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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8.10.12 07:44수정 2018.10.12 08:34
얼마나 잠이 들었던 걸까. 문득 나를 흔들어 깨우는 누군가의 손길이 느껴졌다.
 
"형제여, 일어나시오."
 
나는 잠기운에 눈을 비비며, 나를 깨운 사람을 바라봤다. 짙고 거칠어 보이는 질감의 모직옷을 뒤집어쓴 사람이 나귀에 몸을 실은 채로 나를 걱정스레 바라보고 있었다.
 
"산 속 날씨가 추우니 잠들면 안 됩니다. 이제 저 언덕만 넘으면 프랑스니 가까운 마을 주막에서 좀 쉬어 갑시다."
 
'응? 웬 프랑스? 난 한국의 술집주인인데?' 혼란스러운 마음에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끝없이 길게 이어지는 언덕들이 보일 뿐, 어둑해져 가는 저녁 어스름 속에서 알아볼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차갑게 식은 공기가 거친 모직물 사이로 파고 들어와 나도 모르게 몸이 떨려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 역시 나를 깨운 이와 같은 옷을 입고 나귀에 몸을 싣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작은 묘목들을 뭉쳐 봇짐처럼 졌거나, 이런저런 짐 바구니를 지고 있는 일행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형제여, 몹시 피곤했었나 봅니다. 하긴 아라곤(Aragon. 스페인 북동부 지역의 옛 지명이자 왕국의 이름)에서 여기까지 오는 길이 보통 힘든 게 아니긴 하지요. 이제 이 언덕만 넘으면 피레네도 다 넘은 것이니 힘 내시오."
 
피레네(스페인과 프랑스 국경의 산맥)? 나는 이 상황이 몹시 혼란스러웠으나, 당장은 터벅터벅 산길을 걸어 오르는 나귀의 등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안간힘을 써야 했다. 이윽고 언덕을 넘자 우리 앞에서 나귀의 고삐를 끌고 가던 길잡이로 보이는 사내가 잠시 쉬어가는 게 어떠냐고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마을까진 그리 멀지 않았으니 잠시 땀이나 식히고 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요? 뒤에 짐꾼들도 몹시 지친 듯 합니다요."
 
내 옆의 사내가 두건 쓴 머리를 끄덕이자 길잡이는 일행들에게 잠시 쉬어가자고 큰 소리로 외쳤다. 나귀의 등에서 내리자 그제서야 엉덩이와 사타구니가 몹시 저리고 아파왔다. 쩔쩔매는 내 모습을 보면서 내 옆의 사내가 빙그레 웃더니 자신이 탔던 나귀 등의 봇짐에서 가죽 푸대 하나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형제께선 아비뇽의 수도원에만 계시다 보니 이렇게 먼 여행이 익숙하지 않으시지요?"
 
나는 그가 내미는 가죽 푸대를 들어 그 안의 액체를 한 모금 마셨다. 물인 줄 알았으나 놀랍게도 그것은 산뜻하고 신선한, 딸기향 가득한 와인이었다.
 
"부르고뉴 와인입니다. 주님의 품으로 돌아가신 고 클레멘스 5세(Clemens V)께서 가장 좋아하시던 와인이지요."
 
그는 전임 교황의 이름을 언급하며 성호를 그었다. 나는 그의 말을 듣다 갑자기 깜짝 놀랐다. 클레멘스 5세라니! 그는 일찍이 프랑스왕 필립 4세에 의해 교황이 되었고, 왕의 강요로 1309년에 교황청을 로마에서 아비뇽으로 옮긴 최초의 아비뇽 교황이 아니던가.

그 이후로 7명의 교황이 근 70년의 세월을 아비뇽에서 보냈고, 이 시대를 세상은 교황이 마치 프랑스 왕의 인질이 된 듯 했다 해서 아비뇽 유수(Avignonese Captivity)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저….형제님. 그럼 지금은 대체 몇 년인가요?"
"아직 선잠이 덜 깨신 모양이군요. 지금은 우리 주님 오신 지 1321년, 클레멘스 5세께서 선종하신 후에 2년 동안이나 공석에 있던 사도좌를 포르토(Porto) 주교께서 이어 받아 요한 22세(Joanesse XXII)가 되신 지 5년째 되는 해 아닙니까."

 
1321년? 난 14세기에 있었다. 어이 없게도 그 순간 떠오른 첫 번째 생각은 '그럼 가게 문은? 우리 1001 M.U.N은 어쩌지?'였다. 그러나 그 생각을 입밖에 낼 수는 없었다. 그런데 왠지 그 해가 몹시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1321년이라… 뭔가 기억에 남는 일이 있었는데… 떠오를 듯 떠오르지 않는 뭔가가 있었다.
 
"아, 그렇지요. 그런데 우리는 왜 지금 피레네에 있는 건가요?"
 
그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한숨을 쉬었다.
 
"형제여, 아무래도 긴 여행이 형제의 영혼을 갉아 먹고 있나 봅니다. 우리는 성하의 명을 받들어 아라곤에서 새로운 미사주를 만들 포도 묘목과 씨를 아비뇽으로 가져가는 중 아닙니까. 저 짐꾼들이 지고 있는 것이 바로 아라곤에서 자라는 가르나차(Garnacha)라는 포도나무의 묘목들입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미안한 기색으로 그에게 변명을 했다.
 
"죄송합니다. 히프노스(Hyonos, 그리스 신화의 잠의 신. 죽음의 신 타나토스,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 등과 형제이다)의 미혹에라도 빠진 탓인지(이런 표현을 쓰다니!), 정신이 하나도 없네요. 형제께서 도와주시면 금방 회복될 듯 합니다."
"이해합니다. 누구라도 이렇게 긴 여행을 하다 보면 정신과 육체가 하나됨을 유지하기 힘든 법이지요."

"예,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왜 성하께서는 그 먼 아라곤까지 가서 포도나무를 구해오라 하신 건지요? 아비뇽을 비롯한 프로방스 지방에도 로마시대부터 오랫동안 포도를 재배해오지 않았나요?"
"아시다시피 전임 클레멘스 5세께서는 프랑스 태생이신데다가 페루자 공의회에서 교황으로 선출되시기 전까지 오랫동안 프랑스에서 주교로 계셨지요. 그래서 이탈리아 출신의 이전 교황들과는 달리 와인도 부르고뉴 와인을 몹시 좋아하셨습니다. 아무튼 미사주로도 부르고뉴의 와인을 쓰실 정도였으니까요. 그래서 비록 아비뇽으로 교황청을 옮기시긴 하셨지만 와인만큼은 계속 부르고뉴에서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교황이신 요한22세께서는 이전 주교 시절에도 맛이 강한 포도주를 즐겨 드신 데다가, 올해로 이미 일흔다섯살의 고령이심에도 불구하고 몹시 강건하시지요. 거기에 더해서 아비뇽에서 오래 계실 것이라는 주님의 계시라도 받으셨는지 부르고뉴에서 포도주를 실어 오기보다는 아비뇽에서 직접 재배한 포도로 와인을 빚으라 하셨답니다. 심지어 아직도 틈틈이 포도밭에 직접 나와 포도 농사를 챙기실 정도니까요."

  

아비뇽으로 교황청을 옮긴 최초의 교황 클레멘스 5세(좌)와 본격적인 아비뇽 시대를 연 요한 22세(우). 클레멘스 5세는 프랑스왕 필립 4세에 의해 교황으로 선출되었고, 그의 선종 후 교황좌는 2년여 간 공석이었다가 당시 70세의 고령이었던 포르토 주교가 필립 5세의 후원으로 선출되어 요한22세가 되었다. 요한22세는 고려의 충숙왕에게 서한을 보낸 것으로도 유명하다. ⓒ Henri Auguste Calixte Cesar Serrur

 
"아까도 여쭤봤지만 아비뇽에도 이미 포도밭이 많지 않나요?"
"그야 그렇습니다만, 성하의 입맛에는 맞지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거기다 성하께서는 미사에 쓰이는 와인은 주님의 피(Sanguis Christi)니 보다 거룩하고 힘찬 느낌의 포도로 빚어야 마땅하다고 하셨습니다. 부르고뉴의 와인이 화려하긴 하지만 아무래도 주님의 피라고 하기에는 여성스러운 느낌이 많으니까요.
 
성하의 명을 받들어 저를 비롯한 수도사들이 프랑스와 이탈리아, 에스파냐(스페인)의 곳곳을 찾아 다닌 결과, 아라곤 땅에서 자라는 가르나차(garnacha)라는 포도가 아주 힘차고 강하면서도 풍성한 맛을 낸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형제님과 제가 이렇게 피레네 산맥을 넘어 가르나차 포도나무의 묘목들과 종자를 나르게 된 것이지요."
 
"아, 그랬지요. 이제 조금씩 기억이 돌아오는 것 같습니다."

 
역사책에서 읽었던 지식이 떠올랐다고나 할까?
 
"다행입니다. 혹시 편찮으신 건 아닌지 많이 걱정했거든요. 사실 전임 클레멘스 5세 성하 때부터 이탈리아 출신 추기경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아서 미사용 와인 조차 프랑스 와인을 쓰는 것에 대해 말들이 많았습니다. 주님의 피가 이탈리아 땅에 뿌려진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들은 불경하게도 우리 성하를 프랑스 왕의 앞잡이라고까지 불렀지요."
 
수도사의 얼굴이 분노로 달아 올랐다.
 
"참으로 부당한 비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하께서 적극적으로 정치에까지 개입을 안 하셨다면 거룩한 교회는 그야말로 왕의 의지에 좌우되는 꼭두각시가 됐을 겁니다. 심지어 저 교만한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트비히 4세는 주님의 대리자인 교황 성하보다 황제가 더 우위에 있다는 불경하기 짝이 없는 주장까지 했을 정도니까요."
 
"성하께서 근심이 많으셨겠군요."
"예. 그래서 때때로 지친 표정으로 포도원에 나와 직접 가지치기도 하시고, 포도주를 빚는 우리 형제들과 함께 일하시는 모습을 뵈올 때면 마음이 너무 아프답니다."

 
어느새 주변이 꽤 어둑해졌다. 길잡이는 더 지체하다간 길에서 밤을 맞을 것이 걱정됐는지 일행을 재촉했고, 우리는 다시 나귀 등에 올랐다. 그는 내 곁에서 나란히 나귀를 타고 가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 포도들을 심을 곳은 원래 석회암(limestone)이 많은 아비뇽의 북쪽 마을입니다. 성하(요한22세)께서는 그 마을에 여름 별장을 지으셨고, 사람들은 처음에 석회암이 많은 마을에 지어진 새로운 성이란 뜻으로 샤또네프 칼세르니에(Chateauneuf Calcernier)라고 불렀죠. 그러다가 요즘은 교황 성하의 새로운 성이란 뜻으로 샤또네프 뒤 파프(Chateauneuf du Pape)라고 부르는 모양입니다. 전임 교황이신 클레멘스 5세께서도 보르도의 페샥 레오냥 마을에 당신의 포도밭을 가지고 계셨는데, 그곳이 클레멘스 교황의 포도밭이란 뜻의 샤토 파프 클레망(Chateau Pape-Clement)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것과 비슷하달까요."
 

아비뇽 유수 후 2대째 교황인 요한 22세가 아비뇽의 북쪽에 지은 여름 별장터. 사람들은 이 곳을 처음에는 석회석 많은 마을의 새로운 성, 즉 샤토네프 칼세르니에(Chateauneuf Calcernier)라고 부르다가 곧 교황의 새로운 성이란 뜻의 샤토네프 뒤 파프(Chateauneuf du Pape)라고 불렀다. 14세기 말에 교황청이 다시 로마로 옮겨간 후에는 싸구려 벌크 와인 생산지로 전락했으나 1970년대 들어 현지 생산자들의 많은 노력 끝에 옛 명성을 되찾고, 공식적으로 샤토네프 뒤 파프라는 원산지 보호 등급(AOP)의 등록과 함께 옛 영화를 되찾기 시작했다. ⓒ Michal Osmenda

  
그는 목이 말랐는지 나귀 위에서 가죽 주머니 안의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피레네 산맥의 이 쪽에서는 그르나슈(Grenache)라고 부르는 모양입니다만, 아무튼 이 가르나차는 성하께서 손수 고안하신 와인 배합의 마지막 조각이 될 겁니다. 성하께서는 거룩한 화합을 뜻하는 열세 가지의 포도 품종을 섞어 와인을 빚길 원하시지요. 그 중에서도 특히 원래 아비뇽 부근에서 많이 기르는 시라(syrah)와 무르베드르(Mourvedre)가 중요한 품종인데, 이 포도 품종들을 하나로 이어줄 강건한 포도 품종이 없었습니다.
 
이 그르나슈는 원래 껍질이 검은 색을 띠어서 그르나슈 느와르(Grenache Noir)라고 부르는 품종인데 맛이 달고 신맛은 적어서 와인을 만들면 아주 진하고 떫은 맛이 강한 와인이 됩니다. 그래서 다른 품종들하고 섞어서 복합적인 풍미를 내는데 성하께서는 이 품종을 뼈대로 다른 12가지 품종을 섞는 배합을 손수 개발하신 것이죠. 시험 삼아 빚은 와인을 마셔봤을 때의 그 놀라움이란! 우리는 그 와인을 마시고는 모두 한 마음으로 주님을 찬양했습니다."
 
"아니마 크리스티(Anima Christi)?"

 
그가 내가 외친 단어를 듣고는 빙그레 웃었다.
 
"예. 우리 성하께서 직접 지으신 그 기도문, 바로 그리스도의 영혼(Anima Christi)을 한마음으로 영송(詠誦, 시가 등을 소리 내어 읊음)했죠."
 
그는 나귀에서 내려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아름다운 목소리로 요한22세가 직접 지었다는 라틴어 기도문을 낭송했다.
 
Anima Christi, sanctifica me.
그리스도의 영혼은 나를 거룩하게 하소서.
Corpus Christi, salva me.
그리스도의 몸은 나를 구원하소서.
Sanguis Christi, inebria me.
그리스도의 피는 나를 취하게 하소서.
Aqua lateris Christi, lava me.
그리스도의 늑방에서 흐른 물은 나를 씻으소서.
Passio Christi, conforta me.
그리스도의 수난은 나를 굳세게 하소서.
O bone Jesu, exaudi me.
오, 착하신 예수여, 나의 말을 들어주소서.
Intra tua vulnera absconde me.
당신의 상처 속에 나를 숨겨 주소서
Ne permittas me separari a te.
당신 곁을 떠나지 않도록 나를 붙들어 주소서.
Ab hoste maligno defende me.
간악한 원수에게서 나를 지켜 주소서.
In hora mortis meae voca me.
내가 죽을 때에 나를 붙들어 주소서.
Et iube me venire ad te,
그리고 당신께 오라고 명령하소서.
Ut cum Sanctis tuis laudem te,
당신의 성인들과 함께 당신을 찬미하게 하소서.
In saecula saeculorum.
영원무궁토록.
Amen
아멘.

 
그의 기도를 들은 모든 일행이 성호를 그었다. 나는 그의 기도문을 들으면서 갑자기 머리 속의 안개가 걷히는 듯했다. 그래, 1321년! 나는 다시 한 번 성호를 그었다. 그가 그런 내 모습을 보면서 물었다.
 
"형제여,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예. 잠시 잊고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제 스승 중 한 분이 올해 돌아가셨군요. 한 번도 직접 뵙지는 못했지만 몹시 존경하고 사랑하는 분이었습니다. 그 분도 성하처럼 자신의 둥지에서 쫓겨났지요. 성하처럼 새로운 성을 갖는 행운조차 누리지 못하고 결국 타향에서 눈을 감은 그 분을 생각하니 서글픈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군요."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 분께 주님의 가호가 있기를, 그리고 천국이 함께 하기를 기도 드리겠습니다. 그 분의 성함은 어찌 되나요?"
"형제님께서도 들어보셨을 지 모르겠습니다. 그 분께서는 자신의 시로 우리가 가볼 수 없는 영원의 세상을 보여주셨죠. 그는 바로 단테 알리기에리, 저 유명한 신곡(Divina Comedia)을 쓴 피렌체의 시인입니다."


(*14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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