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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듣기 등록 2020.07.11 20:19 수정 2020.07.13 14:53
6.15 남북공동선언 20주년을 맞아 연속 인터뷰가 나갑니다. 이 글은 그 두번째 인터뷰입니다. [편집자말]
올해 88살의 늙은이 박종린입니다.
 
저는 1933년 중국 길림성 훈춘에서 태어나 해방되는 해에 함경북도 경원으로 들어갔지요. 27살인 59년 통신부대 소좌로 남쪽에 내려왔다가 체포되어 지금까지 예서 살고 있으니 60년이 흘렀네요. 북녘땅에서 산 세월은 고작 15년. 이곳에서 보낸 시간이 몇 배가 더 많습니다.
 
일가친척도 아무런 연고도 없었던 남녘땅, 93년 대구교도소에서 출소한 이래 소중한 인연이 많았습니다. 용학교회 임영창 목사님과 신도들, 학교 매점에서 일할 때 나를 통일 할아버지라고 부르며 따랐던 학생들, 노동운동을 하는 청년들. 함께 고통을 겪었던 장기수 동지들... 그들과 함께 한 시간은 행복했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동네에도 정이 많이 들었고 주인집 내외도 따뜻하게 대해줍니다. 아들처럼 제게 효성을 보여주는 이도 있구요.
 
나는 현재 기초생활수급자여서 한 달에 390,000원, 거기에 노인 수당 300,000원을 합쳐서 690,000원을 정부로부터 꼬박꼬박 받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4급 장애인 판정을 받아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3시간씩 요양사가 나를 돌봐주고 있습니다. 당뇨, 고혈압에 2017년부터 대장암을 앓고 있어서 약값과 건강식품비가 제법 들지만 수급자인 덕에 약값은 공짜입니다. 그래서 병든 이 한 몸, 살아갈 만합니다. 이 모두 남쪽 동포들의 배려라고 생각합니다.
 
구십을 바라보는 나이이니 살날이 얼마나 남았을지 죽기 전에 북녘땅을 밟아 외동 딸 옥희를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삶을 정리하는 마음으로 남녘 동포들에게 제가 살아온 이야기 한 토막 남기고자 합니다. 아스라한 기억들이어서 이제는 뿌옇고 그저 공백이 많을 뿐입니다.
 

올해 88세의 박종린 대장암 투병 중인 그의 집에서 ⓒ 민병래

   
두번의 무기징역 선고

"박종린을 무기징역에 처한다. 나머지 박선철, 임영찬 무죄, 박호련도 그간 대한민국에 세운 공로를 참작, 무죄를 선고한다."
 
1960년 10월 28일 서울고법 형사4부 재판장 임항절은 선고를 마치자마자 재판장을 빠져나갔다. 나는 판결이 내려지는 순간 얼떨떨했다. 방청석에서 지켜보다 무죄 판결을 받은 이들의 가족은 박수를 치고 기뻐했다. 나의 망책이었던 박호련은 고개를 돌리며 눈길을 피했다. 교도관 두 명이 다가와 내 옆구리에 팔짱을 끼고, 다른 두 명은 앞뒤로 서서 포승줄을 동여매며 수갑을 조였다.
 
형무소로 돌아와 나는 사건을 되짚어 보았다. 정리가 잘 안 되었다. 어떻게 박호련은 무죄가 되었나? 역공작의 공로를 참작하다니?
 
나는 59년 남파될 때 소좌 계급으로 911통신부대에서 일했다. 이 부대는 53년 정전 후에 모든 통신관련부서들을 모아 만든 조직이었다. 나는 여기서 통일사업일꾼들에게 모르스 부호나 난수표 등을 교육시켰다.
 
당시 48살의 군당 조직부장 한 명이 파견을 앞두고 교육중이었는데 난수표를 힘들어 했다. 접선 날짜가 다가와도 교육에 진전이 없자 나는 책임감을 느껴 "남쪽에 대신 다녀오겠다"고 상부에 제안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방학세 내무상이 나를 호출해, "나서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그는 해방 전 소련정보기관 간부였고 정권 수립 시 내무국 정보처장을 맡았던 인물이다.
 
나는 오백룡 정보호위국장에게도 자문을 구했는데 그도 역시 반대하며 '교관' 업무에만 충실하라고 했다. 오백룡은 동북항일연군에서 (경위련 연장으로) 보천보전투에 참가했고 1945년 8월 9일 88여단과 함께 함경북도 웅기에 상륙하는 등 항일투쟁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이런 경력 덕에 조선인민군 8사단장을 맡았고 나중에는 당 중앙위원까지 되었다.
 
1950년 전쟁 당시 나는 18살로 만경대혁명학원 3학년이었다. 학교 방침을 무시하고 친구들과 뛰쳐나갔다. 나는 8사단이 있던 강릉으로 가서 오백룡 사단장의 호위부대에 들어갔다. 그 인연으로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그에게 의견을 묻곤 했다.
 
내가 대리파견되는 데에는 만경대혁명학원 출신이라는 점도 걸림돌이었다. 만경대혁명학원은 항일운동열사의 자녀를 위해서 세워진 학교였다. 1947년 10월12일 평안남도 대성군에 세워져 처음 명칭은 '평양 혁명자 유가족 학원'이었다. 1948년 평양 만경대에 교사를 신축 이전하면서 이름이 만경대혁명학원으로 바뀌게 된다.
 
나의 아버지는 조국 광복회에서 항일투쟁을 하다 연길감옥에서 7년간이나 옥살이를 했다. 그때 얻은 병으로 해방후 3개월이 되었을 때 숨지셨다. 아버지의 투쟁경력 덕에 나도 만경대학원에 들어갔고 2회 졸업생 격인 내가 직접 연락원으로 나가는 걸 주변에서는 반기지 않았다.
 
그렇지만 접선 날짜는 다가오고 다른 요원을 보내기가 여의치 않아 결국 내가 내려가기로 결정됐다. 내가 만날 남쪽의 선은 박호련, 그는 방학세 내무상이 직접 관리하는 인물이었다. 함북 길주가 고향인 그는 해방되는 날에 입당해서 38보위부 정보과장을 맡았다. 그는 휘하의 임영찬이 배신해서 남쪽으로 내려가자, 문책을 받고 평양감옥에 갇혔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남쪽 군대가 올라왔을 때 미군은 그의 활용가치가 높을 것으로 보고 대북정보요원으로 포섭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박호련은 이런 가능성을 내다보고 방학세 내무상이 위장으로 투옥을 시킨 것이었다. 그는 정전 후에 중령이 되어 특무대, 첩보부대, 미정보기관에서 대북첩보업무를 수행했다. 북에서는 박호련의 위치를 뒷받침하기 위해 적당한 때 적당한 정보를 대주었다.

내가 내려간 루트는 강원도 양구 문등리의 전방 GP, 북으로 파견된 요원이 귀환하는 형식이었다. 전방 수색대가 나를 박호련에게 인계를 했고 나는 그의 짚차를 타고 서울 장충동 안전가옥으로 가서 은신했다. 3개월 기한으로 왔는데 북쪽 요원 훈련이 지지부진해 다시 3개월 연장되었다. 귀환 전날 무전기를 켜니 뜻밖에도 얼마 안 남은 (1960년) 정부통령 선거결과까지 보고 오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남쪽 체류가 길어지던 59년 12월 어느 날, 장충동 비밀가옥으로 들이닥친 특무대에 의해 나는 연행되었다. 한겨울이었는데 넓은 실내 훈련소가 취조실이었다. 벽난로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었고 쇠꼬챙이 하나가 달아올라 붉은 혀를 낼름대고 있었다. 수사관들은 그 꼬챙이를 들이밀면서 "사실대로 불라"고 윽박질렀다.
 
취조를 받아보니 이미 사실관계와 조직도가 그려져 있었다. 박호련이 총책이고 그의 수하로 남쪽에 와 중령 계급장을 달았던 임영찬, 그리고 민주당 훈련부장인 박선철 이 세 명이 방학세의 지시에 따라 모란봉간첩단을 만들었고 나는 무전기 2대를 가져와 연락담당을 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거기에 맞춰서 진술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었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60년 3.15 정부통령선거를 앞두고 민주당에게 판세가 뒤지자 타개책이 필요했다. 그래서 민주당이 연루된 간첩단 사건으로 반전의 기회를 잡고자 '모란봉'이라 이름을 짓고 민주당 당료들과 의원들을 엮어 나간 것이다.
 
그런데 특무대의 이 작전에 대해 당시 장도영 육군 정보국장도 "잘못한 일이다. 박호련은 대북첩보라인에서 중요한 인물인데 그렇게 써먹어서는 안 된다"며 직간접적인 불만을 드러냈다. 결국 2심 재판에서 박호련은 대한민국에 공을 많이 세웠다고 무죄 방면이 되었다. 그는 북쪽의 기대와 달리 남쪽에 더 충성하는 이중 스파이였던 것이다.
 
나는 그 후 1961년 2월18일 대법원 형사부 오필선 재판장으로부터 무기징역 확정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서울형무소에서 대구 교도소로 이감이 되었다.
 
대구교도소에서는 장기수들이 많았다. 나는 여기서 한 교도관의 도움으로 라디오를 구해 바깥 소식을 청취하고 소내에 전파하면서 '재소자 인권투쟁'을 전개했다. 그런데 라디오가 발각되자 중앙정보부 대구경북지부는 반국가단체와 통신을 시도했다며 '붉은 별'사건이라 작명하여 나와 재소자 몇 명을 묶어 기소했다. 나는 결국 76년에 다시 무기징역을 언도받아 '쌍무기수'가 되었다.
 
긴 징역으로 나는 건강이 계속 나빠졌다. 전향공작 때 당한 고문 후유증 때문인지 늘 시름시름 앓았다. 93년에 접어들면서는 몸무게가 겨우 40kg이 넘을 정도로 위태로웠다. 그 무렵부터 병보석 얘기가 나왔지만 법무부에서는 바깥에서 받아줄 인수자를 요구했다.
 
마침 같은 교도소에 있던 전국농민회 배종렬 회장이 무안의 용학교회 임영창 목사에게 연락을 했다. 임 목사는 1989년 평양방문 이래 장기수 구명을 위해 노력하는 문익환 목사의 제자였다. 그 후로도 내 몸 상태가 더욱 악화되자 전향서를 써야 내보내 준다던 대구교도소는 목사가 쓰는 신병 각서로 대신하기로 하고 병보석을 결정했다. 마침내 나는 34년의 징역을 끝내고 93년 12월 24일 대구교도소 문을 열었다.
 

평생 동지 강담 선생과 함께 한 박종린 왼쪽의 강담 선생은 2020년 여름 현재 폐암 4기로 2차 송환을 기다라고 있다 ⓒ 류경완 제공

 
좌절된 1차 송환
 
"선생님은 전향자로 분류되어서 이번 송환에 해당이 안 됩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나는 34년을 살면서 그 가혹한 전향공작 때도 온 몸으로 버틴 사람입니다."

 
나는 다급한 마음에 전화기를 붙잡고 사정하다시피 말했다. 2000년 6.15선언으로 '비전향 장기수' 송환이 합의되자 나도 들뜬 마음에 고향 갈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41년 만의 귀향이다. 그런데 전향자여서 안 된다니... 알고 보니 목회자들의 신병인수서가 '종교를 받아들인 것'이고 '종교 활동은 사상적 전향'이라고 통일부에서는 판정한 것이다. 내가 전향자로 분류되어 송환 명단에서 탈락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목사들은 통일부에 강하게 항의했다
 
"전향 여부를 기준으로 하다니, 강제전향공작을 당신들은 인정한다는 것이냐."
"박종린 선생은 우리 목사들이 신병인수서만 썼을 뿐이다. 전향의 전 자도 없었다."
 
통일부에 여러 경로로 이의를 제기했지만 이미 결정되었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나는 할 수 없이 9월 2일 1차 송환을 포기하고 2차 소환을 기다리기로 했다(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고 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장기수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기뻤던 그 날, 내게는 혹독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내 로인숙이 평양으로 돌아온 장기수들을 환영하는 행사에서 나를 찾다가 그만 쓰러져 세상을 떠난 것이다. 북측에서 이번 명단에 없다고 알려 주었지만 아내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나왔다가 상심이 커 실신하고 만 것이다.
 
사실 내려오는 날도 "잠깐 연락만 전해주면 된다"고 마실 나오듯이 집을 떠났다. 아내는 그때 27살, 손도 변변히 잡아주지 못하고 3개월 된 딸 옥희의 볼만 한번 비벼주고 나왔을 뿐이다. 생사연락도 못한 채로 41년이나 흘렀으니 젊은 아내는 과부로 평생을 살아온 셈이다. 아내는 나를 기다리며 고맙게도 88년까지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송환된 사람들 속에서 내가 있었다면 그 오랜 응어리가 조금이나마 풀렸을 텐데...

스치듯 만난 옥희, 눈물 속에서 헤어지고
 
"박종린 선생, 저기 잠시만..."
 
6.15공동선언 7주년을 기념하는 민족통일 대축전 남측참가단이 귀환하려고 버스에 오르던 참에 내 옆으로 북의 안내원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리고 통제선 바깥에 있는 한 가족을 가리켰다.

손수건으로 입을 틀어막고 흐느끼면서 내게 깊은 절을 하는 여인, 그 옆에 중년남자, 그리고 아이 둘. 폐막식이 열렸던 평양 태권도 경기장에서도 내게 눈길을 보냈던 그 여자였다. 아, 필경 옥희 그리고 옥희의 가족인 게다. 59년 잠자는 얼굴에 볼 한번 비비고 헤어졌던 바로 그 딸이다.
 
눈물 속에서 한 발 한 발 다가오는 옥희의 모습은, 연길 감옥으로 아버지 면회를 가려고 옥수수를 싸던 어머니의 작은 어깨와 닮았다. 내가 떠나오는 날, 고구마가 담긴 도시락을 건네며 눈물짓던 아내의 눈매와도 닮았다.
 
모란봉 간첩단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받던 날, 내 품에서 잠들던 아내의 살내음과 꼬물꼬물대던 옥희의 발가락이 떠올랐다. 전향공작 고문을 받을 때는 "금방 돌아올 거죠?"라고 애처롭게 묻는 아내의 목소리와 옥희의 옹알이가 들렸다. 1차 송환 명단에서 배제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언제 돌아올 거예요?"라는 물기 어린 아내 목소리와 옥희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발걸음을 비틀대며 손을 추어올리고 옥희 쪽으로 한걸음씩 한걸음씩 옮기는데 "버스가 출발할 예정이니 빨리 탑승해달라"는 방송이 계속되었다. 1호차는 조금씩 움직이기까지 했다. 영문을 모르는 우리 버스 일행들은 어서 올라오라고 손짓을 했다.
 
모든 게 뿌옇다. 아버지 상여가 나가는 날, 어머니는 우리 어린 형제들을 앞세우고 에고에고 곡을 했다. 팔공산에서 네이팜 탄으로 온통 불바다가 될 때 나는 엄마를 불렀다. 친구와 손을 잡고 무서워서 함께 울었다. 대구교도소 망루 밑 징벌방에서 새벽 이슬을 덮고 잘 때 아내의 분 냄새가 그리웠다. 떠나올 때 나를 꼭 잡아주었던 따뜻한 손이 그리웠다. 아내가 1차 송환자 무리에서 미친 듯 나를 찾다 쓰러졌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지팡이를 집고 밤거리를 헤맸다. 소주도 들이켰고 내 운명을 욕하고 저주했다. 모든 게 뿌옇고 뿌열 뿐이다.
 
나는 2007년 6월 14일 6.15 공동선언 7주년 민족통일 대축전에 참가했다. 장기수 배려 차원으로 대표단에 선정되어 평양에 가게 된 것이다. 1차 송환이 좌절되었지만 꿈에 그리던 북녘땅을 밟았다.
 

2007년 6.15선언 7주년 민족대축전 참가 당시 박종린. 오른쪽은 당시 범민련 남측본부 이경원 전 사무처장. ⓒ 박종린 제공

   

그렇지만 주석단 배치에 대한 입장 차로 떠나는 날까지 거의 행사를 하지 못하고 호텔 방에만 묶여있었다. 떠나는 날인 6월 17일에야 비로소 공식 행사가 폐회식을 겸해 열렸다. 나는 체류 기간 중 필시 딸을 만나리라 기대했지만 분위기가 그러니 마음만 초조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는데 버스에 오르기 직전에야 딸의 얼굴을 본 것이다.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선생님, 그리 우시면 몸 상해요"라고 주변 사람들이 걱정을 많이 했다. 내려오는 길 내내 창밖에는 부슬비가 떠나질 않았다.
 
나는 지금 인천 근처에서 살고 있다. 무안 용학교회에서 2000년 9월에 올라왔다. 언제가 이루어질 2차 송환을 가까이서 준비하고 싶었다. 마침 1차 송환자들이 올라가면서 두 선생이 함께 살던 과천의 집이 비게 되었고 남긴 보증금이 3천만 원이나 있었다. 덕분에 내가 그곳에서 기거하게 되었다. 그 종잣돈 3000만 원으로 집값 비싼 서울 근교에서 버티고 있다.
 
나는 2017년 8월에 대장암 판정을 받았다. 고혈압과 당뇨병, 기관지, 천식까지 있다. 발병 초기에는 대장암 통증이 2~3시간 간격으로 와서 제대로 식사도 못했다. 다행히 지인을 통해 북에서 만든 약 '금당' 30통을 구했고 이 효험 덕분인지 다소 좋아져 밥 먹는 게 편해졌다. 그렇지만 오늘도 암세포는 내 몸을 조금씩 갉아 먹고 있다. 기력도 하루하루가 다르다. 귀가 어두워져 대화도 힘들다. 이제는 정말 삶을 정리하는 일만 남았다.
 

거의 모든 일과를 이제는 침대에서 보낼 정도로 기력이 쇠했다. ⓒ 민병래

   
두 개의 나라, 하나의 조국
 
여기까지 남녘 동포들에게 남기고픈 얘기를 정리했습니다. 남녘 동포들이 힘들게 일해 내는 세금으로 매달 69만원, 거기에다 요양보호까지 받고 있으니 돌아보면 남녘 동포들은 제게 선물이고 대한민국의 복지제도는 저를 지탱해주는 큰 힘이었습니다. 다시 한번 남녘 동포들에게 마음속 깊은 인사를 전합니다.
 
마지막 소원이라면, 1차 송환 때 못 갔던 10여 명 동지들과 판문점을 통해 북으로 가는 것입니다. 가서 눈길만 주고 받은 외동딸 옥희 그리고 사위와 손주들을 만나고 싶습니다. 어머니와 아내 묘소에도 참배를 하고 싶습니다. 고통만 안겨주었으니 그렇게나마 사죄를 드리고 싶습니다. 일본 감옥에서 고생하셨던 아버지 박승진의 묘소에도 술 한잔 올리고 당신 자식도 부끄럽지 않게 살았다고 고하고 싶습니다.
 
저는 34년간 교도소에 있었습니다. 그저 지시를 전달하고 교도소 내 인권투쟁을 벌인 정도였습니다. 내게 내려졌던 34년은 분단이 안긴 과도한 형벌이고 양심과 사상을 옥죈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죽음과 함께 이런 야만의 세월이 끝나길 소망해봅니다.
 
제 마음에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두 개의 나라가 있습니다. 그리고 통일코리아라는 하나의 조국이 있지요. 어서 하나의 나라가 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1차 송환이 좌절되어 허망한 마음일 때 아내가 송환된 장기수 환영행사에서 미친 듯 나를 찾아 헤매다 쓰려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저 죽고 싶었습니다. 그때 한용운 선생의 글이 제 마음을 붙들어주었지요. 이 글을 나누면서 제 얘기를 마칠까 합니다.
 
<나룻배와 행인>이란 시입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나를 흙발로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오시면, 나는 바람에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말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못다 한 이야기
 
1. 박종린 선생의 인생이야기는 몇 차례에 걸쳐 구술되었습니다. 이 글의 전문은 민플러스(http://www.minplusnews.com)에 8월 초 게재될 예정입니다.

2.  '모란봉 사건'은 당시 사건기사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붉은 별' 사건은 기사화된 부분이나 판결문을 구할 수 없어 박종린 선생의 기억에만 의존해 썼습니다.

3.  이 얘기들을 두 번째로 구술하는 날 '남북연락사무소'가 폭파되었습니다. 잠시 얘기가 중단되었지만 박종린 선생은 "역사는 희생을 먹고 나아간다고 하지만 가슴이 철렁하고 마음이 아프다. 길게 보면 가야 할 길로, 흘러가야 할 길로 가는 게 역사라 생각한다"고 느낌을 말했습니다.
 
<프로필>

1933년 중국 길림성 훈춘에서 태어남
1945년 해방되는 해 함경북도 경원으로 귀향
1945년 11월 조국광복회 항일투사 아버지(박승진) 운명
1947년 안농중학교에서 만경대 혁명학원으로 편입
1950년 오백룡사단에 배속되어 조국전쟁에 참가
1959년 911 통신부대 소좌로 남쪽에 대리파견
1960년 '모란봉 간첩단'사건으로 무기언도
1976년 '붉은 별'사건으로 무기언도
1993년 12월 24일 성탄절 특사형식으로 병보석 석방
1993년 무안의 용학교회 등에 거주하면서 중학교 매점에서 근무
2000년 과천으로 이사
2007년 6월 14일 6.15 공동선언 7주년 민족통일 대축전에 참가
2017년 대장암 판정, 투병중.

<박종린의 사진들> 
 

박종린의 팔순 사진 장기수 동지들과 양심수후원회가 마련해 준 자리다 ⓒ 박종린제공

   

비전향 장기수 2차 송환 촉구 모임에서 10여명 되는 비전향 장기수들은 2차 송환을 기다리고 있다. ⓒ 박종린 제공

   

2020년 6월 초 1차 구술 당시 1차 구술을 마치고 선생의 집앞에서 된장찌개를 먹으러 식당에 갔을 때 찍은 모습 ⓒ 민병래

   

침대에서 휴식을 취하는 박종린 거의 대부분 일과를 지금은 누워서 생활할 수밖에 없는 상황 ⓒ 민병래

   

당시 모란봉 사건에 대한 기사 1960년 당시 기사화된 사진 캡처본 ⓒ 신문기사 스크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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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수필로 쓰는 만인보" 줄여서 '사수만보'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 민초들의 이야기를 빚어내는 일에서 보람과 즐거움을 느낍니다.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삶에 조명을 비추고 의미를 부여코자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