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원고료주기
등록 2018.09.07 08:27수정 2018.09.07 08:27
"끊임 없는 정쟁과 경제 정책의 실패로 아르헨티나의 국내 정세는 늘 불안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와인을 해외에 수출할 여력이 없었던 거죠. 이런 아르헨티나 와인을 세계 시장에 소개하고 현재 가장 주목 받는 와인 산지 중 한 곳으로 꼽히게 만든 건 아이러니하게도 경쟁자라고도 할 수 있는 외국 자본들이었습니다."
 
그는 긴 설명에 목이 말랐던지 자신의 잔에 와인을 따라 천천히 음미했다.
 
"이탈리아나 스페인 등의 유럽 국가들이 대부분 자국 내에서 소비하던 와인을 수출용 상품으로 변신하게 만들어준 계기는 바로 미국 시장이었습니다. 캘리포니아라는 훌륭한 와인 생산 거점이 있었지만, 1970년대 후반까지도 미국 와인은 유럽산에 비해 품질이 몹시 낮은 싸구려 와인이라고 치부됐거든요.
 
미국의 중산층이 유럽산 와인의 맛에 눈뜨면서 유럽의 와인 생산자들은 미국 시장의 막대한 잠재력에 주목하게 됐고, 자신들의 내수용 와인들을 수출 상품으로 가다듬어 더 높은 부가가치를 올리게 된 거죠. 그러다 보니 와인의 맛과 취향도 점차 주요 소비자층인 미국 사람들의 입맛에 따라 농후하고 풍미가 짙은 쪽을 선호하게 됐어요.

그런데 무조건 수출 위주로만 가자니 국내 소비자들의 입맛도 무시할 수는 없었어요. 그래서 궁리 끝에 찾은 방법이 해외의 덜 유명하면서도 잠재력은 갖춘 포도밭들을 찾아 자신들의 양조 기술을 접목시키는 것이었죠. 이렇게 해서 유럽의 와인 자본과 기술이 미국, 호주, 남미 같은 신세계로 빠르게 유입되기 시작합니다.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꼽히는 것이 칠레였어요. 칠레는 필록세라 사태 이전의 유럽 품종들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었고, 거기에 천혜의 자연 환경까지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아주 빠른 속도로 수출용 와인들을 생산하기 시작했죠.
 
시장에서의 경쟁은 어디서나 선발 주자와 후발 주자로 나뉘기 마련입니다. 선발주자들이 칠레에서 성공적으로 합작을 이끌어내자, 상대적으로 입지가 좁아진 후발주자들은 칠레와 비슷하면서 또 다른 가능성을 가진 아르헨티나에 주목했습니다. 그렇게 외국 자본과 양조 기술이 아르헨티나로 유입되자 1990년대 후반부터 아르헨티나의 와인 산업은 폭발적으로 성장했어요."

 
그는 입이 마른 듯 다시 와인 병을 들어 자신의 잔에 따르려고 했지만, 와인 병은 어느 새 비어 있었다.
 
"이런, 손님 드릴 와인을 제가 다 마셔 버렸군요. 얘기 끝이니 새로운 와인 한 병 열어야겠는데요."
 
주인장은 내게 눈을 찡긋 하더니 안쪽 셀러에서 새로운 와인 병과 길게 썬 삼겹살처럼 보이는 것들을 도마에 얹어 들고 돌아왔다.
 
"이건 뭔가요? 이것도 구워먹는 고기인가요?"
"아뇨, 이건 스페인의 생햄인 하몬입니다. 돼지 다리를 소금에 절여 오랫동안 천천히 말려서 만든 말 그대로 햄이죠. 하몬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이건 도토리를 먹여 기른 흑돼지 고기로 만든 이베리코 베요타 하몬입니다. 이 와인에는 썩 잘 어울리는 안주죠."

 
그는 내 앞에 도마를 내밀고, 능숙한 솜씨로 새로 가져 온 와인의 코르크 마개를 열었다. 가볍게 퐁 하는 소리와 함께 코르크가 열리자 순간 화사한 꽃향기와 싱싱한 과일향이 병 입구로부터 흘러 넘치는 듯했다.
 
주인장이 내 와인 잔에 짙은 보라색의 액체를 따라주었다. 나는 그에게 배운 대로 잔을 들어 불빛에 와인의 색을 비춰 보았다. 빛이 전혀 투과되지 않는, 짙은 보라색이었다. 잔을 살짝 돌려보니 와인이 잔의 벽을 타고 마치 눈물처럼 흘러 내렸다. 눈을 감고 와인 잔을 기울여 그 향을 맡아 보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왠지 보라색의 꽃들이 떠오르는 진한 향기가 부드럽게 나를 감싸 안았다. 그 뒤로 스치는 달콤한 말린 자두의 향기. 화려하지만 뽐내지 않고, 무척이나 기품이 느껴지는 와인이었다.
 
천천히 잔을 들어 한 모금을 입에 머금어 보았다. 앞에 마셨던 말벡은 꽤나 남성적이고 거칠게 느껴졌는데, 이 와인은 그와 비슷하게 진했지만 훨씬 더 매끄러운 느낌이 혀를 통해 전해져 왔다. 묵직한 산미가 느껴지는 와인을 혀 위에서 굴려보자 이번에는 놀랍게도 초콜릿을 먹었을 때 같은 달콤 쌉싸름한 맛이 이어졌다. 이윽고 와인이 부드럽게 목으로 넘어가자 입 안에는 긴 여운이 남아 콧구멍으로 그 향기가 다시 전해지는 것 같았다.
 
산미와 화사한 꽃 향기, 그와는 또 다른 묵직하고 진한 맛이 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느낌이 마치 전혀 다른 두 가지 와인을 마시는 것 같았다. 주인장도 잠시 눈을 감은 채로 와인에 심취해 있었다. 그가 눈을 뜨고 빙그레 웃으며 내게 물었다.

"어떻습니까? 전혀 다른 맛과 향기가 느껴지지 않나요?"
"예, 한편으로는 굉장히 화려하고 가벼운 느낌인데, 또 굉장히 묵직하면서 진한 맛이 느껴졌어요. 이건 어떤 와인인가요?"
"이 와인은 아까 드신 말벡을 빚는 트라피체 와이너리의 대표적인 명품 와인, 이스까이(Iscay)입니다. 이스까이는 안데스의 고대 민족이 쓰던 잉카(Inca)어로 '둘'을 뜻하는 말이죠. 라벨 앞에 보시면 두 사람의 서명이 보이죠?"
"예. 조이 텐슬리(Joey Tensley)와 다니엘 피(Daniel Pi)라고 두 명의 사인이 있는데요?"

 

아르헨티나 트라피체 와이너리의 명품 와인 이스까이(Iscay). 잉카어로 ‘둘’이라는 뜻의 이스까이는 두 가지 포도 품종을 두 명의 전문가가 협업으로 빚는 와인이다. 이름이 가진 의미 때문에 계약이나 협상이 성공했을 때 선물하는 와인으로도 유명하다. ⓒ 이건수


"아까 말씀 드린 것처럼 19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까지 외국의 양조 기술과 자본이 아르헨티나에 많이 도입됐습니다. 그런데 역사가 유구한 아르헨티나의 와이너리들 중 몇 군데는 이렇게 외국 와이너리에 끌려가기 보다는 자신들이 주체적으로 새로운 제품과 시장을 개척하기로 결심하죠. 그 중 대표적인 곳이 바로 이 트라피체(Trapiche)였습니다.
 
트라피체의 수석 양조가인 다니엘 피는 아르헨티나를 대표하는 말벡 품종에 또 다른 포도 품종을 섞어 와인을 빚는 실험을 하는데, 처음에 선택된 품종은 프랑스에서 옛 말벡 품종을 대체해서 주로 재배된 메를로(Merlo)였습니다.

다니엘 피는 자신이 가진 말벡의 양조 기술에 프랑스의 유명 와인 컨설턴트인 미셸 롤랑(Michel Rolland)을 초빙하여 메를로 와인을 만들고 이를 50:50의 비율로 섞어 이 이스까이를 만들죠. 남성적이고 진한 말벡과 부드럽고 산미가 강한 메를로의 결합은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너무나 환상적인 조합으로 탄생합니다.

이후 2000년대 중반에 미셸 롤랑이 트라피체와의 계약을 끝내면서, 메를로 대신 보다 섬세하고 화사한 카베르네 프랑(Cabernet Franc)이라는 품종을 도입해서 말벡 70: 카베르네 프랑 30의 비율로 바꿔서 와인을 만들었지만 그 이름이 가지는 전통처럼 여전히 두 명의 전문가가 각각의 품종을 책임지고 있죠. 말벡과 카베르네 프랑은 원래의 메를로와의 조합보다 더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듣게 됩니다.
 
이런 성공에 힘입어 다니엘 피는 또 다른 시도를 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지금 드시고 계신 쉬라-비오니에 품종의 이스까이에요. 말벡이라는 아르헨티나만의 틀에서 벗어나 해외 시장에서 좀 더 인지도가 높고 대중적인 쉬라 품종에 향이 뛰어나고 특히 쉬라 품종과 잘 어울리는 비오니에를 블렌딩함으로써 이제 아르헨티나의 와인이 단순히 말벡 품종과 자연 환경에만 의존하는 게 아니란 걸 보여주고 싶었던 겁니다.

원래 이렇게 쉬라와 비오니에를 블렌딩하는 조합은 프랑스 북부 론 지방의 대표적인 품종 조합법이었어요. 그런데 프랑스인들이 변경으로만 여기고 우습게 알던 아르헨티나와 미국 캘리포니아의 와인 전문가들이 이렇게 멋진 명품 와인을 만들어냄으로써 정말 멋진 한 방을 날렸다고나 할까요? 이런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도전 정신과 자존감은 결국 아르헨티나의 긴 경제 침체와 정국 불안을 와인 산업으로 이겨내게 되는 원동력이 됩니다."
 
"이스까이는 정말 그런 멋진 역사와 배경을 가진 와인이군요."
"예, 에비타라고 아세요? 아르헨티나 대통령이었던 후안 페론의 부인으로 단순히 퍼스트 레이디가 아니라 적극적인 정치 개입으로 유명했던 에바 페론의 일대기를 그린 뮤지컬이죠. '부자에게는 악녀, 빈자에게는 천사'라고 불렸던 그녀가 불치병으로 인해 정계에서 은퇴하면서 슬퍼하는 아르헨티나의 국민들에게 유언처럼 불러주는 곡이 '돈 크라이 포 미 아르젠티나(영어로는 아르헨티나를 아르젠티나라고 발음함. 본문에서는 공식적인 국가명인 아르헨티나로 지칭했음 - 기자말)'인데요. 물론 역사적으로는 많은 논란이 있는 인물들이긴 해요. 하지만 전 이 와인을 마실 때마다 왠지 그 노래가 생각나더라구요. 시련과 역경에 굴하지 않고 결국 굴지의 와인 대국으로 일어선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기질과 정신이 고스란히 이 와인에 담긴 느낌이랄까요."
 
"말씀 들으니 갑자기 그 곡이 듣고 싶어지는데요."
"그럼 한 번 들어볼까요? 왠지 저도 지금 이 밤에는 다른 안주보다 그냥 이 노래 들으면서 이 와인을 마시고 싶어지는군요."

 
그가 빙그레 웃으며, 와인잔을 내려놓고 컴퓨터에서 그 곡을 검색해서 틀어 주었다.
 

뮤지컬 영화 ‘에비타’ 중에서. 에비타(Evita)는 아르헨티나의 퍼스트 레이디였던 에바 페론의 애칭이자 그녀의 일대기를 그린 동명의 뮤지컬 제목이다. 극 중에서 역경을 헤치고 퍼스트 레이디가 됐을 때, 그리고 불치병으로 정치에서 물러나게 됐을 때 그녀가 국민들에게 불러주는 곡이 유명한 ‘돈 크라이 포 미 아르젠티나(Don’t cry for me Argentina)’이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혼란한 정치 상황과 경제 침체를 딛고 세계 굴지의 와인 생산 대국으로 일어서고 있다. ⓒ 알란 파커

 
하지만 이제 절 지켜보면 이 모든 말들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But all you have to do is look at me to know that every world is true
제가 말이 너무 많나요? 이제 당신들에게 할 말이 더 생각나지 않네요.
Have I said too much? There's nothing more I can think of to say to you
 
그러니 나에게서 멀리 떠나지 말아요.
Don't keep your distance
난 당신과의 약속을 지켜왔어요
I kept my promise
이 미칠 것 같은 삶 속에서도
My mad existence
지금까지 이 힘든 나날 속에서도
All though my wild day
진실로 난 당신을 저버리지 않았답니다.
The truth is I never left you
아르헨티나여, 울지 말아요.
Don't cry for me Argentina
아르헨티나여 이제 더 이상 울지 말아요.
Don't cry for me Argentina-
 
난 당신들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당신들도 날 사랑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I love you and hope you love me
진정한 해답은 여기 이곳에 항상 있어요.
The answer was here all the time
비록 그렇게 보일지라도 그것들은 진정한 해결책이 아니랍니다.
They're not the solutions they promised to be
그것들은 환상에 불과하죠.
They are illusion
비록 세상 모든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열망 할지 모르지만
Though it seemed to the world they were all desired
난 그런 것들에 욕심을 낸 적이 없어요.
I never invited them in
재산이나 명예나
And as for fortune, and as for fame
 
그러니 나에게서 멀리 떠나지 말아요.
Don't keep your distance
난 당신과의 약속을 지켜왔어요
I kept my promise
이 미칠 것 같은 삶 속에서도
My mad existence
지금까지 이 힘든 나날 속에서도
All though my wild day
진실로 난 당신을 저버리지 않았답니다.
The truth is I never left you
아르헨티나여 울지 말아요.
Don't cry for me Argentina
 
물론 나도 무언가가 스스로 내게 그래 줄 것이라 기대하지 않았지만.
I never expected to
하지만 아무 것도 내게 감동을 줄 수는 없었어요.
But nothing impressed me at all
이곳 저곳 뛰어다니며 새로운 세계를 경험했던 거죠
Running around trying everything new
그래서 난 자유를 선택했어요.
So I chose freedom
저 태양 빛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 창 밖만 바라볼 수 없었어요
Looking out of the window, staying out of the sun
내 삶을 저 밑바닥 인생으로 팽개쳐둘 수 없었어요
Couldn't stay all my life down at heel
난 이렇게 해야만 했어요. ; 난 변화를 가져와야 했어요.
I had to let it happen; I had to change
 
어리둥절한 마음으로 당신 앞에 서있는 것이랍니다.
At sixes and sevens with you
비록 이렇게 멋지게 차려 입고 있기는 하지만
Although she dressed up to the nines
당신 앞에 서있는 이 소녀가 당신이 알던 그 아이라는 것을
All you will see is a girl you once knew
당신들은 날 믿지 않을 거예요
You won't believe me
 
이 모든 것을 이룬 이후에도 여전히 당신들의 사랑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이 말이죠.
That I still need your love after all that I've done
지금 내가 어떤 기분인지를 설명하는 것이,
When I try to explain how I feel
여러분들에게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렇게 쉽지 않아요.
It won't be easy, you'll think it strange
 
아르헨티나여 울지 말아요.
Don't cry for me Argentina

 

우리는 노래를 들으며 아무 말 없이 와인 잔을 들어 건배했다. 아르헨티나를 위해, 가우초들을 위해, 그리고, 역경과 시련을 딛고 일어선 사람들과 그들이 만든 이 멋진 와인을 위해. 가을 밤하늘에 걸린 달빛 아래로 귀뚜라미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9화에서 계속)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클럽아이콘11,4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