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10 21:09최종 업데이트 20.05.11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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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아내와 와인을 마실 때면 습관처럼 음악을 틀어놓는다. 음악이라도 해도 종류가 다양할 터인데 일단 와인을 마시지 않는 시간, 그러니까 혈중 알코올 농도가 제로일 때 내가 즐기는 음악은 서양 고전음악과 애니메이션 음악이다(뭔가 극과 극 체험?). 간혹 페이스북에 내가 바흐의 평균율이나 이탈리아 협주곡,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등을 연주하는 동영상을 공유하면, 산적이 피아노 치고 있다며 페이스북 친구들이 놀라더라. 그러게, 사람은 외모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때때로 지인들이 내 통화연결음을 묻는다. 처음 듣는 노래인데 느낌이 좋아서 그런 것 같다. 2007년에 NHK에서 방영된 애니메이션 <정령의 수호자(精霊の守り人)>의 엔딩 테마곡 '사랑하는 이에게(愛しい人へ)'라고 대답하기가 참 거시기하더라. 조만간 애니메이션 <바케모노가타리(化物語)>의 엔딩 테마곡 <네가 모르는 이야기(君の知らない物語)>로 바꿔볼까 싶기도 하다.

평소 취향이 이러함에도 유독 와인을 마실 때는 재즈, 그것도 분당 심장 박동수보다 반 정도 느린, 흐느적거리는 템포의 재즈를 틀어놓는다. 솔직히 평소에 재즈를 잘 듣지 않아서 무슨 곡이 있는지도 잘 모른다. 그저 스마트폰 유튜브 검색창에 'jazz live'로 검색해 Cafe Music BGM channel이 운영하는 <Relaxing Jazz Piano Radio - Slow Jazz Music>를 찾아 선택한다. 여기에서는 1년 내내 실시간 스트리밍으로 느린 재즈가 나오는데, 악기 편성은 피아노, 베이스, 드럼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재즈 트리오다.
 

Relaxing Jazz Piano Radio 이 유튜브 채널에서는 1년 내내 실시간 스트리밍으로 느린 재즈가 나온다. ⓒ 임승수

   
와인으로 가산탕진 하느라 집에 그럴싸한 음향기기도 없다. 오래전 구매한 휴대용 JBL 블루투스 스피커를 스마트폰과 연결해 식탁 끄트머리에 놓는다. 여전히 소리는 잘 나온다. 간헐적으로 퉁겨지는 베이스 현의 여백미, 그 빈 공간을 적절한 타이밍으로 쪼개 들어가는 드럼의 타악기적 울림, 베이스와 드럼의 틈새에서 유유자적 노니는 피아노 건반의 음률. 이 모든 것이 마치 와인을 위해 탄생한 음악처럼 느껴진다.

왜 느린 재즈는 와인과 그렇게 잘 어울릴까. 정답이 존재하기 어려운 질문이니 누구나 나름의 분석으로 한마디씩 보탤 수 있는 주제다. 하지만 예술에 대한 논리적 분석만큼 허망하고 부질없는 게 또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도 그럴 것이 무엇을 좋아한다는 것은 이성과 논리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와인의 맛과 향에 감탄하거나 그림, 혹은 음악에 매혹될 때, 주어진 감각자극을 논리적으로 분석해서 좋아하는 게 아니다. 똥 냄새를 불쾌해하는 데에 그 무슨 합리적 추론이 필요한가. 특정 감각자극에 대한 호불호는 인간이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며 생존율을 높이는 과정에서 얻게 된 본능적 취향이다. 만약 유해 곰팡이나 똥의 맛과 향을 선호했다면 인류는 진작 멸종했을 것 아닌가. 수십억 년의 생명체 진화과정에서 켜켜이 쌓인 생존의 몸부림, 그것이 바로 취향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게 인간의 진화과정 때문이라고만 해버리면 글 쓰는 사람으로서 무책임한 처사일 테다. 미지의 대상 및 현상과 맞닥뜨렸을 때 (사실에 부합하든 아니든) 그 대상 및 현상을 설명하는 그럴싸한 이야기가 필요한 게 인간의 본성 아닌가 싶다. 이해하지 못하면 불안하고 두려우니까. 그러니 세상은 언제나 설명충 투성이고 그 설명충들이 의기투합해 최종병기 격인 '신'까지 고안한 것일 테지.

여하튼 글 팔아 먹고사는 사람으로서 책임감을 느끼며 오늘의 주제와 잘 어울리는 와인 하나를 골라 그 이유를 설명하겠다(어차피 그럴싸한 헛소리이니 마음 편하게 들어주기 바란다). 바로 미국 캘리포니아 나파밸리 출신인 조셉 펠프스 카베르네 소비뇽(Joseph Phelps Cabernet Sauvignon) 2012다. 나는 2016년 4월 17일에 이 와인을 처음 마신 후 나파밸리 와인의 매력에 흠뻑 빠지게 되었다.

잔에 담긴 진보랏빛 액체는 연주가 시작되기 전에 무대를 가리는 짙은 장막 같은 느낌을 준다. 저 장막을 열어젖히면 곧 놀라운 후각과 미각의 향연이 펼쳐진다.
 

조셉 펠프스 카베르네 소비뇽(Joseph Phelps Cabernet Sauvignon) 2012 ⓒ 고정미

 

조셉 펠프스 카베르네 소비뇽 2012 미국 캘리포니아 나파밸리의 와인인데, 에스프레소와 연유 향기가 일품이다. ⓒ 임승수

   
처음 만난 조셉 펠프스 카베르네 소비뇽의 향기는 은은하게 올라오는 고급 커피의 향과 그 안에 부드럽게 배어있는 연유의 느낌을 연상시켰다. 그 특유의 향기가 피어올라 스멀스멀 공기를 타고 후각세포를 자극하는 일련의 과정은, 드럼의 리듬과 베이스의 코드 위에서 피아노 음표가 떠다니다 고막을 자극하는 상황과 흡사하다.

공기의 흐름이 변하면 향기의 방향이 바뀌듯, 드럼의 리듬과 베이스의 코드가 바뀌면 피아노 선율은 그에 어울리는 새로운 방향을 찾아 흘러간다. 그렇게 만난 와인의 향기와 느린 재즈 특유의 도회적 고독감은 멋스러운 공감각을 형성한다.

와인은 천천히 맛과 향의 변화를 음미하며 긴 시간 즐기는 술이다. 경험상 조셉 펠프스 카베르네 소비뇽은 본연의 맛과 향기를 끌어내려면 코르크를 열고 두 시간가량 브리딩이 필요하다.

게다가 마시는 과정에서도 맛과 향이 카멜레온처럼 변하기 때문에, 그 매력을 온전히 만끽하기 위해서는 시간 간격을 두고 천천히 마셔야 한다. 그렇게 혈중 알코올 농도가 상승하면 시공간 감각이 시나브로 무뎌지는데, 그게 재즈 트리오의 나른하고 모호한 엇박자 리듬과 절묘하게 어울린다.

선율과 리듬을 언급했으니, 이제 화성 차례다. 여러 음이 동시에 울려 조화를 이루는 현상을 화성(Harmony)이라고 부른다. 재즈 트리오에서 피아노, 베이스, 드럼은 마치 각자도생하듯 자유분방하게 움직이는 것 같지만 큰 틀에서 조화를 지향한다. 와인의 맛도 그러하다.

타닌이 주는 쌉쌀함, 싱그러운 포도 과실향, 양조 과정에서 사용된 오크통의 풍미가 각자의 존재감을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타닌이 튀어 너무 떫다던가, 과실향만 치고 올라와 단순하다던가, 오크 풍미가 과도해 MSG를 친 것처럼 인위적 느낌만 강하다면 와인의 균형감과 구조감이 흐트러져 마셨을 때 만족감이 떨어진다.

조셉 펠프스 카베르네 소비뇽은 각 요소의 존재감뿐만 아니라 조화 또한 훌륭하다. 쌉쌀하면서도 거칠지 않고 매끄러운 타닌, 캘리포니아의 강렬한 태양을 연상시키는 폭발적인 과실향, 거기에 복합미와 풍부함을 더해주는 오크통의 풍미. 이 세 요소가 입체적으로 미각세포를 자극하니 훌륭한 맛의 하모니라 하지 않을 수 없다(그러고 보니 내가 글에 MSG를 많이 치고 있구나).

얼마 전 아내와 집에서 와인을 마시며 여느 때처럼 유튜브에서 느린 재즈를 검색해 틀었다. 그런데 아내가 이제 지겹다며 내 스마트폰을 빼앗아 갔다. 그렇게 튼 음악이 백예린의 <Square>였다. 21세기 도시 특유의 멜랑콜리와 회갈색 고독감을 잘 표현한 인상적인 노래였다.

하지만 와생와사(와인에 살고 와인에 죽는) 애호가가 느끼기에는 그다지 와인과 어울리지 않았다. 비트감이 심장 박동보다 훨씬 빨라 음주 리듬과 엇나갔으며, 가사가 신경 쓰여 맛과 향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역시 시원한 산들바람처럼 무심결에 내 귀에 흘러들어오는 느린 재즈가 더 좋다. 비싸게 주고 와인 샀는데 최대한 맛과 향에 집중해야 할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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