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0 20:02최종 업데이트 20.07.10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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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정동 골목 풍경 ⓒ 청계천을지로보존연대 최혁규

 
도시가 책이라면 '걷기'는 도시를 '읽는' 행위다. 정독, 통독, 속독, 다독, 소독, 만독, 낭독 등 책을 읽는 다양한 방법이 있듯이, 도시 역시 속도에 따라, 감각에 따라 다르게 읽을 수 있다.

책을 어떤 방식으로 읽든, 그 실험적 독서법을 모두 적용할 수 있는 책이 있다. 바로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저서 <천개의 고원>이다.


두께 약 6cm, 무게 1467g의 두껍고 묵직한 이 책에는 '리좀'이라는 핵심 개념이 나온다. 리좀은 쉽게 말해 온갖 사슬 또는 줄기들이 연결돼 있는, 어떤 지점이든 열려 있어서 한 점으로 정의내릴 수 없고, 서로 이질적인 것들이 다양하게 연결·접속돼 있는 것을 뜻한다.

마찬가지로 도시를 읽는 다양한 방법론을 적용할 수 있는 장소가 있다. 나는 이 공간을 '천개의 도시산업 생태계를 읽을 수 있는 곳'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그곳은 바로 을지로다. 을지로가 책이라면 그 책에는 수백, 수천 개의 도시산업의 생태계가 담겨 있다.

찢겨진 도시, 을지로
 

을지로의 촘촘 도시산업생태계를 이루고 있는 기술의 장인들이 사라지고 있다 ⓒ 권은비

 

청계천·을지로 일대의 전자부품 자재상. ⓒ 청계천을지로보존연대 최혁규

 
한 가지 상상을 해보자. 세상에서 하나뿐인 진귀한 책을 상상해보자. 온갖 흥미진진한 이야기와 신기한 것들을 만들 수 있는 방법들이 집대성된 책이다. 두께는 만만치 않지만, 당신은 그 책을 충분히 읽을 준비가 되어 있다. 아니, 어쩌면 이미 몇 번을 반복해서 읽었지만 읽고 또 읽어야 하는 책을 상상해보자.

어느 날 책을 읽어 내려가는데 책이 듬성듬성 북북 찢겨져 있다. 어느 단락은 아예 통째로 날아가 버렸다.

청계천 을지로 일대가 한 권의 책이라면, 지금 그 책은 찢겨져 있고, 어느 부분은 아예 통째로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이것은 옮지 않은 비유다. 을지로는 책이 아니다. 삶의 공간이다. 지금 을지로에서 오랜 시간 형성된 도시산업 생태계의 연결망은 끊어지고 있고, 그곳에 터를 잡은 천개의 기술과 천개의 삶도 사라지고 있다. '청계천을지로보존연대'에 따르면, 2018년부터 이 일대 400개의 제조·유통업체들은 강제퇴거를 당했고, 추가로 약 6천여 개의 업체가 퇴거 위기에 처했다고 한다.

을지로의 생태계는 '리좀'과 같다. 그곳은 각기 다른 업종, 업태의 사업장들이 직간접적으로 연결돼 있는 도시산업 생태계 그 자체다. 수년에 걸쳐 형성된 촘촘한 을지로의 생태계는 어느 일부가 사라지게 되면, 다시 재생되기 어려운 구조를 가지고 있다.

기술은 없고 예술만 하는, 한낱 미술가인 나는 한 학기 수백만 원의 등록금을 내야 하는 예술학교에서는 가르쳐주지 않던 실질적 제작방법과 조언들을 을지로에서 접할 수 있었다.

'사장님, 뭐 좀 만들어보려고 하는데요'라고 말하며 내미는 스케치를 보고 을지로의 기술자들은 이것의 접합이 최소 몇 cm여야 하는지, 재료에 따라 가공방법은 어떻게 달라지는지 알려줬다. '이 주물은 저 업체가 잘하고, 저 연마는 이곳이 잘한다'고 말해주곤 했다. 그것은 세상 어느 책에도 나와 있지 않은 '제작의 진리'였다.

세상 어느 책에도 없는 진리의 삭제
 

선반기계로 금속을 정밀하게 가공 중인 기술자의 손. ⓒ 청계천을지로보존연대 최혁규

 
미술가에게 청계천 을지로 일대는 걷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공간이었다. 그것은 마치 어느 독서광이 수천, 수만 권의 진귀한 책들이 모여 있는 도서관에 있을 때의 설렘과 같을 것이다.

청계천 을지로 일대의 어느 블록은 전기와 조명가게들이 모여 있고, 어느 블록은 목재상과 목재 가공업체, 또 다른 블록에는 타일과 욕조인테리어, 어떤 블록에는 철재가공과 벤딩, 용접, 주물 등의 가공업체들이 거대한 산업 생태계를 이루고 있었다.

설치미술가라면 청계천 을지로 일대의 지도 정도는 머릿속에 그려놓고 필요한 곳을 구석구석 찾아다닐 수 있어야 한다는 묘한 자부심도 있었다. 이 일대에서 지도 앱 속 현재 위치 표시는 오히려 오류가 날 정도로 청계천 을지로 일대의 생태계는 매우 촘촘했다. 오로지 그곳 구석구석을 정직하게 걷는 자만이 을지로의 지도를 머릿속에 그릴 수 있었다. 

단골 아크릴가공업체 사장님에게 '요즘 새로 나온 아크릴은 뭐가 있어요?'라고 물으면 돈도 받지 않고 큼지막한 아크릴을 종류별로 손에 쥐여줬다. 대형주물공장에서 '내가 구상한 주물은 절대 불가능하며 가능하더라도 몇천만 원이 필요하다'고 했던 일을, 을지로의 어느 작은 주물공장 사장님은 쿨하게 며칠 만에 해내셨다. 

지금, 불가능을 가능하게 했던 주물공장은 사라지고 없다. 오랜 내공의 기술자와 장인, 각종 부품들의 쓸모를 줄줄이 꿰고 있던 상인들이 사라지고 있다. 오후 6시가 되면 청계천과 을지로 일대의 듬성듬성 철거된 공간은 재난지역처럼 을씨년스러워지고, 남아 있는 상점과 공장들은 문을 닫는다. 아주 잠시 거리는 쓸쓸해지는 듯하다가, '힙지로'라는 새로운 을지로의 모습으로 탈바꿈된다.   

오늘, '도시 산책자'라는 이름의 연재를 위한 을지로 산책은 일찍이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사실 산책은 시작도 못했다. 을지로 세운지구 일대의 최대 도시재생사업으로 꼽힌다는 주상복합단지의 부지를 마주하니 다리에 힘이 풀렸기 때문이다.
 

입정동 일대 공장들 바로 앞에서 공사를 진행하고 있는 모습. ⓒ 청계천을지로보존연대 최혁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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