양조용 포도가 제대로 자라지 않는다고 하소연을 했다.
 
"그러니까, 자네들 얘기인즉슨 왜 포도가 제대로 자라질 못하는지, 어떻게 하면 예전처럼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있는지 나한테 알려달라는 말인가?"
"예, 그렇습니다. 슈타이너 박사님."
"내가 평생 농사라고는 지어본 적이 없다는 건 알고들 있는가?"
"물론입죠, 슈타이너 박사님. 그래도 박사님이 훌륭한 학자라는 건 마을 사람들 모두 알고 있습죠. 박사님은 특히 하늘과 땅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에 관심이 많으시다고 얘기들 합니다요. 농사도 결국은 하늘과 땅의 일 아니겠습니까요. 부디 무지한 저희들에게 길을 알려주십시오."
 

촌장인 듯 보이는 농부가 그에게 머리를 조아리자 다들 그를 따라 열심히 머리를 조아렸다. 슈타이너 박사라고 불린 그는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우리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물론 내가 우주와 자연, 그리고 인간의 상관 관계에 대해 관심이 많은 것은 사실이네. 하지만 농업이라… 이건 내 이론만으로 해결될 일 같지는 않은데?"
"쉬운 일이야 없겠습죠. 그래도 박사님이 조금만 생각하시면 저희들에게 좋은 방법을 찾아주실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요."

 
슈타이너 박사, 모든 인식의 중심에는 인간이 있으며, 초감각적 힘에 의해 파악될 수 있는 초물질적 실존의 존재를 주장한 인지학(anthroposophy)의 주창자이자, 괴테 연구의 대가로서 스위스의 바젤에 괴테 학술관인 쾨테아눔(Goetheanum)을 세웠고, 일명 생명역동농법이라고도 불리는 바이오다이나믹(Biodynamic) 농법의 창시자인 독일의 철학자이자 교육학자, 루돌프 슈타이너(Rudolf Steiner, 1861~1925)가 농부들의 간청에 고민스러운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농부들과의 대화 대용으로 추측컨대, 아직은 그의 바이오다이나믹 이론이 정립된 1920년 이전인 듯 했다. 그가 고민을 끝낸 듯 얼굴을 들고 농부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독일의 철학자이자 교육학자이며, 바이오다이나믹 농법의 창시자이기도 한 루돌프 슈타이너와 그가 세운 괴테 학술관인 괴테아눔. 루돌프 슈타이너가 세운 최초의 괴테아눔은 목조 건물로서 1922년에 방화로 소실되고, 철근 콘크리트조로 지은 현재의 제 2 괴테아눔은 그의 사후인 1925년~1928년 간에 건축된 것이다. 루돌프 슈타이너 초상. ⓒ Wikipedia / 괴테아눔(Goetheanum), Taxiarchos228

 
"이렇게 함세. 확실히 약속을 할 수는 없네만 나의 인지학 이론을 이용해서 방법을 찾아보도록 할 테니 내게 시간을 좀 주게. 자네들 말처럼 농사도 결국 우주와 인간이 이루어나가는 일이니 길을 찾을 수 있을 걸세. 정리가 되면 자네들에게 얘기해줌세. 그럼 되겠나?"
 
순박한 농부들은 그에게 연신 감사를 표하면서 물러났다. 그리고 다시 어둠이 찾아왔다. 이번에는 아주 짧게, 마치 눈을 한 번 감았다 뜬 듯한 느낌이었다. 그 앞에 다시 루돌프 슈타이너가 서 있었다. 잠시 전에 봤던 모습보다는 조금 더 나이를 먹은 듯 이마와 눈가의 주름은 더 깊어져 있었다. 다만 그 눈빛만은 더 성성해져 마치 그 앞에 서 있는 우리의 영혼까지도 꿰뚫어 볼 듯했다.
 
"자네들의 얘기를 듣고 오랫동안 연구해봤네. 내 생각에 결국 포도나무, 그 나무가 뿌리를 박고 자라나는 흙, 농사를 짓는 사람, 그리고 볕을 비추고 비를 내려주는 하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서로 영향을 주는 것 같네. 그래서 이 모든 요소들 간에 조화가 이루어지도록 함으로써 포도밭이 하나의 완전한 생태계를 이루도록 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네. 나는 이걸 생명역동(Biodynamic) 농법이라고 부르려고 하네. 이 이론은 꽤나 방대해서 한 번에 설명하기는 힘들고 자네들도 바로 알아듣기는 힘들 테니 앞으로 여덟 번에 나눠서 설명해줌세. 나는 이 강의의 제목을 '영적인 기초를 통한 농업의 부활'이라고 붙여봤네. 어떤가? 이럼 자네들의 요청에 대한 답이 되겠는가?"
 
농부들은 다시 한 번 그에게 감사를 표하며 그의 이론을 열심히 따라보겠노라고 약속했다. 그 순간, 벽에 걸린 램프의 불빛이 깜빡이는가 싶더니 그 모든 풍경이 램프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다시 빛이 돌아오고 정신을 차렸을 때, 내 눈 앞에는 여전히 책장이 펼쳐진 파우스트가 놓여있었다. 혹시 연암이 찾아왔나 싶어 두리번거렸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내 앞에는 커피잔 대신에 와인 한 병과 잔이 놓여 있었다.
 
나는 와인병에 담긴 와인을 잔에 천천히 따라 그 냄새를 맡아보았다. 짙은 흙냄새와 오래 묵은 간장에서 나는 듯한 쿰쿰한 향이 코를 찔렀다. 속이 들여다 보이지 않을 정도로 무겁고 탁한 와인의 빛깔은 청징(fining)이나 여과(filtering)를 거치지 않은 듯했다. 두어 번 잔을 돌리다 입에 한 모금 머금고 가볍게 혀 위에서 굴려보았다. 흔히 마시던 와인이라기보다는 중국의 전통 황주(주로 중국 양쯔강 유역에서 쌀을 주재료로 담근 황색의 발효주)인 소흥주를 마시는 느낌이었다.
 
그 특유의 쿰쿰한 향으로 미루어 보건대, 오크통이 아닌 조지아의 크베브리나 그리스의 암포라 같은 토기에서 숙성시킨 와인인 듯했다. 다시 병을 들어 라벨을 들여다 보았다. 바이오다이나믹을 깊이 연구해 자신들만의 독자적 농업 이론인 '코스모컬쳐(Cosmoculture)'를 정립했다는 도멘 비레(Domaine Viret)의 레드 와인인 르네상스(Renaissance) 였다.

프랑스 론 지방에서 전통적으로 선호하는 세 가지 품종, 그르나슈(Grenache), 쉬라(Syrah), 무흐베드르(Mourvedre)의 세 가지 포도를 섞어서 만들고, 그 머릿글자를 따 GSM 블렌딩이라고 부르는 와인임에도 맛이나 향은 일반적인 GSM 블렌딩 와인과 전혀 달랐다.
 
바이오다이나믹의 이론은 너무나 방대하고 깊어서, 사실 일반적인 농법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철학 체계와 같았다. 오죽하면 창시자인 루돌프 슈타이너도 여덟 번에 나눠서 강의했을까. 그러나 그 복잡하고 심오한 이론적 바탕을 떠나 사람과 농업의 관계를 '생명'이라는 측면에서 풀어가고자 했던 그의 사상에는 절로 경외감이 들었다.
 
바이오다이나믹 농법에서는 대지의 생명력을 고양시키기 위해 특별한 방법으로 제조된 퇴비를 사용하는데 이들은 각각 500부터 508이라는 번호가 붙여져 있다. 이 중 500과 501이 가장 중요한 기본 퇴비로서 500은 암소의 뿔에 소의 분뇨를 채워 겨울 동안 땅에 묻어 재워놓은 것이다. 이 퇴비는 질소 같은 미량원소가 풍부해 포도나무의 생장을 돕는다고 한다. 501은 수정(장석)을 분쇄해 가루로 만들고 이를 암소의 뿔에 채워 6개월 간 땅에 묻어놨다 시비하면 토양을 비옥하게 하고, 잎과 광합성 작용을 활성화시킨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가 바로 바이오다이나믹 카렌다, 이른바 천체력이다. 독일의 바이오다이나믹 연구자였던 마리아 툰(1922~2012) 여사에 의해 정립된 이 달력은 달의 항성 주기와 12개의 별자리를 이용하여 포도의 파종부터 수확까지 모든 재배 과정의 일자, 시간 등이 표시된 것으로 매년 새로 배포되며 바이오다이나믹 농법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바이오다이나믹 농법의 핵심인 천체력. 이는 달과 천체의 움직임이 대지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여 각각의 날에 해야 할 일들을 지정해주며, 매년 새로 배포된다. 위의 그림은 2011년 1월 호주의 바이오다이나믹 농법을 위해 작성된 천체력이다. ⓒ astro-calendar.com

 
교육학자로서 아이들의 신체와 정신의 발달에 맞춰 단계별 교육을 함으로써 올바른 성장을 이끌고자 했고, 이를 구현하는 수단으로 발도르프 학교를 창설하기도 했던 루돌프 슈타이너. 그가 지었다는 시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나는 세상을 바라본다
그 안에는 태양이 비치고 있고
그 안에는 별들이 빛나고
그 안에는 돌들이 놓여 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식물들이 생기 있게 자라고 있고
동물들이 사이 좋게 거닐고 있고
바로 그 안에
인간이 생명을 갖고 살고 있다
나는 영혼을 바라본다
그 안에는 신의 정신이 빛나고 있다
그것은 태양과 영혼의 빛 속에서
세상 공간에서
저기 바깥에도
그리고 영혼 깊은 곳
내부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그 신의 정신에서
나를 향할 수 있기를
공부하고 일할 수 있는 힘과 축복이
나의 깊은 내부에서 자라나기를
 
- 루돌프 슈타이너, '나는 세상을 바라본다'

 
한껏 철학적인 분위기에 사로잡혀 있을 때, 풍경이 '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울리고 익숙한 실루엣이 내 작은 술집 '1001 M.U.N'으로 들어섰다.
 
(22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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