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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듣기 등록 2020.03.26 09:05 수정 2020.03.26 09:05
마르크스주의 책 쓰는 사람이 와인 글도 연재하니 나보고 '강남좌파'란다. 서울 금천구 독산동 사는 사람 보고 '강남좌파'라니! 하긴 한강 남쪽 맞구먼. 강남좌파 인정.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는 사회과학 작가 주제에 와인과 사랑에 빠지면 안 되는 거였다. 그 탓에 고통스러운 선택이 일상이 되었다.

일 년에 몇 번 없는 떼루아 와인아울렛 와인장터. 애호가에게는 와인을 합리적인 가격에 구매할 수 있는, 그래서 생일보다 더 기다려지는 그런 날이다. 2000개가 훨씬 넘는 할인 리스트에서 호주머니 사정을 고려해 총액 20만 원 아래로 선별하는 과정은,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 포기하는 법부터 익혀야 하는 비극의 주인공 같은 정서를 느끼게 만든다.
 
아무튼 장터 기간인 2월 24일 월요일 오전 떼루아를 방문해 몰리두커 더 복서 2017, 떼땅져 브뤼, 그리고 문제의 샤토 로장 가시(Château Rauzan-Gassies) 2013, 이렇게 세 병을 구입했다. 와인을 눈앞에 두고 발휘할 인내심 따위는 1도 없기에, 구매 당일 저녁에 샤토 로장 가시 2013을 마시기로 결심했다.
 

ⓒ 고정미

  
샤토 로장 가시는 프랑스 보르도 마고 지역 와인인데, 2013년 보르도는 포도 작황이 유난히 좋지 않았다. 그러면 왜 샀냐고? 싸니까! 어쨌든 보르도 마고 지역에서 나름 인지도 있는 와인이니 살짝 기대하며 마개를 열었는데, 아뿔싸! 코르크 상태가 다음과 같았다.
 

샤토 로장 가시 2013의 코르크 코르크는 옆면으로 와인이 치고 올라온 흔적이 선명하다. ⓒ 임승수

   
코르크를 보니 열화 와인(Cooked Wine)일 가능성이 있었다. 열화 와인이 뭐냐고? 와인 보관 상태가 양호하다면, 일반적으로 코르크와 와인이 닿는 둥근 면만 빨갛게 착색된다. 하지만 사진 속 코르크는 와인이 옆면으로 치고 올라온 흔적이 선명하다.

그 흔적의 형태가 마치 와인이 끓어오른 것 같다고 해서 '끓은' 와인이라 부르기도 한다. 와인은 열에 민감해서 섭씨 30도 가까이 되는 온도에 장시간 노출되면 쉽게 변질되는데, 그 과정에서 코르크 옆면으로 끓은 흔적을 남긴다. 정도가 심하면 와인이 병 밖으로 새어나와 알루미늄 포일에 묻고, 그 탓에 포일이 병에 달라붙기도 한다.
 
이런 현상을 아는 애호가들은 끓은 와인을 피하기 위해 구매 전에 알루미늄 포일을 잡고 좌우로 돌려본다. 잘 돌아가면 적어도 와인이 병 밖으로 넘치지는 않은 것이니. 다만 와인 중에는 제조 방식으로 인해 알루미늄 포일이 병에 밀착되는 경우도 있으니, 포일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무조건 끓었다고 판단하는 것은 섣부를 수 있다.
 
병 밖으로 와인이 새어 나올 정도라면 바로 교환 및 환불을 요청해도 무방하지만, 사진 속 코르크 정도의 상태라면 바로 교환 및 환불 요청을 하기에는 좀 애매하다. 코르크 옆면에 저런 흔적이 있어도 맛과 향은 괜찮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선 와인의 맛과 향을 직접 확인할 필요가 있다.
 
와인이 심하게 끓었다면 신맛이 도드라지고 여타 풍미가 약해진다. 마개를 연 후 와인을 잔에 따르고 시간 간격을 두고 조금씩 마신다. 신맛만 계속 도드라지고 와인 특유의 과실향이나 여타 풍미가 잘 살아나지 않는다면 코르크로 다시 막고 매장에 가져가 교환 및 환불 요청을 하면 되는데, 여기서 몇 가지 주의할 사항이 있다.
 
다 마셔놓고 교환을 요청하면 매장에서 조치가 어렵다. 그쪽에서도 진짜 변질됐는지 확인이 필요하지 않겠나. 텅 빈 병을 가져와 코르크 마개의 흔적만 보여주면 교환 및 환불이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꼭 절반 이상(되도록 많이) 남겨서 가져가자.
 
빨리 가져가는 것도 중요하다. 와인은 공기에 장시간 노출되면 쉽게 산화된다. 며칠 있다 가져가면, 끓어서 맛과 향이 변한 건지 개봉 후 공기와 오래 접촉해서 그런지 판단이 어렵다. 가능하면 당일이나 다음날까지는 와인을 지참해 매장을 방문하자.
 
마신 당일에 와인이 끓은 것을 확인하고 대부분을 남겨 매장에 찾아갔으니 아무 문제 없을까? 안심하기엔 이르다. 구입한 지 오래됐다면 교환이 어려울 수 있다. 구입 전부터 끓은 상태였는지 구입 후 집에서 변질됐는지 판단하는 게 어렵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구매일로부터 오래 지나지 않았으며, 와인을 개봉한 당일, 혹은 늦어도 다음날까지는 가져가야 하고, 와인의 절반 이상은 병에 남겨두는 것이 좋으며, 매장 직원이 맛과 향을 직접 확인해서 객관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판단을 내릴 수 있어야 교환 및 환불이 원활하다.
 

샤토 로장 가시 2013 프랑스 보르도 마고 지역 와인이다. 2013년 보르도는 포도 작황이 유난히 좋지 않았다. ⓒ 임승수

   
노파심에서 얘기하지만, 왜 불량 와인 팔았냐고 따지면 곤란하다. 판매하기 전에 일일이 알루미늄 포일을 벗기고 코르크 상태를 확인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매장에서 관리가 소홀했으니 변질된 거 아니냐고? 물론 그럴 가능성도 있지만, 항상 그런 건 아니다.

와인은 선박운송 과정에서 적도를 통과하는데, 이때 컨테이너 내부 온도가 상당히 높아진다. 와인 운송에 전문적인 해운사라면 온도 상승을 막기 위해 해수면 아래쪽에 컨테이너를 보관하지만, 설사 그렇더라도 상황에 따라서는 와인이 끓을 가능성이 있다.
 
고급 와인은 냉장 컨테이너를 이용하거나 항공으로 운송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안전하다. 하지만 저가 와인은 운송료 절감 목적으로 일반 컨테이너로 운송되기 때문에 고온에 노출될 확률이 더 높다. 사정이 이러하니 끓은 와인을 구입했다면 괜히 매장 직원에게 따지지 말고 쿨하게 교환 혹은 환불을 요청하자. 그냥 운이 나빴을 뿐이다. 그렇게 자주 발생하는 일은 아니니 마음 편하게 가지자.
 
자! 그렇다면 2월 24일의 샤토 로장 가시 2013의 상태는 과연 어땠을까? 결과부터 얘기하면, 아주 즐겁게 마셨다. 솔직히 일반 보르도 와인에 비해 신맛이 살짝 도드라지는 느낌은 있었다. 그렇다고 보르도 와인에서 예상되는 여타 풍미가 약했느냐면 그렇지도 않았다.

머릿속으로 상상해 봤다. 지금 이 상태에서 신맛이 살짝 줄어들고 여타 풍미가 강해지면 더 맛있을까? 그렇지 않다. 살짝 존재감을 드러내는 신맛이 되레 입맛을 돋우며, 여타 풍미들도 잘 어우러져 전체적으로 구조감이 꽤 균형잡힌 느낌이다. 그러한 감각 정보를 토대로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아주 살짝 끓었지만, 오히려 마시기 더 좋게 변한 것 같다고.
 
어쩌면 서울에서 김포 떼루아 와인아울렛까지 다시 왕복하는 게 귀찮아서 억지로 찾아낸 그럴싸한 자기합리화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렴 어떤가. 내가 느끼기에 향 좋고 맛 좋으면 됐지! 그 사실에는 추호의 거짓도 없다. 물론 온전한 샤토 로장 가시는 어떨지도 궁금하다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적도의 작열하는 태양열을 견디며 나에게 도달한 이놈에게 집중하련다. 굴곡 없이 살아온 인생도 근사하지만, 사연 있는 인생이 감동을 줄 때도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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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차베스, 미국과 맞짱뜨다> <나는 행복한 불량품입니다> <세상을 바꾼 예술 작품들> <원숭이도 이해하는 공산당 선언>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철학> 등 몇 권의 책을 쓴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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