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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듣기 등록 2020.05.21 18:59 수정 2020.05.21 18:59
5월 19일, 프랑스 정가엔 두 가지의 의미심장한 사건이 일어났다. 하나는 프랑스와 독일이 코로나로 타격을 입은 유럽연합국가 구제 연대기금 5천억 유로(약 667조 원) 조성에 합의한 것. 두 번째는 마크롱의 집권당 LREM(전진하는 공화국)이 분당하면서 과반 의석을 잃게 된 것이다.

마크롱 입장에서 전자는 호재이고 후자는 악재일 터이나, 두 가지 사건은 하나의 방향을 향한다는 점에서 절묘하게 맞물려 있다. 달라져야만 하는 코로나 이후의 세상을 위해 놓이기 시작한 이 디딤돌들은 우연히도(!) 비슷한 색깔을 띠고 있다. 생태, 사회, 연대, 로컬화.

메르켈의 급반전
 

코로나19 기자회견하는 메르켈 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지난 4월 9일(현지시각) 베를린 총리실에서 내각회의 뒤 코로나19 확산방지 대책에 관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베를린 EPA=연합뉴스


19일 발표된 유럽연합의 연대기금 목표는 분명하다. 위기에 처한 유로존의 굳건한 사수. 코로나로 상처입은 유럽연합의 '연대'를 통한 재건이다. 이번 결정에서 주목해야 할 대목은 메르켈의 입장 변화다.

프랑스는 이탈리아와 스페인이 3월부터 줄기차게 제기해온 연대기금의 조성을 위해 독일을 설득해 왔다. 그러나, 지난 3월 26일 열린 유럽연합 정상회담에서도 메르켈은 단호하게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유럽연합 차원의 거대한 지원기금을 구축하여 어려움에 처한 회원국들을 구하는 것은 독일이 유럽연합 결성 이후 줄기차게 반대해온 하나의 금기사항이었다.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등의 국가들과 입장을 같이하는 프랑스의 설득에 독일이 돌아서며 논의에 급진전이 이뤄진 것은 불과 일주일 전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메르켈은 돌아선 걸까?

<르 몽드>는 독일 경제학자 헨드릭 엔더라인 교수의 말을 인용해 전했다.
 
"메르켈은 독일이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코로나 참사로부터 성공적으로 벗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수긍했고, 유럽연합을 이끄는 책임있는 국가로서 연대의 힘을 입증해야 할 결단의 시기가 왔다고 느꼈다 (…) 메르켈에 비해 마크롱은 정치적으로 매우 약화된 상황에 놓여 있다. 메르켈로서는 프랑스-독일의 쌍두마차가 잘 작동하고 있다는 사인을 보낼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코로나 사태를 통해 유럽연합이 보인 연대의 허술함이 이탈리아 국민들을 실망시켜 유럽연합 탈퇴 여론이 49%까지 육박한 사실, 마크롱의 긴축 일변도 정책이 키운 코로나 참사에 대한 프랑스 시민들의 분노가 유로존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는 현실이 메르켈에게 통 큰 결단을 내리게 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마크롱의 정치력 후퇴를 결정적으로 입증하는 집권당의 분당이 어쩌면, 메르켈의 결정을 촉구하는 마지막 한방울이었을 수도 있다.

물론 두 나라의 합의가 유럽연합의 최종적 결정은 아니다. 27개 회원국 전체를 설득하는 작업이 아직 남아 있다.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스웨덴, 덴마크는 독일과 함께 거대한 규모의 연대기금 조성에 반대 입장을 표명해왔다.

그러나, 유럽이 '연대의 공동체'임를 입증하기 위해 독일이 결단한 만큼, 큰 산은 넘었다는 것이 일반적 관측이다. 유럽연합에서 프랑스와 독일은 27개 중 2개의 국가지만, 전체 인구(5억)에서 두 나라가 차지하는 비율이 30%에 이를 뿐 아니라, 분담금, 정치적·상징적 영향력 면에서 절반 이상의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4가지 키워드
 

EU서 '코로나19 회복기금'으로 667조원 조성 제안에 합의한 독일과 프랑스. 이 소식을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전하는 모습. ⓒ 연합뉴스/EPA


반대국을 설득하는 것 외에 코로나 이후의 유럽을 어떤 방향으로 재건할 것인가에 대한 과제가 남아 있다. 마크롱과 메르켈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각각 "오늘은 유럽연합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날", "프랑스와 독일이 연대를 위해 한편에 서기로 했다"고 합의 선언의 의미를 전하며, 양국이 동의한 기본 방향을 제시했다.

첫 번째 키워드는 보건·의료다. 유럽연합 집행위는 지난 10년간 공공분야를 최대한 축소할 것을 지속적으로 회원국들에 주문해왔다. 2011~2018년 사이 무려 63번에 걸쳐 유럽연합은 회원국들에게 보건복지 예산 축소를 요구했고 그 때마다 회원국들은 그 요구에 따랐다고 마르탱 시어드반 유럽의회 의원이 지난 3월 폭로한 바 있다.

마크롱 정부는 지난 3년간 공공의료에서만 26억 유로(약 3조5천억 원)의 예산을 절감하며 공공의료의 목을 졸라왔다. 오늘, 유럽의 공공병원들이 맞고 있는 인력과 시설, 병상의 부족은 유럽연합의 민영화와 긴축재정 정책의 직접적 결과인 셈이다. 유럽연합은 자초한 재앙을 수습하기 위해 가장 먼저 보건의료에 생긴 구멍들을 메워야 하는 것이다.

두번째 핵심분야는 생태, 즉 '그린 뉴딜'이다. 이미 큰 방향에서 합의된 경제구조의 생태적 전환이 속도를 내도록 하여, 기후, 환경, 생태 다양성이라는 사회적 약속을 수행하게 하겠다는 구상이다.

세번째는 디지털 역량의 강화다. 화석연료 사용의 최소화와 더불어 디지털 시스템 강화를 통해 그린 뉴딜을 달성하고, 유럽연합 내의 디지털 플랫폼이 원활히 작동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는 데 주력한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5G 시스템 개발을 동시에 약속하고 있어, 5G가 생태계에 입히는 폐해를 주장해온 환경주의자들과의 충돌이 불가피해 보인다.

네번째는 유럽 내에서의 생산시스템을 강화, 즉 생산 체계의 대대적 로컬화다. 즉 생산 시스템의 세계적 분업화에 대한 공식적 종언이다. 특히 의료장비 같은 필수품목의 생산을 수입에 의존하지 않고, 자체 내 생산 시스템을 확보하겠다는 구상이다.

마크롱호 떠난 여당의원들 '생태민주연대' 창당

메르켈의 합의를 얻은 마크롱이 유럽공동연대기금에 대한 가슴 벅찬 발표를 엘리제궁에서 하던 날, 의회에선 집권당 LREM의 분당이 '생태민주연대' 창당을 통해 공식화되었다. 정계에 입문한 지 얼마 안 된 30대 대통령이 2017년 창당한 LREM(전진하는 공화국)은 과반을 훌쩍 뛰어넘는 의석을 단숨에 확보하며, 마크롱 집권에 날개를 달아 주었다.

그러나 2018년 이후 LREM은 두 달에 한 명 꼴로 의원을 잃어왔다. 마크롱이 자신의 공약을 배반하고, 다국적 기업의 로비 앞에서 후퇴할 때마다, 의원과 장관들이 그의 곁을 떠나갔다. 이번 신당에 합류하기 위해 7명이 새롭게 집권당을 떠나고, 올랑드 대통령 시절 환경부 장관을 역임한 사회당 출신 의원 델핀 바소가 합류하면서 17명의 의원이 모인 신당이 만들어졌다. 이로써 LREM는 과반의석 289석에서 1석이 모자라는 288석을 점하게 되었다.

생태주의라는 기본신념을 공유하며 집권당에서 왼쪽 날개를 점하던 이들의 신당창당은 지난 3년간의 '마크롱주의'에 대한 내부적 환멸이 빚은 결과다. 그런 면에서 마크롱의 리더십에 치명타를 입혔다.

65%가 여성 의원이기도 한 이들은 창당을 알리며 그들이 목표하는 우선과제를 발표하였다. 생태계 복원, 생산과 소비 시스템 전환, 건강한 보건의료 시스템 구축, 로컬 생산 시스템 강화, 불평등을 줄이는 조세정책 실현 등이 그것이다. 마크롱이 발표한 유럽연대기금의 향방, 코로나 이후의 세상이 더 이상 전과 같아선 안 된다고 말하는 모든 이들이 가리키는 곳과 같은 방향이다.

문제는, 또 다시 디테일.

"우린 더 이상 당신을 믿지 않아요"
 

우리의 분노 "당신들은 우리의 분노를 봉쇄할 수 없다" 우리의 몸은 봉쇄할 수 있지만, 우리의 분노는 잠재울 수 없을 거라고 정권을 향해 경고하는 시민의 외침. ⓒ 목수정


프랑스 시민들은 이러한 일련의 변화에 대해 어떤 반응일까? 전국 의료진에게 상여금이 지급되던 지난 15일, 파리의 한 병원을 방문한 마크롱에게 간호사들이 했던 말이 가장 정확한 답이 될 것 같다.

"우린 더 이상 당신을 믿지 않는다. 1500유로의 상여. 우리가 원하는 건 이런 것이 아니다. 당신은 여러 가지 약속을 했지만, 이뤄진 건 아무 것도 없다. 정치적 수사는 그만 둬라. 우린 아무런 변화도 보지 못했다…"

뉴스전문채널 BFM은 대통령의 말을 가로막으며 튀어나온 솔직한 의료인들의 목소리를 그대로 전했다. 마크롱이 메르켈을 설득해 구축하겠다는 유럽연대기금은 코로나 사태를 겪고 있는 다수의 유럽인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방향이지만, 구체적 항목들은 하나 하나 싸워서 얻어내야 할 것임을 사람들은 아는 것이다. 섣부른 지지와 환호의 목소리보다 조심스런 감시의 시선이 압도적인 이유다.

"국영항공사 에어프랑스를 구하기 위해 정부는 이미 70억 유로(약 9조4천억 원)를 투입했지만, 그 어떤 생태주의를 담보하는 조건도 달지 않았다."

이것이 신당 '생태민주연대'가 지적하는 마크롱주의의 맹점이다. 의료인들도 마찬가지 입장이다. 정부는 마치 자신들의 과오를 뉘우치는 듯, 집권 후 처음으로 "공공의료 정책에서 전략상 실수가 있었다"고 인정했으며, 상여금에 이어 조만간 실질적인 임금 체계의 합리적 재조정이 있을 거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의료진들은 6월 중에 대규모 집회를 통한 반격을 준비중이다. 온 국민의 지지가 그들 등 뒤에 있을 때 확실한 실천을 압박하겠다는 의지다. 신당의 역할에 대한 국민들의 시선도 마냥 장밋빛은 아니다. 마크롱당의 문을 쾅 닫고 나선 그들은 정부를 가장 잘 압박할 수 있는 날선 도구이니 일단은 박수를 보내지만, 언제 옷을 바꿔 입을지 모르는 정치인들일 뿐, 마음을 온통 건네지 않는다.

이동 통제가 완화된 후 40여일 만에 돌아온 파리. 저녁 8시에 일제히 창가에 서서 보내던 의료인들을 위한 격려의 박수 대신 집집마다 결의를 내걸고 있었다. 자본가를 위한 정부가 벌여놓은 전쟁터. 거기서 복원해 내야 할 세상에 대한 슬로건들이 시민들 가슴에 차오르는 모습이 도시 곳곳에 넘쳐흘렀다.
 

돈은 사회와 병원에 "돈은 자본가가 아니라 사회복지와 병원을 위해 쓰라"라고 창가에 한 시민이 내건 외침. ⓒ 목수정

 

탈성장 파리 곳곳에는 시민들이 집 앞에 걸어놓은 현수막이 눈에 띈다. "탈성장" "아주 좋은 기회"라고 쓴 현수막이 한 주택에 걸려있다. ⓒ 목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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