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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8.11.09 08:08수정 2018.11.09 14:13
늦가을의 초저녁은 왠지 서녘하늘의 노을마저 쓸쓸하다. 낮에 한 번 쓸었건만 가게 앞에는 어느새 수북하게 은행잎이 쌓여있다. 간판을 켜고 쌓인 은행잎들을 다시 한 번 가로수 아래로 쓸어 모았다. 오늘은 그 분이 다시 오시려나.
 
나는 무국적 비스트로 '1001 M.U.N'의 셰프이자 소믈리에이며, 홀 매니저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그냥 혼자 모든 일을 다하는 작은 선술집 주인이다. 내 가게의 상호는 아라비안나이트의 천하룻밤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밀레 우나 에 놋테(Mille et Una Notte)'의 약자에서 따왔다. 이 곳에서 나는 요리를 만들고, 술을 팔며, 손님들과 재미난 이야기로 시간을 보낸다.
 
아니, 그러리라고 생각했다. 그가 오기 전까지는. 몇 달 전부터 좀 이상한 손님이 가게를 찾기 시작했다. 처음에 그는 아주 평범한, 그저 미각과 후각이 뛰어난 젊은 손님 같아 보였다. 나는 그와 함께 와인잔을 기울이며 와인을 소개하고, 거기에 어울리는 요리들을 대접하는 시간이 즐거웠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내게 이상한 일들이 일어났다. 꿈 속에서(혹은 꿈인 줄 알았던 현실에서) 단테와 마키아벨리가 와인을 마시러 오는가 하면, 내가 중세의 수도사가 되어 교황을 위한 포도묘목을 옮기기도 하더니, 급기야는 그저 평범한 손님인 줄 알았던 그 젊은이가 특별한 능력으로 나를 인도하기 위해 온 연암, 바로 열하일기의 저자인 그 박지원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는 내게 어떤 시대, 어떤 장소로든 갈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을 시켜주겠다고 제안했다.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었으나 적어도 기분 나쁜 경험은 아니었기에 나는 순순히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왜 내게 그런 제안을 했는지, 내가 그 경험들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는 솔직히 아직도 모르겠다. 연암이 그렇게 다녀간 지 일주일이 흘렀다. 오늘쯤은 그가 다시 올 것 같아 가게를 정갈히 하고 요즘 맛을 들이기 시작한 와인들도 몇 병 가져다 놓았다.
 
해진 뒤로는 날씨가 제법 쌀쌀하니 국물이라도 끓여 놓을까 싶어 재료를 손질하고 있는데, '딸랑' 하는 풍경 소리와 함께 그가 어스름을 뒤로 하고 가게로 들어섰다. 나는 급히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그를 반갑게 맞았다.
 
"어서 오세요, 연암(燕巖, 박지원의 호) 선생님, 아니 중미(仲美, 박지원의 자. 일반적으로 조선의 양반들 사이에서는 이름 대신 자를 부르고 절친한 사이에서는 호를 불렀다) 선생님, 아니 스승님, 아… 어찌 불러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만, 어서 오세요."
 
그가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자네는 세계 여러 곳을 다녔다는 사람이 그리 형식에 연연하는가? 그냥 편한 대로 부르게. 선배나 형으로 불러도 난 상관없네."
"아, 감히 그럴 수야 있겠습니까?"
"상관 없다니까. 뭐라 부르던 그런 거에 내가 구애 받을 사람처럼 보이는가?"

 
하긴 성격이 호탕하기로는 당대에 이름 높던 연암이 아니던가. 나는 조심스럽게, 하지만 왠지 때는 이 때다 싶어 이 북학파의 영수와 호형호제하는 영광을 누려보기로 했다.
 
"저… 그럼 형님으로 모셔도 될런지요?"
"그러게, 아우."
"예, 형님"

 
그는 내가 권하는 자리에 앉았고, 나는 의례히 그래왔듯 그의 앞에 와인잔과 와인병 하나를 올려 놓았다. 그는 그 와인병을 흥미 있게 바라보았다.
 
"와인병에 쓰여 있는 이 문자는 뭔가? 처음 보는 문자인데?"
"그 문자는 조지아라는 나라의 문자입니다. 예전엔 러시아로 그루지아라고 불렀었구요. 유럽의 흑해와 카스피해 중간에 있는 나라인데 동유럽의 내해(內海)인 카스피해와 좁긴 하지만 지중해쪽으로 열려있는 흑해(黑海)를 연결해주는 통로라는 지리적 위치 때문에 역사적으로 여러 나라의 침략을 많이 받았던 나라죠. 최근에는 러시아의 지배를 받긴 했지만 자기네 고유 문자와 언어를 꿋꿋하게 지켜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특이하게 이 조지아 언어들은 주변의 다른 국가들 언어와는 아주 많이 다르답니다. 그래서 외국인들은 아직도 조지아 언어를 제대로 배우거나 말하기가 힘들다고 하네요."
 
"그럼 이 와인이 조지아의 와인이란 말인가?"
"예, 조지아는 자기네 전승에 따르면 기원전 6천년, 그러니까 지금까지 거의 8천년 동안 와인을 빚어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서양 와인의 조상격이라고 얘기들 하죠. 와인을 빚는 방식도 지금의 서유럽과는 아주 많이 달라서 오크통 대신에 우리나라의 옹기와 비슷하게 생긴 크베브리(qvevri. kvevri 라고 쓰기도 함)라는 큰 독을 땅에 묻고 여기에 포도즙과 포도껍질, 때로는 씨와 줄기까지 같이 넣어서 발효시켜 왔답니다. 그래서 오크통의 향기 대신 독특하고 토속적인 풍미를 가진 와인이 많죠.

조지아는 고대 그리스와도 많은 교류가 있었기 때문에 크베브리에 와인을 발효시키는 방식은 나중에 그리스로 전해져 그리스의 암포라(amphora) 발효가 되었다고도 합니다. 워낙 역사가 길기 때문에 혹자는 예수의 최후의 만찬에 사용된 와인도 조지아 와인이었을 거라고 주장했다더군요."

 

고대 조지아 지도. 현재의 조지아는 고대에 흑해 연안의 콜키스(Colchis) 왕국과 동부 내륙의 이베리아(Iveria) 왕국이 합쳐진 것이다. 이 중 특히 콜키스 왕국은 그리스 신화의 '이아손과 황금양털' 전설의 무대이기도 하다. ⓒ Alexandri magni imperium et expeditiones, 1833

  

조지아 특유의 와인 발효조인 크베브리(Qvevri). 고대 그리스의 암포라처럼 커다란 진흙 옹기인 크베브리는 입구만 노출되도록 땅 속에 완전히 묻힌 상태로, 여기에 포도즙과 껍질, 씨 등을 함께 넣고 발효시켜 독특한 풍미를 갖게 된다. ⓒ DNC

 
"오호, 재미있군. 옹기에 포도주를 발효시켰단 말인가? 그런 얘기를 들으니 나도 흥미가 솟구치는걸? 그럼 오늘은 조지아로 한 번 가볼까?"
"예?"

 
갑작스러운 그의 말에 당황한 내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웃으며 내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려 놓았다. 그의 손 위로 작은 검은 점 같은 것이 나타난다 싶었는데, 다음 순간, 마치 무대의 조명이 갑자기 꺼질 때처럼 주변의 모든 사물이 순식간에 그 검은 점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완전한 어둠. 나 자신도 구별할 수 없는 그 암흑 속에 다시 깜빡이는 작은 빛이 보이더니 이윽고 커지면서 어둠을 삼키고 나는 다시 덮쳐온 빛에 앞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토할 것 같은 기분을 참고 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내 손 위에 다른 이의 체온이 느껴졌다. 연암의 크고 거친 손은 아니었다. 아주 작고 따스하면서도 부드러운 느낌. 그것은 여인의 손이었다. 깜짝 놀라 손을 빼려고 했지만 여인의 손은 의외로 단단하게 내 손을 누르고 있었다.
 
"이아손(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영웅. 아르고호를 타고 콜키스 왕국의 황금양털을 찾으러 모험을 떠났다)"
 
난 잠시 내 모습을 내려다 보았다. 어느 새 내 몸은 단단한 근육과(부디 현실에서도 이렇기를!) 구릿빛 피부로 바뀌어 있었고, 그 위를 고대 그리스풍의 갑옷이 감싸고 있었다. 내 앞에 앉은 여인이 나의 손을 잡은 채로 다시 한 번 나를 불렀다.
 
"이아손. 정신 차리고 나를 똑바로 봐요. 내가 당신을 도울게요. 우리 아버지(콜키스 왕국의 아이에테스 왕)가 당신에게 황금 양털을 주는 대가로 낸 두 가지 과제는 당신 혼자서는 절대로 해결할 수 없어요. 콧구멍에서 불을 뿜는 저 신성한 황소에게 멍에를 씌우고 밭을 가는 것만도 벅찬데, 그렇게 간 밭에 용의 이빨을 심으면 바로 그 자리에서 병사들이 튀어나와 당신을 죽일 거예요."
 
콧구멍에서 불을 뿜는 황소? 용의 이빨? 맙소사, 이게 대체 뭔 소리란 말인가! 그 때 그녀의 어깨 뒤로 희미한 아지랭이 같은 사람의 형상이 보였다. 연암이었다. 그는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난 그의 형상을 향해 불만 가득한 시선을 던졌다. 그러나 이미 벌어진 일. 우선은 이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 잠시 눈을 감고 그리스 신화의 이아손 신화를 떠올리려 애썼다. 워낙 오래 전에 읽었던 내용이라 금방 떠올리기는 쉽지 않았지만, 조금씩 떠오르는 내용들을 이어봤다.
 
그리스 이올코스 왕국의 적법한 왕자였던 이아손의 아버지는 아버지 다른 형제 펠리아스에게 왕권을 빼앗긴 채 유배를 당했다. 그곳에서 왕녀와 사랑에 빠져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이가 이아손이다. 그녀의 부모들은 펠리아스왕이 이아손을 죽일까봐 이아손을 몰래 숨겨 기르고, 청년으로 성장한 이아손은 자신의 왕권을 되찾기 위해 이올코스로 돌아간다.

펠리아스왕은 그동안 이런저런 일로 제우스 신의 아내이자 최고 여신인 헤라의 미움을 받았기 때문에, 헤라 여신이 펠리아스왕을 벌주기 위해 이아손의 귀향을 도왔다고 한다. 펠리아스왕은 신의 두려움이 무서워 자신이 직접 이아손을 죽이는 대신, 그에게 콜키스의 잠들지 않는 용이 지키는 황금양털을 가져오면 왕위를 돌려주겠다고 한 것. 이아손은 콜키스까지 타고 갈 아르고호에 탈 선원들을 모집해 원정대를 조직하는데, 그 선원들이 이후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유명한 영웅들인 헤라클레스, 테세우스, 오르페우스, 네스토트 등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은… 아마도 이아손이 콜키스 왕국에 도착한 다음인 듯했고, 나(즉, 이아손)를 도와주겠다고 하는 걸 보면 내 앞의 여인은 콜키스 왕국의 왕녀이자 그리스 신화의 가장 유명한 마녀들 중 한 명인 메데이아(Medea)일 것이다. 이아손을 만난 후 수많은 나라를 떠돌며 많은 사람들을 처참한 죽음으로 몰고 간 여인이다. 정신도 차리기 전에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이 하필 바로 그 마녀라니!
 
난 몹시 떨렸지만 의연한 척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의 어깨 너머로 아지랑이 같은 연암의 형체가 낄낄거리며 웃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것 같았다. 내 손을 잡은 채 메데이아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이아손, 당신도 내 도움을 원하지요? 그렇다는 걸 알아요. 내 도움 없이는 당신은 절대로 저 황금 양털을 가져갈 수 없을 테니까. 그럼 당신은 왕위도 다시 찾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떠돌거나, 아니면 그 전에 소의 콧김에 섞인 불에 타 죽거나, 그도 아니면 용의 이빨을 심다가 그 이빨에서 튀어나온 병사들에게 죽임을 당할 거에요. 자, 대답해봐요, 내 도움을 원하나요? 그리고 내가 도우면 날 당신의 신부로 맞아 함께 그리스로 돌아갈 건가요? 어서 대답해요. 시간이 없어요."
 
신화 상으로는 난 당연히 그녀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그래서 황금양털을 그리스로 가져가고 왕위를 되찾아야 했다. 그러나 그 대가로 생길 수많은 죽음들. 그리고 결국 나(즉, 이아손) 자신마저 미쳐서 떠돌다가 쓸쓸한 죽음을 맞을 것이었다. 신화긴 하지만 결론을 알고 있는 이상 선뜻 대답할 수는 없었다. 그냥 싫다고 얘기하고 선원들 데리고 아르고호로 몰래 빠져나가 해적질이나 할까? 저 아르고호의 쟁쟁한 선원들 정도라면 작은 섬나라 하나 정도는 빼앗을 수도 있을텐데…
 
그때 사람의 기척과 함께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큰 키와 울퉁불퉁한 근육, 당당한 걸음걸이, 마치 영화 속 수퍼히어로 같은 모습의 그가 우리(즉, 이아손과 메데이아) 옆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이아손 선장. 곧 새벽이 다가 옵니다. 어서 결단을 내리세요. 나 헤라클레스와 다른 선원 모두는 선장이 어떤 결론을 내리든 영웅답게 그 결정을 따를 겁니다. 까짓 인간의 몸으로 비굴하게 살면 뭐하겠습니까? 신들이 우리를 지켜줄 겁니다. 메데이아 공주님의 도움을 받으세요. 황금 양털을 가지고 당당하게 그리스로 돌아갑시다."
 
내 결정을 따른다더니 헤라클레스도 결국 메데이아의 도움을 받으라는 얘기였다. 메데이아는 내 손을 놓고 탁자 옆으로 가더니 황금색의 암포라(와인 양조용이 아닌 술병 용도의 작은 도자기)에서 마찬가지로 황금색인 액체를 술잔에 따라 우리 옆으로 들고 와 내밀었다. 마녀가 주는 술잔이라니! 아직은 아니지만 그녀는 앞으로 숱한 사람들을 독살하거나 모살하거나 혹은 저주로 죽게 만들 텐데!
 
"자, 이아손. 내 도움을 받겠다면, 그래서 날 신부로 맞겠다면 언약의 표시로 이 와인(gvino, 포도주를 가리키는 조지아어로서 와인, 즉 vino 의 어원임)을 마셔요. 우리 콜키스 왕국에서 오랫동안 땅 속에 묻어 발효시킨 황금와인이에요."
 
난 망설이면서 와인잔을 받아 들고 흘깃 헤라클레스 쪽을 쳐다보았다. 그 덩치는 눈치도 없이 메데이아가 건네 준 또 한 잔의 와인을 숨도 안 쉬고 털어 넣고는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마녀와 덩치의 눈길을 동시에 받고 있자니 장기를 두다 외통수에 걸린 느낌이었다.
 
와인잔을 들어 그 안에 담긴 술을 보았다. 마찬가지로 황금색인 잔 속에 담긴 와인은 어느 것이 술이고 어느 것이 잔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였다. 천천히 향을 맡아 보았다. 아니, 맡아 보려고 했다. 그러나 나를 쳐다보는 눈길들이 어찌나 강렬한지 이게 오래 숙성된 멋진 와인이 아니라 사약이라고 해도 군소리 없이 들이켜야 할 분위기였다. 나는 잠깐 숨을 들이쉬고는 잔을 기울여 단숨에 와인을 마시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모든 것이 멈춰 버렸다. 기울여진 와인 잔을 타고 흘러 내리던 와인들은 한겨울 폭포처럼 공중에서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내 앞의 두 사람도 그 강렬한 눈빛 그대로 미동도 없이 멈춰 있었다. 비디오를 보다가 '순간정지' 버튼이라도 누른 것처럼.
 
그리고 그 뒤에 있던 아지랑이가 웃으며 다가왔다.
 
"워워, 이러면 반칙이지. 오래 묵은 좋은 와인을 자네 혼자 마실 셈인가? 술은 나와 함께 드세."
"형님!"

 
연암의 손길이 다시 내 손에 닿는 순간 사방이 어두워졌고, 다시 빨려들 듯 빛으로 되돌아왔을 때 우리는 내 작은 술집 '1001 M.U.N' 의 바 테이블에 마주 앉아 있었다. 우리 앞에는 내가 처음에 내놓았던 조지아 와인이 놓여 있었다.
 

조지아의 토종 청포도 품종인 르카치텔리(Rkatsiteli)로 빚은 구루자니(Gurjaani) 와인. 이 와인은 조지아의 동부에 위치해 있던 이베리아(Iveria) 왕국의 이름을 딴 제품 라인 중 생산지인 마을 이름을 붙인 와인으로서 고대 양조법을 따라 빚은 내추럴 와인들의 특징적인 오렌지 빛깔을 띠고 있다. ⓒ 이건수

 
연암이 웃으며 나를 놀렸다.
 
"자네, 보기보다 담이 작군. 미녀가 주는 술잔을 앞에 놓고 그렇게 식은 땀까지 흘려가며 망설이다니."
"무슨 말씀이세요. 보기에는 그냥 미녀지만 사실은 어마어마한 마녀란 말입니다. 나중에 이아손과 도망치느라 자기 여동생을 죽여 바다에 던지고, 그리스로 돌아가서는 이아손에게 왕위를 넘겨주기 싫어하는 펠리아스 왕도 그 딸들을 꼬셔 조각조각 내 살해하고, 아무튼 그리스 신화의 등장인물 중에 최고로 잔인하고 교활한 마녀라구요."
"하하하, 알았네, 알았어. 나야 그리스 고전은 알 턱이 없잖은가? 그저 자네를 통해서 보여지는 모습을 볼 뿐이지."
"다음부터는 미리 경고라도 좀 하고 어디를 데려가도 데려가 주세요. 저도 관련된 내용들을 기억하거나 되새길 시간은 필요하잖아요."
"그래, 그래. 알았네. 그나저나 이 와인이 아까 그 미녀, 아니 마녀가 주려던 와인과 같은 와인인가?"
"그 시대는 트로이 전쟁이 일어나기도 거의 한 세대 전이니 지금 현대의 조지아 와인과 완전히 똑같지야 않겠지요. 그래도 다른 어떤 나라보다 품종이나 양조법이 오랫동안 유지돼 온 곳이 조지아니 아마 맛이나 풍미는 거의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 번 드셔 보시죠."

 
우리는 가볍게 건배를 하고 각자의 잔을 들어 와인의 색을 불빛에 비춰 보았다. 일반적인 화이트와인보다는 약간 노란색을 띠고 있었다.
 
"이렇게 고대 방식으로 양조한 와인들은 약간 오렌지 색을 띠고 맛도 오렌지 껍질처럼 쌉싸름한 풍미가 있죠. 그래서 일명 오렌지 와인이라고도 하고, 색이 호박색을 띤다 해서 앰버(amber) 와인이라고도 한답니다."
 
연암은 내 설명에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잔을 기울여 향을 맡았다.
 
"처음엔 말린 지푸라기나 식물들의 줄기에서 나는 것 같은 냄새가 나는데 그 뒤로 아주 새콤한 향이 이어지는군. 자두인가? 살구 같기도 하고 복숭아 같기도 하고. 아니, 신고 같은 배? 잘 모르겠네. 꽤 복합적인 향이 나는데?"
 
잠깐 잊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뛰어난 후각을 갖고 있는지.
 
"맞습니다. 지금 말씀하신 그 모든 향이 이 와인의 특징적인 향이죠. 이 와인은 조지아의 토종 청포도 품종인 르카치텔리(Rkatsiteli)의 과육과 껍질, 씨까지 모두 크베브리 안에 넣고 발효시킨 구루자니(Gurjaani)라는 와인입니다. 도수는 높지 않아도 맛은 꽤나 묵직한 와인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잔을 기울여 입에 한 모금씩 와인을 물고 씹듯이 맛을 음미해보았다.
 
"첫 맛은 마치 살구를 한 입 깨물었을 때처럼 새콤한 맛이 입 안 가득 침을 고이게 하는군. 그 뒤에 이어지는 달콤한 복숭아 통조림 맛과 향이 기분 좋게 그 신 맛을 받쳐 주다가 새콤한 배를 먹었을 때 같은 느낌도 있어. 마신 뒤에 여운은 길게 남고...전체적으로 꽤 묵직한 맛이야."
"예, 저도 이 와인을 마실 때 그런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안주는 치즈와 건과일을 곁들인 야채 샐러드가 아주 잘 어울리죠."

 
나는 주방에서 내가 말한 대로 샐러드 재료들을 접시에 담고 이탈리아산 올리브오일과 소금, 약간의 꿀로 마무리해 그 앞에 내놓았다. 그는 구루자니 와인을 다시 한 모금 마시고 샐러드를 작은 접시에 덜어 맛있게 먹었다.
 
"그런데 아까 보니 황금 양털 얘기가 나오던데, 그 뭐라더라, 이아손인가 하는 친구는 황금 양털을 가져갔나?"
"예, 그런데 왕위를 되찾기는커녕 다른 나라로 망명을 떠나야 했고, 결국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죠.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영웅들 중에서 아마 가장 비참한 운명을 맞은 게 바로 그 이아손일 겁니다."
 
"그렇군. 그런데 왜 자네는 조지아에서 그리스 신화를 떠올렸지? 나야 자네의 마음 속에 떠오르는 대로 자네를 이끈 것뿐인데."
"사실 그게 조지아라는 나라에 대해 우리가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예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도 와인 한 모금을 마시고 계속 말을 이었다.
 
(18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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