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원고료주기
등록 2018.11.23 07:47수정 2018.11.23 07:47
나는 페르시아 제국의 왕, 크레스크세스의 궁정에서 와인 시중을 드는 내관의 몸에 잠시 빙의 됐었다. 그곳에서 송진향 강한 그리스 와인, 레치나(retsina)를 뒤집어 쓴 채로 그리스를 침략하는 데 최고의 장애로 여겨지는 스파르타 사람들에 관한 크세르크세스 왕과 마르도니아스의 대화에 빠져들고 있는데,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아지랑이 속에서 연암이 손을 내밀어 가볍게 내 팔을 잡았다. 나는 이제 돌아가나 보다 하는 안도감과 이 대화의 결말을 좀 더 듣고 싶은 아쉬움을 동시에 느끼며 아지랑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이윽고 눈을 떴다.
 
그런데 내 눈 앞에 나타난 것은 나의 작은 술집 '1001 M.U.N'에서 와인병을 마주 하고 앉은 연암이 아니었다. 내 앞에는 갑옷과 투구로 무장한 고대 그리스군의 지휘관들이 빙 둘러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운데 앉은 중년의 사내가 침통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결국 테르모필레의 스파르타군은 전멸한 것인가?"
 
이 순간, 나는 아르테미시온 곶에 집결해 있는 그리스 연합해군이 테르모필레의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보낸 전령이었다. 나는 거친 숨을 몰아 쉬며 테르모필레의 전황을 보고했다.
 
"예, 둘째 날인 어제 페르시아군들은 왕의 정예 근위군단인 1만의 아타나토이(Athanatoi, '죽지 않는 자들'이란 뜻으로 영화 < 300 >에서는 이를 영어로 번역한 임모탈 immortal 군단으로 나온다. 이런 이름이 붙은 이유는 실제로 죽지 않아서가 아니라 전사자가 생기면 바로 결원을 보충해 늘 1만이라는 숫자를 유지했기 때문이다)까지 투입했으나 스파르타의 방어진을 돌파하기는커녕 근위군단을 지휘하던 크세르크세스 왕의 두 아우마저 모두 전사했습니다.
 
우리 군도 상당한 병사들이 전사했지만 대부분 동맹도시에서 온 보조병들이었고, 주력인 스파르타군은 거의 피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페르시아 군이 우리 측의 배신자를 통해 테르모필레 협곡을 우회하는 샛길을 알아냈고, 레오니다스 왕은 이 상황에 철수하는 것은 불명예가 아니라며 동맹군 중에 떠나고 싶은 자는 떠나도 좋다고 했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다른 도시에서 온 병력들은 대부분 철수했지만 레오니다스 왕을 비롯한 스파르타군 300명과 테스피아이, 테베 두 도시의 병사들은 끝까지 남아 싸우기로 했습니다.
 
이틀 간의 전투를 통해 좁은 협곡 지형에서의 근접전으로는 스파르타군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멀리서 화살을 집중적으로 쏘아대면서 샛길을 통해 우리 군의 후위를 공격하는 전법을 펼쳤습니다. 페르시아 군의 별동대가 후위를 지키던 테베군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자 테베군은 결국 이를 버텨내지 못하고 항복한 후 전장에서 이탈했고, 남은 스파르타군과 테스피아이군은 앞뒤로 적을 맞아 분투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테스피아이군도 모두 전멸, 결국 스파르타 병사들만 끝까지 진영을 지켰습니다.
 
레오니다스 왕은 60이라는 고령(영화와는 다르게 레오니다스는 고대 사회에서는 이미 실전에 참가하기 조차 어려운 환갑의 노인이었다)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자리를 지켰고, 스파르타 병사들은 한 명, 한 명 죽어가면서도 자신들의 왕을 중심으로 둥글게 뭉쳐 싸웠지만 페르시아 군의 빗발치는 화살에 결국 마지막 병사까지 전사하였습니다.
 
크세르크세스 왕은 전투가 끝난 후에도 레오니다스 왕에 대한 화가 안풀렸던지 직접 전장을 찾아 레오니다스 왕의 시체를 찾아 그 목을 베어 창 끝에 꽂아 페르시아 병사들에게 보여주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전사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저버린 채 그 누구든 그리스 병사들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도록 지시를 내려 우리 병사들은 테르모필레의 전장에 그대로 버려져 있습니다."

 
나는 현재에서 건너 간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잠시 몸을 빌린 이 전령의 입에서 나오는 스파르타 병사들의 마지막 모습을 처연한 마음으로 듣고 있었다. 그것은 그리스의 연합해군의 지휘관들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전령(즉, 나)의 보고가 끝났음에도 그들 중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고, 그들이 뱉어내는 무거운 한숨에 공기마저 얼어붙는 것 같았다. 언제나처럼 테미스토클래스의 뒤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연암의 아지랑이마저 거의 흔들림이 없이 그림자처럼 멈춰 있었다.
 
아테네 군을 지휘하는 열 명의 스트라테고(stratego. 아테네는 민주적 의사 결정을 위해 전시에도 10명의 지휘관을 뽑아 이들이 돌아가며 전투 지휘를 하도록 했다. 전략을 의미하는 영어 strategy 는 이 지휘관들의 직책명에서 비롯된 것이다) 중 수석 스트라테고이자 그리스 연합해군의 실질적인 총지휘관인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 B.C. 524 ~ B.C. 429. 아테네의 정치가이자 군인)가 물처럼 차갑고 냉정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수고했다. 누가 이 병사에게 마실 것과 먹을 것을 좀 가져다 주도록."
 
회의 장소가 좁은 갤리선의 선실 내였기 때문에 나는 한쪽 구석으로 물러나 다른 병사가 가져다 준 와인과 음식을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투박한 큰 잔에 담긴 와인은 페르시아 궁정에서 마셔본 것과 같은 레치나(retsina, 송진향이 나는 그리스 와인)였지만 그보다는 좀 더 부드러웠고, 더 묽었다.
 
테미스토클래스가 다시 명령을 내렸다.
 
"명예롭게 전사한 레오니다스 왕과 스파르타 병사들의 복수를 위해서라도 우리는 엄정한 정신과 최상의 육체를 유지해야 할 것이오. 지금 즉시 모든 병사들에게 식사를 하도록 하라. 지휘관들의 식사도 이 곳으로 내오라."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 병사들이 아래가 뾰족한 암포라에 담긴 와인을 들고 와 모래가 담긴 상자에 뾰쪽한 바닥을 꽂아 고정시켰다. 그 뒤로 다른 병사들이 커다란 꽃병같이 생긴 도자기 용기와 역시 암포라에 담긴 물, 그리고 국자와 작은 잔들을 가지고 들어왔고, 그 뒤로는 커다란 쟁반에 치즈를 넣고 튀긴 삼각형 모양의 필로와 요거트 소스, 절인 올리브, 시금치를 넣은 파이인 스파나코피타, 소금을 뿌려 살짝 말린 후 포도잎에 싸서 구운 생선, 양고기와 가지, 토마토 등을 항아리에 다져 넣고 구운 무사카, 페타 치즈, 꿀, 무화과 등이 담겨 나왔다.
 
술을 담당하는 병사가 커다란 도자기 잔인 크라테르(Krater)에 키토스(Kythos)라는 국자를 이용해 와인을 덜고, 여기에 대략 세 배의 물을 부은 후 잘 저어서 섞었다. 이렇게 희석된 와인을 킬릭스(Kylix)라는 얕은 잔에 덜어 지휘관들에게 골고루 올렸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와인과 물을 섞어 마시던 용기인 크라테르(Krater)와 잔인 킬릭스(Kylix). 그리스인들은 폭음을 경멸했으며, 와인의 풍미를 높이기 위해 와인과 향기를 더한 물을 2:3, 혹은 1:3 의 비율로 크라테르에 덜어 섞은 후, 얕은 잔인 킬릭스에 덜어서 마셨다. ⓒ The Metropolitan Musuem of Art


나도 그들 틈에 슬쩍 섞여 병사가 내미는 와인잔을 받았다. 비록 졸병 신분이긴 했지만, 어쨌거나 소속은 민주주의의 산실 아테네가 아니던가! 받아 든 와인잔에서는 아까 급하게 마셨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은은한 꽃향기가 감돌았다. 이 시대의 그리스인들은 좋은 향을 통해 육체와 정신이 조화를 이루고 술로 인해 지친 몸이 빨리 회복될 수 있다고 믿었다.

또한 과음 끝에 취하는 것은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덜 취하기 위해 와인과 물을 2:3이나 1:3의 비율로 섞어 마셨으며, 이때 와인을 희석하는 물에 꽃 향기나 꽃기름을 첨가해 와인의 풍미를 높였던 것이다. 그리스인들의 시각으로 보면 희석하지 않은 채 와인 원액을 그대로 마시는 것은 '야만적'인 행위였다.
 
테미스토클래스가 잔의 앞쪽을 엄지와 검지로 잡고 죽은 스파르타 병사들의 명복을 비는 짧은 조사를 읊은 후 우리는 서로의 잔을 아래쪽으로 부딪치는 그리스식 건배를 통해 테르모필레의 영웅들이 올림포스 신들의 성전에 올라 불멸의 삶을 누리기를 기원했다.
 
스파르타 병사들과 레오니다스 왕의 비장한 운명에 감응됐는지, 지휘관들은 그 뒤로는 별다른 말 없이 조용히 와인을 마시고 음식을 먹었다. 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기원전 4세기의 그리스 시인 유불로스(Eubulos)가 그리스인들의 절제된 음주 태도에 관해 읊은 시가 떠올랐다.
 
'나는 절제를 위해 세 개의 크라테르를 채우네.
한 잔은 건강을 위한 것. 제일 먼저 비우지.
두 번째는 사랑과 쾌락을 위해.
세 번째는 숙면을 위해.
이 잔을 비우고 나면 현명한 손님들은 집으로 가지.
네 번째 잔은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니라 오만의 것이고,
다섯 번째 잔은 소란, 여섯 번째는 이리저리 날뛰게 하지.
일곱 번째 잔은 수치의 것이고,
여덟 번째 잔은 경찰을 부르며,
아홉 번째 잔은 구토,
열 번째는 미쳐서 가구를 내던지게 하네.'
 
이렇게 그리스 인들은 세 잔 정도의 와인을 마시는 것이 온전한 정신과 즐거움을 유지하는 최선의 방법이라 여겼고, 이런 생각은 중세 르네상스 시대를 거쳐 그대로 현대까지 이어져, 영국의 한 와인 전문가(Hugh Johnson)는 현재 우리가 마시는 와인병의 용량인 750ml 가 두 사람이 각자 세 잔 정도를 마실 수 있는 양으로 만드는 데서 기인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나는 그런 그리스인들의 음주 습관에 따라 내게 주어진 잔을 조심스럽게, 그리고 천천히 마셨다. 잔에 담긴 와인은 물로 희석되어 새하얀 사과꽃과 같은 향이 은은히 감도는 화이트 와인이었다. 송진향이 나긴 했지만 강하지 않았고, 와인의 풍미를 해칠 정도가 아닌 것으로 미루어 좋은 암포라에 제대로 잘 숙성시킨 와인인 듯 했다.
 
어느 새 연암의 아지랑이가 내 곁으로 다가와 와인잔에 코를 박은 채 킁킁대고 있었다. 나는 와인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셔보았다. 초여름에 먹는 청사과처럼 새콤한 맛이 입 안 가득 돌았다. 입을 동그랗게 모아 공기를 들여 마신 후 공기와 함께 가볍게 입 안에서 굴려보자 마치 제 철에 굴을 먹었을 때 느껴지는 것 같은 신선한 미네랄 느낌이 입 안 가득 퍼졌다.

이렇게 청사과와 미네랄 향이 강한 와인이라면… 아마도 현대에서도 그리스를 대표하는 청포도 품종인 아시르티코(Assyrtiko)로 담근 와인이 틀림없었다. 내 귀 옆에서 연암이 쩝쩝대며 입맛을 다시는 소리가 들렸다.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가라앉은 분위기를 다소 돌려보려는 노력이었을까, 테미스토클래스가 좌중의 지휘관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산토리니 섬의 아시르티코(Assyrtico) 포도로 담근 와인입니다. 와인의 사과향을 살리기 위해 물에는 제철에 따서 말려두었던 사과꽃을 우려 그 향을 내보았습니다. 마실 만한지요?"
 

그리스 산토리니 섬의 독특한 와인 재배 방식인 ‘쿨루라(Kouloura)’. 쿨루라는 바구니를 뜻하는 말로서 산토리니 섬의 강한 햇빛과 해풍으로부터 포도가 적정한 수분을 유지하도록 땅바닥에 달라붙은 바구니 형태로 포도 줄기를 엮은 후, 그 안에서 포도열매가 자라도록 한다. 이렇게 쿨루라 방식으로 재배하는 산토리니의 대표적인 포도 품종이 청포도인 ‘아시르티코(Assyrtico)’이다. ⓒ Wine of Greece


사람들은 앞 다투어 테미스토클래스의 우아한 취향을 칭송했다. 하지만 그들의 눈은 모두 그리스 연합해군의 명목상의 최고 사령관이면서도 지휘하는 배가 단 10척 밖에 되지 않아 사실상 테미스토클래스의 꼭두각시에 불과한 스파르타의 해군 사령관 에우리비아데스에게로 향해 있었다.

가뜩이나 연합해군의 두 주력인 아테네와 코린토스 사이에서 일종의 절충안으로 최고 사령관직에 오르기는 했지만, 근본적으로 육군 국가였던 스파르타에게 해군은 전투 보다는 해상 수송 수단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그런 허수아비 직위를 맡은 것도 불만이었을 터인데, 이제 조국의 전사들이 처절하게 최후를 맞았다는 소식을 들은 에우리비아데스에게는 술도 음식도 맛이 있을 턱이 없었다. 하물며 원래 스파르타 전사들은 술을 정신을 타락하는 것으로 여겨 천시하지 않았던가!
 
자신 앞에 놓은 술잔에는 입도 대지 않은 에우리비아데스가 충혈된 눈으로 테미스토클래스에게 물었다.
 
"이제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테르모필레가 뚫린 이상, 우리 해군만으로 페르시아군을 막는 것은 불가능하오. 그대는 육지로는 테르모필레, 바다로는 지금 우리가 정박해있는 이 아르테미시온만 막고 있으면 결국 페르시아군이 먼 원정길에 지치고 식량도 떨어져 철수할 것이라 했지만, 이제 함정에 빠진 것은 오히려 우리요. 우리가 바다에서는 소소한 승리를 거두고 있었지만, 이제 적이 테르모필레를 통해 육지로 곧장 남하한다면 우리가 아르테미시온에 있을 이유가 없지 않소?"
 
테미스토클래스가 한결 같이 침착한 태도로 대답했다.
 
"그대의 말이 맞습니다. 비록 테르모필레에서 거의 십분의 일이나 되는 병력을 잃었다고는 하지만, 페르시아군은 여전히 18만 명이나 되는 대병력입니다. 이들과 동등하게 전투를 펼친다는 것은 지금의 우리로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때 엉뚱하게도 내 귀에 연암이 속삭였다.
 
"어이, 아우님. 와인은 맛있나? 향은 꽤나 좋은데? 이건 뭐라는 와인인가?"
 
이런 분위기 파악 못하는 양반 같으니! 나는 이를 악물고 복화술처럼 그의 아지랑이에 대고 조용히 하시라고 얘기했지만, 그는 여전히 내 와인잔에 코를 들이대고 킁킁거리고 있었다.
 
"이건 지난 번 페르시아 궁정에서 마신 그리스 와인과는 많이 다른데? 그리스인들은 원래 이렇게 물을 타 마시나?"
 
당혹감과 화가 동시에 밀려 오면서 내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으나, 그래 봐야 지휘관들에게는 뒷줄에 고개 숙이고 앉은 졸병일 뿐이니 그 누구도 나에게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앞에서는 테미스토클래스가 계속 말을 이어 가고 있었다.
 
"비록 사흘에 불과했지만 테르모필레에서 우리가 그 적은 병력으로 20만이나 되는 대병력을 잡아 놓을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건 바로 좁은 협곡이라는 지형의 이점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적에게 유리한 싸움터에서 싸우는 대신 우리가 잘 알고 우리에게 익숙한 싸움터로 적을 끌어 들여야 합니다."
 
"그게 가능하겠소? 테르모필레야 협곡이었지만 이제는 그렇게 좁은 협곡도 없고, 적 앞에는 테베, 플라타이아이, 아테네, 코린토스 등 우리의 도시들로 향하는 길들이 펼쳐져 있단 말이오."
 
"예, 그렇죠. 그런데 만약 그들이 우리의 도시에 쳐들어왔을 때 우리가 이미 도시를 떠나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뭐, 뭐요?"

 
당황한 에우리비아데스는 말을 더듬었고, 다른 지휘관들은 생각지도 못한 테미스토클래스의 말에 혼란스러워하며 웅성거렸다.
 
그때 또 연암이 칭얼거렸다.
 
"이봐, 아우. 혼자서만 그리 즐기고 있지 말고 나한테도 얘기 좀 해달라고."
 
내가 또 아무 대답도 않고 있자 연암의 아지랑이가 답답했는지 내 주변을 퍼지듯이 감쌌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잠시 몸을 빌렸던 전령의 몸에서 떨어져 나와 연암과 함께 아지랑이 속에서 그들을 바라볼 수 있었다.
 
"형님, 한참 중요한 장면인데 그냥 좀 둬두시면 안 됩니까? 그리스 와인에 대해선 이따 가게로 돌아가면 설명해 드릴게요."
 
내 볼 맨 소리에 연암이 머쓱했는지 잠자코 있었다. 이 대선배의 그런 모습에 나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우선 지금은 테미스토클래스의 말을 좀 더 듣고 싶었다.
 
"나는 아테네의 모든 시민들을 소개시킬 겁니다. 그들을 안전한 산 속으로 옮기고 아테네는 텅 비워 놓을 겁니다. 페르시아 군이 아테네로 쳐들어 올 수는 있겠지만, 그들이 비어버린 도시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겁니다. 병사들은 지도를 가져오라."
 
그의 명령을 들은 병사들이 재빨리 음식 쟁반들과 그릇들을 치우고 선실 가운데에 큰 목판을 올린 다음, 양피지에 그려진 지도를 고정시켜 놓았다. 연합 해군의 지휘관들이 일제히 그 지도 가운데로 몰려 들었다. 테미스토클래스가 지휘봉 대신 쓰는 말채찍으로 지도를 가리키며 설명했다.
 
"우리의 도시들은 비우고,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육군 대신 해군으로 전력을 집중한 후 지금의 아르테미시온 대신 남쪽으로 이동하는 겁니다. 그러면 페르시아 군도 도시를 침략하는 대신 우리의 병력을 무너뜨리기 위해 쫓아올 겁니다. 그 때가 바로 우리의 기회입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가 정한, 그리고 우리에게 익숙한 바다 위의 전장에서 병력은 많아도 바다가 익숙하지 않은 페르시아의 해군을 무너뜨릴 수 있을 겁니다."
 
"그럼 대체 어디에서 싸우자는 거요?"

 
테미스토클래스는 지도를 꿰뚫기라도 할 듯 응시하다가 말채찍으로 조용히 한 곳을 가리켰다. 지휘관들뿐 아니라 아지랑이 속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연암과 나조차도 그가 가리킨 곳을 숨막히는 침묵 속에서 바라보았다.
 
마치 우리나라의 해안선과 흡사한 좁고 복잡한 해협. 테르모필레처럼 불과 12척으로 열 배가 넘는 133척의 왜 수군을 물리친 명량의 앞바다 같은 그 곳. 지도에는 작은 섬과 그 섬에 딸린 만의 이름이 그리스어로 이렇게 새겨져 있었다.
 
'Σαλαμίς(Salamis, 살라미스)'
 

살라미스 해전 개요도. 테르모필레 협곡에서 스파르타군을 힘겹게 이긴 페르시아군은 그리스의 해군마저 전멸시켜 그리스를 완전 정복하려고 살라미스 해협까지 쫓아왔으나 좁은 해협의 지형으로 기동에 제약을 받고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래스의 전략에 말려 마침내 패배를 맛보게 된다. 지도에서 빨간 색으로 표시된 것이 페르시아 해군, 파란 색으로 표시된 것이 그리스의 연합 해군이다. ⓒ Emerson Kent


 (* 20화에서 계속)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클럽아이콘12,9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