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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듣기 등록 2020.06.30 12:02 수정 2020.07.10 10:58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한 장면. ⓒ 수도영화사


정치적 올바름과 표현의 자유 둘 중 무엇이 먼저일까. 아마 누구도 쉽사리 답할 수 없는 문제일 것이다.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늘 격렬한 토론을 유발하던 이 논란은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둘러싸고 다시금 불거지게 되었다.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사망한 조지 플로이드 사건과 관련하여 미국 내 인종차별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아지면서 'Black Lives Matter(흑인 생명도 소중하다)' 운동이 촉발되었고, 동영상 스트리밍 회사인 HBO 맥스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인종차별을 부추기는 작품이라며 자사의 서비스 목록에서 제외한 것이 계기였다.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잠시 고개를 갸우뚱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인종차별 담론이 잘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문제점

어린 시절 영화를 보고 싶을 때면 달력을 잘 보아두었다가 집 근처의 도서관으로 향하곤 했다. 도서관에서는 매월 정해진 날짜마다 커다란 강당에서 영화를 무료로 상영했었는데, 지금처럼 영상물이 풍족하지 않았던 시기이기에 그렇게 영화를 볼 수 있는 가끔씩의 기회가 얼마나 소중했는지 모른다. 거기에서 참으로 많은 작품을 보았다. <십계> <벤허> <카사블랑카> 등 주로 고전 명작들. 그리고 그렇게 봤던 영화들 중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도 있었다.

초등학생인 내가 보기에 다소 난해하고 딱딱했던 다른 작품들과 다르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대단히 재미있었다. 일단 흑백 영화가 아니었고, 음악이 아름다웠고, 출연배우들 또한 대단했고, 스토리 역시 감동적이었다. 그 뒤로 집에 비디오 기계가 들어오고 동네에 비디오 대여점이 생긴 이후로 가끔씩 해당 비디오를 빌려다가 여러번 돌려보곤 했다. 아마 대학생이 될 때까지도 그랬을 것이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거야"라는 극중 대사는 어려울 때마다 나를 붙잡아주는 수많은 말들 중 하나가 되어주기도 했다.

그렇기에 내 기억 속 그토록 아름다운 영화가 인종차별을 부추긴다는 주장이 와닿지 않았다. 결국 의문을 품은 채로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 오랜만에 다시금 찾아보게 되었는데,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일단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이런 문구와 함께 시작한다.

"바람과 함께 사라진 하나의 사회. 예의바른 신사들과 목화밭의 땅이던 옛 남부가 있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지방은 기사도가 살아있는 마지막 땅으로, 이곳에서 기사들과 아름다운 귀부인, 주인과 노예를 마지막으로 보게 됩니다. 책 속에서나 찾을 이곳은 이제 잊지 못할 꿈에 불과합니다."

여기에서부터 느낄 수 있지만 이 영화는 노예제가 존재하던 과거의 미국 남부 사회를 대단히 그립고 아련한, 향수 어린 공간으로 그려낸다. 남북 전쟁을 계기로 점차 무너져가는 남부를 매우 안타까운 시선으로 비련의 주인공처럼 바라본다. '주인'과 '노예'를 마지막으로 보게 된다면서, 책 속에서나 찾을 수 있는 꿈과 같은 장소라고 지칭한다.
 
주요 등장인물은 모두 백인이며, 흑인 '노예'들의 '주인'이었을 그들은 문자와도 같이 모두 아름다운 귀부인과 기사도 정신을 갖춘 인물로 묘사된다. 유일하게 비중 있는 조연인 흑인 유모 역할의 해티 맥대니얼은 복잡하고 입체적인 내면을 지닌 한 명의 개인으로서가 아닌, 감칠맛을 더하기 위한 '감초'로서 우악스럽고 드센 모습만을 보여줄 뿐이다.

영화 속에는 10세 남짓의 흑인 여자아이들이 낮잠에 빠져든 '주인 아씨들'을 향해 부채질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는데, 이러한 장면들을 보다 보면 영화 속 흑인을 백인과 '동등한' 인간으로 느끼기가 쉽지 않다. 마치 '배경'처럼 기능하는 그들은 개나 고양이 같은 가축, 또는 청소기와 세탁기 등의 가전, 혹은 그럴 듯하게 구색을 맞추는 공기정화식물과 같은 존재로서만 느껴질 뿐이다.
 
그런데 어릴 적 그렇게나 자주 보았으면서도 이런 사안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니! 영화의 내용이 아니라, 그와 같은 영화를 보면서 이전에는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다는 부분이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흑인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한 장면. ⓒ 수도영화사


이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시대가 변했으므로 고전 명작을 오늘날의 기준으로 논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과거에는 과거 나름의 기준이 있다면서 말이다. 그러나 시대가 달랐으며 윤리적 기준이 달랐다는 것은 면죄부가 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저러한 작품이 '명작'이라 칭송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우리가 살았던 과거의 시대가 야만적이었으며 나를 포함하여 해당 작품을 사랑했던 많은 이들이 세상사를 백인 중심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는 방증이다. 시대가 변해 가만히 있는 훌륭한 작품에 괜시리 비판적인 잣대를 들이대며 시비를 거는 것이 아니라, 태생부터 지니고 있었던 문제를 지금까지는 관객들이 전혀 알려고도, 인식하려고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이 작품이 엄청난 칭송을 받았을 당시, 영화를 바라보는 흑인들의 마음은 어떠했을 것인가. 백인 주인에 의해 강간 당하는 흑인 노예의 삶, 부모가 노예이므로 그 자식 또한 자동으로 노예가 되는 삶, 이리 저리 금전적 이해관계에 의해 사고 팔리는 삶, 똑같은 인간으로 태어나 누군가는 낮잠을 잘 동안 그 옆에서 부채질을 해야만 하는 삶을 실제로 살았던 이들의 마음 말이다.
 
흑인 노예제를 둘러싼 야만과 아픔이 이 영화에서는 모조리 생략되어 있으며, 오로지 스러져 가는 남부와 백인 자신들에 대한 연민만이 시종일관 떠돌고 있을 뿐이다. 실제로 수많은 백인들, 특히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같은 인물들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꼽을 동안, 많은 흑인들에게 이 영화는 최악의 작품에 다름 아니었다.

이렇게 말하면 다시금 예술작품에 대해 무조건 획일적인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옳지 않다는 이야기가 나올지도 모른다. 무너져 가는 남부를 살았던 백인들에게도 나름의 고충이 있었으며, 그들에게도 삶의 애환이 있었다고, 그 지점을 조망하는 것 또한 문학과 예술의 역할이라고.

물론 그 이야기 또한 맞다. 무너져 가는 남부를 배경으로 당대 인물들의 복잡한 내면을 그린 작품은 여태껏 많았다. 미국의 대문호로 꼽히는 윌리엄 포크너의 작품 대다수가 그러하고, 또 다른 남부 작가인 플래너리 오코너의 많은 작품이 그러하다. 하지만 그들의 작품에서는 적어도 옛 남부가 무조건적인 유토피아로 그려지지는 않았다.
 
윌리엄 포크너는 붕괴하는 남부를 바라보며 괴로워하는 인물들을 그리는 동시에, 노예제도가 얼마나 야만적이었는지, 그런 인물들이 스스로에 대해 얼마나 자괴감을 느끼고 고통스러워했는지를 같이 조망했다. 그저 남부의 모든 것을 동화처럼 아름답고 아련하게 그려내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는 사뭇 다른 지점이다.

물론 인종차별적 논란이 있다고 하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지닌 모든 의의를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해당 영화의 존재를 말살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것도 아니다. 비록 인종차별적 요소는 포함했으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여전히 아름다운 영화다. 옛 남부의 풍경, 아름다운 인물들과 음악, 과거에 대한 향수 등 인간의 다양한 감정이 녹아 있다. 실제로 HBO는 논란이 불거지자 결국 영화가 지닌 문제점을 토론하는 영상과 함께 서비스 리스트에 작품을 복귀 시키기도 했다.

다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종종 '표현의 자유'를 근거로 즐기고 향유하는 것들이 실은 누군가의 고통과 눈물을 담보로 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표현의 자유를 주장할 동안 그 이면에는 실제로 해당 문화를 통해 억압받고 상처를 입는, 심지어는 목숨까지 잃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예술 작품을 단지 예술 작품으로서만 바라볼 수 없는 이유이다. 예술은 늘 삶과 이어져 있다. 표현의 자유와 정치적 올바름 중 무엇이 먼저인지를 생각할 때, 우리는 늘 그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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