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08 08:49최종 업데이트 20.06.08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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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로스 폴라즈 리슬링 에디션(Schloss Vollrads Riesling Edition) 2018 ⓒ 고정미

 
나는 한국 사람이다. 일부러 시간을 내 와인을 마실 때는 그 와인의 성격에 맞춰 안주를 따로 준비하지만, 일상에서는 밥, 국, 쌈, 고추장, 마늘, 콩나물, 도라지, 젓갈 등을 즐겨 섭취한다. 갓 지어 온기를 품은 고슬고슬한 쌀밥을 즐기며, 고추를 거리낌 없이 고추장에 찍어서 먹는다.

간이 적당히 스민 돼지불고기, 시고 얼큰한 김치찌개, 담백하고 졸깃한 떡국을 떠올리면 입에 침이 고인다. 안타깝게도 이런 한국 음식에 두루두루 잘 맞는 와인이 떠오르지 않아 불행인지 다행인지 평소 식사 때에는 와인을 곁들이지 않았다.


반주로 막걸리나 소주를 추천할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원래 술을 즐기지 않는 편이다. 그러면 도대체 와인은 왜 마시냐고? 와인은 나에게 오로지 음식이다.

독일의 대표적 화이트 와인 리슬링이 한식과 꽤 잘 어울린다는 얘기를 종종 들었다. 심지어 국물 있는 떡국과의 궁합도 괜찮다는데, 와인 애호가로서 호기심이 발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 세계 리슬링의 60% 이상이 독일에서 재배될 정도로, 독일은 리슬링의 나라다. 사실 예전(2018년 6월)에 리슬링을 마셔봤다. 그때는 화이트 와인에 해산물이라는 공식에 얽매여 별다른 고민 없이 생선구이와 곁들였는데,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아 한동안 잊고 지냈다. 그런데 의외로 한식과 잘 어울린다니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 지난 5월 이마트 영등포점 와인 장터에서 35,000원에 슐로스 폴라즈 리슬링 에디션(Schloss Vollrads Riesling Edition) 2018을 판매하길래 한식과 곁들여 마실 목적으로 구매했다. 슐로스 폴라즈Schloss Vollrads는 회사명, 리슬링Riesling은 포도 품종, 에디션Edition은 제품명이다. 
 

슐로스 폴라즈 리슬링 에디션 2018 전 세계 리슬링의 60% 이상이 독일에서 재배될 정도로, 독일은 리슬링의 나라다. ⓒ 임승수


적당한 시기를 살피다가 마침 아침에 먹다 남은 떡국도 있어서 6월 1일 월요일 저녁에 리슬링의 스크류 캡을 열었다. 한식과의 궁합을 다양하게 실험하기 위해 숯불 돼지 불고기에 상추쌈도 배달 음식으로 주문했다. 역시 한국인이라면 불고기에 쌈 아니겠나. 떡국, 쌀밥, 상추쌈, 돼지불고기, 마늘, 쌈장이라는 터프한 환경에서 홀로 외로운 독일의 리슬링이 어떤 퍼포먼스를 보여줄 수 있을지 기대 반 우려 반의 심정이었다.

떡국을 한 숟갈 떠서 삼켰는데 아침에 먹다 남은 것이라 불어터졌다. 한우를 우려낸 국물맛은 여전히 수긍할 수 있었으나 가래떡 특유의 졸깃함이 상실되었다. 이 아쉬움을 리슬링이 달래줘야 할 텐데.

속는 셈 치고 시원하게 칠링한 리슬링의 향기를 맡다가 한 모금 삼켰다. 오호! 의외로 괜찮은데? 리슬링의 과하지 않은 산미, 여운 있는 단맛이 균형을 이뤄 넉살 좋은 영업사원처럼 떡국의 담백한 풍미에 스며드는 것 아닌가. 1차 실험 통과다.

떡국은 그렇다 치고, 양념 돼지불고기를 품은 상추쌈과는 어떠할지 궁금하구나. 2차 실험에 들어갔다. 상추에 쌀밥을 한 숟갈 얹고 그 위에 돼지불고기를 한 점 올린 후 쌈장을 발라 한국 음식의 우수함을 전하려는 외국인 유튜버처럼 우걱우걱 씹어댔다.

으깨어져 찐득해진 밥알들, 그 안에서 동물성 단백질의 위력을 과시하는 양념 발린 돼지불고기, 그 둘 사이의 간극을 적절히 메우는 쌈장의 절묘한 간, 식물성 섬유질로 이들 모두를 감싸주는 상추. 그 자체로 빈틈없는 맛의 완전체인 상추쌈에 과연 리슬링이 낄 자리는 있을 것인가?

쌈을 삼킨 후 여운이 가시기 전에 리슬링을 한 모금 들이켰다. 어라! 이놈 보소? 참으로 유들유들하구먼. 은은한 풍미의 화이트 와인인 주제에 그 빽빽하고 촘촘한 상추쌈의 풍미에서도 나름 기죽지 않고 자연스럽게 존재감을 드러낸다.

한식은 향신료를 많이 사용하고 자극적인 간이 많은데, 이렇게 은은한 놈이 한식의 강렬한 풍미와 조화를 이루는 동시에 자존감도 잃지 않으니 기특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2차 실험 통과!
 

한식과 리슬링의 현장 불어터진 떡국, 돼지 불고기 상추쌈, 심지어 고추 장아찌까지 독일 와인 리슬링과의 만남을 기다리는 중이다. ⓒ 임승수

   
기왕 이렇게 된 것 극한체험이다. 바로 눈앞에 고추 장아찌가 보인다. 그놈을 한 입 베어 와작와작 씹어 넘긴 후 리슬링을 입안에 주입했다(미안하다! 리슬링아!). 그런데 이토록 짜고 맵고 신 고추 장아찌와도 궁합이 나쁘지 않네? 평소에 배구 경기를 즐겨 보는 것도 아닌데, 이 순간 토스를 올려주는 세터가 떠올랐다.

아무리 불안정한 리시브더라도 씩 웃으며 편안하게 토스를 올려 손쉽게 스파이크를 때릴 수 있도록 해주는 세터가 있다면 바로 리슬링이 아닐까 싶었다. 리슬링이 여러 음식과 두루두루 어울리는 이유는, 은은하고 싱그러운 과실 향에 신맛과 단맛이 모나지 않게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풍미가 신맛이나 단맛 한쪽으로 쏠렸다면 간이 강한 한식과 조화를 이루기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리슬링이라고 해서 다 비슷한 맛은 아니다. 제조 방법에 따라 달지 않은 드라이 와인부터 꿀처럼 단 스위트 와인까지 스타일이 다양하다. 내가 마신 와인은 드라이한 편이어서 마지막에 살짝 기분 좋은 잔당감이 있는 정도였다. 아무래도 적당히 드라이한 쪽이 여러 음식과 두루두루 잘 어울릴 가능성이 높다.

가족끼리 한참 즐겁게 먹고 마시다가 뭔가 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구나! 풍악을 울리지 않았다. 기왕 한식과 합을 맞추고 있으니 유튜브에서 가야금 산조를 찾아 틀었다. 페이스북 친구가 와인과 가야금 산조의 조합을 추천했던 기억이 떠올라서다. 국립국악원 채널의 영상인데 담백하고 구성진 가야금 가락이 와인과 너무나 잘 어울리는 것 아닌가. 와인 마실 때 주로 느린 재즈만 듣던 나에게는 신선한 자극이었다.

원래는 막걸리가 있어야 할 자리인데 독일에서 물 건너온 놈이 또 다른 풍미로 훌륭하게 자기 몫을 한다. 혈혈단신 한국으로 건너와 생소한 가야금 산조를 배경음악으로 떡국에 상추쌈, 심지어 고추 장아찌와 뒹굴며 한국인의 구강으로 들어가려니 얼마나 무서웠을까. 그런데도 이렇게 잘 어울리니 그 적응력이 참으로 신통하구나.

앞으로 리슬링을 셀러에 쟁여두고 간간이 식사에 곁들일 것 같은 불길한(행복한)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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