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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2018.10.05 08:27수정 2018.10.05 08:27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 묘사된 것처럼, 헤밍웨이가 특히 사랑했던 것이 바로 이 리오하 와인이었습니다."
 
1001 M.U.N의 주인장은 열렬한 헤밍웨이의 팬인 듯 와인과 음식에 관한 '무기여 잘 있거라'의 한 구절을 들려주었다. 그가 낭송하는 책 구절을 들으며 마시니 마치 내 자신이 산속에서 직접 스페인식 스튜에 리오하 와인을 마시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스페인 사람들은 이렇게 전통적인 스타일의 와인을 주로 좋아하나 보군요. 좀 보수적인 편인가 봐요."
"리오하 와인이 좀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편이긴 하지만, 스페인의 다른 지역들도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려워요. 대표적인 예가 스페인의 떠오르는 와인 산지인 프리오라토(priorato), 까탈루냐어로는 프리오라트(priorat)죠. 프리오라트 와인의 역사는 정말 흥미진진하고 박진감 넘치는 도전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거든요."

 
그가 주방 안쪽에서 와인 한 병과 새 와인잔들을 들고 돌아왔다. 리오하 와인과 같이 마시려고 했던 듯, 마개는 미리 열려 있었다. 와인의 라벨에는 굉장히 특이한 로봇처럼 보이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가 빙그레 웃으며 새 와인잔에 와인을 따라 주고는 자신의 잔을 들어 향기를 맡았다.
 
"마개를 열고 한 시간 정도 놔뒀는데 아직은 조금 덜 열렸군요. 하지만 이 와인이 가진 고유의 향들은 충분히 피어나고 있네요. 아주 다양한 베리류의 향이 있고, 은은하게 초콜릿과 구운 토스트의 향도 납니다."
 
그는 와인잔을 기울여 한 모금을 입에 물더니 입을 살짝 벌린 채로 호로록하고 공기를 빨아들여 와인의 맛을 보았다.
 
"말씀 드린 대로 아직 조금 덜 열려서 묵직하게 혀를 감싸는 탄닌의 느낌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곧 더 부드러워질 겁니다. 신선한 베리류의 상큼한 과일맛이 점점 진해져 가고 있구요. 그 뒤로 꽤 강렬한 철분의 맛이 느껴지네요."
 
철분의 맛이라… 그건 무슨 맛일까? 궁금해진 나도 와인잔을 들어 향을 맡고 입에 한 모금을 물었다. 진하고 묵직해보이는 자줏빛 와인을 입에서 살짝 굴리자 혀가 오그라드는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 이것이 탄닌의 느낌인가 하고 생각하면서 조금 더 입에서 굴려보자 점차 과일의 맛이 나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묘한 느낌의 맛이 전해져 왔다. 그건 마치…
 
"피의 맛 같죠?"
 
주인장이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웃으며 말했다.
 
"네, 입안에 상처 나서 피났을 때 느껴지는 느낌 같아요. 아, 물론 그렇게 비리고 안 좋은 느낌은 아니구요. 전에 오색온천의 온천수를 마신 적이 있는데 약간 그런 느낌도 있어요."
"맞습니다. 그 모든 맛의 공통점은 철분이죠. 오색온천도 온천수가 솟아나는 주변에 벌겋게 산화철 자국이 형성될 정도로 철분이 높거든요. 물론 사람의 피에서 느껴지는 맛도 철분을 함유한 헤모글로빈 때문이구요. 이 맛은 프리오라트 지역의 토양이 화산토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에 생기는 특징이기도 하죠."
 
"어, 그런데, 아까는 못 맡았던 향인데 갑자기 특이한 향이 훅 스치고 지나갔어요. 뭐랄까…약간 화장품 같은 향이 아주 순간적으로 났는데요."
"하하하, 손님의 후각은 정말 알아드려야겠어요. 와인 드신 지 얼마 안 된 분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요. 그건 이 와인의 특징적인 향 중 하나인 클로브(clove), 우리 말로는 정향(丁香)이라는 향신료의 향기에요. 정향은 향신료들 중에서도 특이하게 꽃 봉오리를 말린 건데요. 원래 정향의 꽃이 보라색인 영향도 있어서 이 와인을 마시고 나면 뒤에 은은하게 보라색 꽃 향기를 맡고 있는 것 같은 여운이 감돌죠."
 
"그렇군요. 라벨의 그림도 굉장히 특이한데, 이건 로봇인가요?"
"예, 이 와인은 스페인의 떠오르는 와인 메이커인 까사 로호(Casa Rojo)가 프리오라트 지역의 가르나차(Garnacha)라는 품종만으로 빚은 '마퀴농(Maquinon)이라는 와인입니다. 마퀴농은 스페인어로 '큰 기계(Big Machine)'라는 뜻인데 속어로는 '일 잘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죠. 이 와인이 가지고 있는 미네랄과 스파이시함을 표현하기 위해 붙인 이름과 라벨 디자인인데 매년 라벨 디자인이 바뀌고, 특이한 건 와인 라벨 그림이 야광이어서 불을 끄면 빛이 난다는 거죠. 이 2016년 빈티지는 로봇의 머리 위 전구와 가슴에 그려져 있는 번개가 어둠 속에서 빛이 난답니다.

까사 로호는 2010년에 일종의 프로젝트로 시작되어 2014년에서야 첫 빈티지를 선보인 아주 신생 와인 메이커인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석 양조가인 호세 루이즈 고메즈를 비롯한 최고의 전문가들이 모여 스페인의 6개 지역에서 나는 토종 품종들로 여섯 가지 와인을 만들어 세계 전역으로 수출하는 특이한 업체죠. 까사 로호야말로 현재 스페인의 젊은 와인 양조가들이 가진 도전의 역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페인 프리오라트(Priorat)지역의 가르나차(Garnacha) 품종으로 빚은 마퀴농(Maquinon). 마퀴농은 스페인 속어로 큰 기계, 즉 로봇처럼 일 잘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프리오라트 지역은 화산토로 이루어진 가파른 산지로서 이 지역에서 재배된 포도로 빚은 와인은 풍부한 베리류의 과일맛에 더해 독특한 광물 맛과 정향 같은 향신료의 향을 지닌다. ⓒ 이건수

 
"뭔가 실험적인 시도를 많이 하나 보군요?"
"예, 이 와인의 라벨만 봐도 전통적인 와인 라벨들과 많이 다릅니다. 이 마퀴농뿐만 아니라 까사 로호에서 만드는 모든 와인들의 라벨은 유명 디자이너인 에두아르도 델 프라일레(Eduardo del Fraile)와 협업하는데요. 톡톡 튀는 젊은 감성으로 디자인하고 와인의 이름도 마퀴농, 마초맨, 햄팩토리 같이 재미있는 이름들로 붙이고 있죠.
 
스페인 와인의 도전의 역사를 살펴보려면 바로 이 프리오라트 지역의 와인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어요. 이 까사 로호의 예처럼 지금이야 프리오라트 지역이 세계적으로 주목 받는 와인 중심지가 됐지만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근 800년에 이르는 역사에도 불구하고 양조용 포도밭이 불과 네 군데 밖에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황폐화된 곳이었습니다.
 
원래 프리오라트라는 지역 이름은 중세 시대에 이 지역의 토착민들이 천국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는 천사를 봤다는 전설에서 시작됩니다. 그 후 12세기에 아라곤의 왕 알폰소 2세가 그 전설의 장소에 카르투지오(Carthusians)파의 수도원을 건립했는데요. 스칼라데이(Scala Dei, 신의 제단)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수도원의 원장을 가리키는 스페인어가 바로 프리오리(priori)였답니다. 이 프리오리에서 지금의 지명인 프리오라트가 유래된 거죠.
 
프리오라트 지방은 매우 건조하고 강수량도 적은 데다가 가파른 산악 지형이 대부분이었지만 다행히 토양이 화산토로 이루어져 쉽게 부스러졌고, 그 덕분에 포도나무들은 수분과 영양분을 찾아 땅속 깊은 곳까지 뿌리를 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 지역의 포도나무들은 상당수가 수령이 80년이 넘는 노목들이고, 이렇게 깊게 뿌리 내린 포도나무들은 더 원숙하고 풍성한 맛을 내는 포도를 생산해줍니다. 수도사들은 이런 모든 환경을 신이 내린 계시로 여기고 이 곳에서 포도를 기르고, 와인을 빚으며 묵묵히 수도를 해나갔죠.
 
하지만 이렇게 오랜 역사와 훌륭한 토양도 19세기에 유럽을 덮친 병충해(필록세라)를 피해가지는 못했습니다. 와인 외에는 별다른 수입원도 없고, 이미 왕가의 후원도 기대할 수 없게 된 수도원들은 자연스럽게 빚더미에 앉게 됐고, 스페인 의회는 교회의 재산을 몰수해 공매하기에 이릅니다.
 
이후 여러 번 주인이 바뀐 스칼라데이 수도원의 포도밭은 2000년대에 이르러 드디어 스페인 최대의 스파클링 와인 회사인 코도르니우(Codorniu)를 주인으로 맞게 됐고, 코도르니우 사에서는 옛 수도원 터에 셀라스 데 스칼라데이를 설립한 후 적극적인 투자를 통해 이 지역의 명성을 되찾기 시작한 것이죠."

 
그는 와인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고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프리오라트 지역의 명성이 조금씩 되살아나면서 까사 로호 같은 젊은 양조가들이 이 지역에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지역이 가진 와인 양조의 역사, 오랜 포도나무와 특이한 화산토 토양, 가파르지만 포도나무들이 고르게 햇빛을 받을 수 있게 해주는 산악지형 등 사실 이 지역은 그 어떤 평야 지역보다도 집중력이 높은 와인을 기를 수 있는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죠. 그러나 그런 천혜의 조건만으로 쇠락한 지역의 와인 산업을 부흥시키기에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젊은 양조가들의 도전 정신과 마케팅 기획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그런 시점이었습니다. 프리오라트 지역의 와이너리들은 자신들의 포도밭에 전통적인 스페인 포도원을 가리키는 이름인 '보데가(Bodega)' 대신에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에서 주로 명품와인을 생산하는 소규모의 포도밭을 지칭하는 '클로(clos, 소유주가 다른 포도밭들의 경계를 나누기 위해 돌담(clos)을 둘러 쌓은 포도원을 가리킨다)'라는 이름을 붙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발효된 와인을 숙성하는 데 쓰는 오크통도 일반적인 스페인의 와이너리들이 쓰던 미국산 중고 오크통 대신에 프랑스산 새 오크통을 사용해서 보다 풍성하고 깊은 향이 나게 했죠.
 
이들의 이런 노력이 점차 빛을 발하면서 사람들은 프리오라트의 와인들을 명품 와인으로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가파른 산악지형 때문에 트랙터조차 쓰지 못하고 오로지 노새나 말만 사용해서 포도 재배의 전 과정을 수행해야 하는 열악한 환경조차 대규모의 공장식 생산 와인에게 지쳐가던 소비자들에게는 매력적인 요소로 비춰진 거죠.
 
이런 프리오라트 사람들의 노력은 그들의 이야기가 다큐멘터리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정점에 달합니다. 프리오라트가 어떻게 황폐화됐고, 어떤 사람들이 그 땅을 다시 황금의 땅으로 만들었는지, 그리고 고향을 등지고 떠났던 사람들마저 다시 돌아오게 됐는지 흥미롭게 쫓아가는 영화를 보다 보면 저도 모르게 프리오라트 와인을 마시고 싶은 강렬한 욕구에 빠지게 되더군요."

 

다큐멘터리 영화 <와인의 땅, 프리오라트>(원제: Priorat)의 한 장면. 프리오라트가 황폐해진 오지에서 세계 최고의 와인 산지로 거듭나게 되는 과정을 열정적으로 쫓아가는 이 영화를 보다 보면 어느새 프리오라트 와인을 마시고 싶은 강렬한 욕구를 느끼게 만든다. ⓒ 다비드 페르난데스 데 카스트로

 
신에게로 향하는 계단이라… 난 와인만큼이나 열정적인 그의 설명을 들으면서 묘한 감상에 빠졌다. 우리는 어디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고 있는 것일까? 그는? 나는? 아니, 어쩌면 오르는 게 아니라 내려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장님 설명을 듣고 나서 마시니 와인 맛도 좀 다르게 느껴지는데요?"
"하하하, 제 설명병이 도졌군요. 이런, 안주도 안 드렸네요. 잠시만요."

 
그는 냉장고에서 두툼해 보이는 고기 덩어리를 꺼내더니 얇게 저미듯이 썰었다. 이윽고 꽤 여러 점을 썰어낸 후에 뭔가 거뭇거뭇해 보이는 알갱이가 섞인 소금을 뿌리더니 기름을 살짝 두른 채로 내 앞에 내려 놓았다.
 
"한우의 홍두깨살로 만든 소고기 카르파치오(carpacio, 얇게 저민 고기나 생선살 위에 소스와 오일을 뿌려 먹는 이탈리아 요리)입니다. 원래는 우스터 소스나 레몬즙을 뿌리지만 지금은 이 와인의 풍미에 맞춰서 송로버섯(truffle) 소금과 올리브유만 뿌렸습니다. 드셔보세요."
 
생식에 익숙하지 않은 나로서는 조금 꺼려지는 요리긴 했지만, 주인장의 권유를 무시할 수 없어 한 점을 입에 넣고 천천히 씹어 보았다. 지방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붉은 살코기 위로 묘하게 동물적인 향과 쌉싸름한 기름향이 어우러져 진하고 고소한 맛이 입안에 확 퍼졌다. 그 맛이 입 안에 남은 상태에서 와인을 마셔보았다. 묵직하게 느껴졌던 와인의 맛이 순간 생고기의 맛과 어우러지면서 입안에 훅 울려 퍼졌다.
 
"오, 아까 피 맛처럼 느꼈던 와인의 맛이 생고기랑 아주 잘 어울리는데요? 이 소금과 오일도 굉장히 특이한 맛이 나구요."
"이 소금에 섞여있는 거뭇거뭇한 알갱이가 바로 송로버섯입니다. 송로버섯은 세계 3대 진미 중 하나로 꼽힐 정도인데 그 송로버섯의 향이 소금에 섞이면 특히 맛이 진한 소고기에 아주 잘 어울리죠. 오일은 싱싱한 이탈리아산 올리브오일이라 첫 맛은 쌉싸름한 풀향기 같이 나다가 곧 감귤류의 껍질에서 맡을 수 있는 맛도 느껴지고 마지막으로는 고소하게 고기의 맛을 수렴시켜주는 역할을 한답니다."
 
"예, 정말 그러네요. 와인과 마리아주도 너무 좋아요."

 
나는 다시 고기 한 점을 입 안에 넣고 천천히 씹으면서 그 맛의 여운을 즐겼다. 그가 그런 나의 모습을 흐뭇하게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전 이 프리오라트 와인들이 참 좋습니다. 인간적이라고나 할까요? 비록 전설 같은 이야기에서 시작됐지만 오늘날의 프리오라트는 어디까지나 역경에 굴하지 않은 인간들의 땀과 열정으로 쌓아 올린 와인들이니까요. 그 거칠고 척박한 땅에서 이렇게나 세련된 와인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누가 생각했을까요?"
"정말 그러네요. 저도 왠지 팬이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우리는 가볍게 건배를 하고 기분 좋게 남은 술들을 마셨다. 신에게로 향하는 계단을 하나씩 쌓아 올려가고 있는 프리오라트 사람들을 위해, 이 먼 이역의 땅에서 그들의 땀과 노력을 이 술 한 잔으로 함께 느낄 수 있는 우리 자신을 위해, 그리고 우리가 쌓아 올려갈 또 다른 계단을 위해.

(*13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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