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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듣기 등록 2020.03.06 09:09 수정 2020.03.06 09:09
"나는 고발당했… 아니 고발한다." 

지난 2월 28일 제45회 세자르상 시상식은 기어이 가야할 그곳으로 가고야 말았다. 파국. 로만 폴란스키(86)가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시점에 세자르상 집행위원회가 그의 영화 <나는 고발한다>를 12개 부문에 노미네이트시켰을 때부터 예견된 결과였다.

미투운동 이후, 그 어느 때보다 민감하고 강력해진 영화계의 변화를 감지하지도 못하고 스스로 변화하기도 거부해온 세자르상 집행위가 자초한 정면 충돌이기도 했다.

"이것은 수치다"
 

십여차례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 2020년 프랑스 세자르상 감독상 수상자로 호명되자 배우 아델 에넬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장면. ⓒ 유튜브캡처

이날의 단독 사회자였던 희극배우 플로렌스 포레스티는 참석하지 않은 폴란스키를 내내 조롱의 대상으로 삼았다. 영화 제목을 소개할 때 그는 "나는 고발당했… 아니, 나는 고발한다"라고 말하며 실수를 가장한 공격을 서슴지 않았다. 결국, 감독상 수상자로 로만 폴란스키가 호명되었을 때 장내는 폭풍전야의 무거운 침묵으로 가득찼고, 이윽고 소심한 박수와 몇몇 대담한 야유가 터져나왔다.

배우 아델 에넬이 "이것은 수치"라 소리치며 시상식장을 떠난 데 이어 몇몇 사람들이 그 뒤를 이었다. 결정적으로 사회자 포레스티는 무대 뒤로 퇴장한 후 다시 나오지 않아, 집행위원장이 마지막 상인 작품상 <레 미제라블>을 호명하고 시상해야 했다. 포레스티는 스스로 "독이든 선물과도 같다"고 표현했던 이날의 사회자 자리를 결국 내려 놓아야 할 만큼, 폴란스키의 감독상 수상은 "구역질 나는 결정"이라고 평했다.
 
지난해 11월, 로만 폴란스키의 드레퓌스 사건을 다룬 영화 <나는 고발한다>의 개봉을 앞두고, 프랑스의 사진작가 발렌틴 모니에(63)는 자신 18살이던 1975년에 폴란스키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고 폭로했다.

발렌틴 모니에가 45년만에 침묵을 깬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 때문이었다. "나는 고발한다." 그녀가 늘 하고 싶었으나,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이 바로 그 말이었다. 
 

영화 <나는 고발한다> 포스터 ⓒ .

 
프랑스법은 성범죄 피해자가 18세가 된 이후 30년까지를 성범죄의 공소시효로 두고 있다. 모니에는 이제 폴란스키를 법정에 서게 할 순 없지만, 그가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사회적 대가를 치르길 바랐다. 페미니스트들은 이 고발에 즉각 반응하며, 전국 곳곳에서 그의 영화 상영을 금지시키고, 보이콧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그런 와중에도 영화는 소소하게 관객을 불러모아 프랑스에서 150만의 관객을 동원했다.

45년 전 피해자의 진술이 유일한 증거인 사건. 더구나 공소시효가 지난 지 오래여서 법정에서 진실을 다툴 수도 없는 사건으로 한 감독과 영화를 심판한다는 것은 어쩌면 가혹한 얘기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수상이 이토록 격렬한 영화계의 비난과 파문을 일으키는 것은, 그에게 같은 종류의 피해를 당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10여 명이나 더 있기 때문.
 
로만 폴란스키가 청소년을 상대로 한 성범죄자라는 치명적 낙인을 얻은 것은, 1977년 3월 미국에서 13살 소녀였던 사만다 가이머를 성폭행한 혐의 때문이다. 사건 다음날 체포된 그는 "합의에 의한 관계였다"며 성폭행 혐의를 부인했다. 이 일로 그는 3개월 형을 받고 복역하다가 42일만에 석방된다.

그런데 그를 풀어주었던 판사가 생각을 바꿔 그에 대한 재판을 재개할 뜻을 전했고, 이번엔 50년까지 형이 늘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폴란스키는 미국 땅을 영원히 떠나게 된다. 이후 그는 프랑스에 정착했고, 프랑스는 범죄자 인도를 요청하는 미국의 청을 거절했다. 폴란스키가 뒤늦게 사만다에게 사과의 편지를 써서 미안함을 표하고, 민사소송의 결과로 일정의 배상금도 지급하면서 사건은 일단락되는 듯했다.

2009년 그가 취리히에서 스위스 경찰에 의해 붙잡히면서 폴란스키는 다시 한 번 사람들에게 성범죄자라는 타이틀을 각인시켰다. 사만다 사건이 미국에선 여전히 형사법상으로 종결되지 않아 수배중인 상태였고, 스위스와 미국간의 조약에 따라 스위스 경찰이 그를 체포한 것이다. 이로 인해 그는 2개월을 감옥에서 보내고 8개월을 자신의 스위스 집에서 전자팔찌를 차고 지내야 했으나 결국 스위스 당국은 이미 죄값을 치렀다며 그를 미국에 송치하지 않고 석방했다.

지금도 인터폴에 의해 수배중인 그는 프랑스, 폴란드, 스위스, 이 세 나라를 제외하곤 아무 데도 갈 수 없다. 이후 1970년대에 폴란스키에 의해 성추행이나 폭력을 겪었다는 여성들이 10명이나 더 등장했으나, 그들은 하나같이 폴란스키를 고소하지 않았고, 이제는 30년 이상의 시간이 경과하여, 그 죄를 물을 수조차 없게 됐다.

"당신들의 세상은 끝났습니다"

"모든 피해자들의 얼굴에 침을 뱉는 수상."

배우 아델 에넬의 평대로 로만 폴란스키의 세자르 감독상 수상은 분노한 여성들을 불끈 일어서게 만들었다. 그의 영화제목대로 고루한 마초들의 세상을 고발하게 만들었다.

이 문제적 수상과, 시상식장에서 반란을 일으킨 여성들에 대한 반응이 밤새 인터넷 공간을 달구었다. 시상식 다음날에는 소설가 비르지니 데스팡트가 활활 타오르는 폭탄 같은 글을 <리베라시옹>에 기고했다.
 
"국회에서든, 문화계에서든, 당신들 권력자들은 완전하고 지속적인 존중을 요구하죠. 그것이 강간이든, 경찰의 강제집행이든, 세자르상이든, 당신들의 연금개혁이든. 게다가 피해자는 침묵해야 하고요. (중략) 당신들이 군림하기 위해 창조한 이 세상은 초라하고 숨을 쉴 수 없는 곳입니다. 우리는 이제 일어나 떠납니다. 끝났습니다. 우린 일어나, 떠납니다. 엿먹어라."

17세 때 자신도 강간의 피해를 입었다고 밝힌 이 여성 소설가는 폴란스키가 감독상 수상자로 지목된 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아델 에넬의 행동을 적극 지지하면서 이 같은 글을 썼고, 그의 글은 수천수만의 사람들에게 회자되었다. 배우 코린 마시에로도 세자르상 집행위를 가리켜 "부르주아, 헤테로, 가톨릭, 백인, 우파들 집단"이라며 맹비난했다.

세상이 달라졌다
 

시위대와 맞닥뜨린 폴란스키 감독 2017년 10월 30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 시네마테크 건물에 폴란드계 프랑스 영화감독 로만 폴란스키가 도착하자 시위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폴란스키는 이날 자신의 회고전을 위해 파리에 도착했다. ⓒ EPA/연합뉴스

 
로만 폴란스키는 1933년 파리에서 폴란드인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 밑에서 태어났다. 3살 때 다시 아버지의 나라인 폴란드로 온 가족이 돌아가 거기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1939년 폴란드가 나치 하에 놓이자 유태인이었던 임신한 어머니와 누이, 아버지가 모두 아우슈비츠로 끌려가고 6살인 그만 홀로 살아남는다. 마치 40년 뒤인 1969년에 로스앤젤레스에서 26살의 임신한 아내와 친구들이 광적인 살인마 찰스 맨슨 일당에 의해 살해 당하고, 혼자 살아남았던 것처럼.

그에게 성폭력을 당했다고 폭로하는 여성들은 대부분 1970년대에 피해를 당했다고 밝혔다. 아내와 뱃속의 아기를 잔인한 방법으로 잃고, 세상이 만들어내는 추문에 시달리던 그가 당시를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건 충분히 추측할 만하다.

추악한 소아성애자라는 대중의 비난에도 일부 동정론을 펼치는 영화계 인사들이 있는 것은, 그가 감당하기 힘든 사건들을 겪으며 정신적으로 극도로 불안정한 시절이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들기도 한다. 그는 이미 죄값을 치렀고, 더 이상 그의 어두운 과거로 영화적 성과를 옭아맬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2003년, 영화 <피아니스트>로 칸느영화제 황금종려상, 세자르상의 감독상, 작품상을 비롯 7개상 수상, 오스카에서 감독상 외 2개상을 석권할 때엔 아무도 그의 성범죄자 이력을 들추지 않았었다. 그때도 그는 여전히 인터폴이 수배중인 범죄혐의자였고, 그 때문에 오스카상을 타러 미국에 갈 수도 없었다.

그러나 세상은 달라졌다. 미투 이후, 하비 와인스타인(미투운동을 촉발한 할리우드 유명 제작자)이 마침내 감옥으로 끌려간 이후, 더 이상 피해자들은 입을 다물지도, 범죄자들이 앉아 있는 시상식장에 예의를 지키지 않기로 했다.

25편의 장편영화를 만들어온 86세의 현역 감독, 문제적 인간, 로만 폴란스키는 낡은 세계와 새로운 힘으로 무장하며 깨어난 세계를 충돌시키는 폭풍을 일으키며 그 한가운데를 비틀거리며 걷고 있다.

* 세자르상 : 프랑스 영화인들의 축제로, 우수한 프랑스 영화들을 대상으로 상을 주는 국내영화상이다. 외국영화상 부문도 있는데, 2020년 수상작은 봉준호의 <기생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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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글을 쓰며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