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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듣기 등록 2020.02.28 22:17 수정 2020.03.05 09:59
 

안중식 ‘영광풍경도’ 1915년 삼성박물관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한국 근대미술을 언급할 때 그 중심에는 늘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 1861-1919)이 있다. 그는 서울 화단 최고의 인물이었던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 1843-1897)의 적통을 잇는 뛰어난 화원이었을 뿐 아니라, 새로운 미술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동양화단의 좌장이었다. 실제 그의 솜씨는 단연 으뜸이었으며 활동 부분 또한 다양하였다.

안중식의 집안은 당시 주로 무반 벼슬을 했던 순흥(順興) 안씨 집안이며 5남5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안중식부친 안홍구(安鴻逑)는 성균관 생원을 지냈으며, 서울 종로구 청진동 258번지에서 비교적 부유한 생활을 하였다. 청진동은 조선시대에 관료들과 가까운 부호들이 살던 지역이었으며, 대한제국 시대에는 부호들을 상대한 기생들이 많이 산 곳으로도 알려졌다.

이 근처를 '피맛골'이라 하는데 서민들이 종로를 지나는 고관들의 '말을 피해 다니던 길'이라는 뜻의 '피마(避馬)'에서 유래하였다. 피맛골 주위에는 선술집·국밥집·색주가 등 술집과 음식점이 번창하였는데, 이러한 분위기는 안중식이 예술적 감성을 갖는 데 중요한 자양분이 되었다.

안중식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대략 10살 때쯤이다. 먼 친척 중에 어진 화사였던 해사(海士) 안건영(安健榮, 1841-1876)이 있었는데, 몇 년 간 그의 집에 드나들며 그림을 배웠다. 안건영은 산수·인물뿐만 아니라 영모(翎毛)나 초충(草蟲) 등 여러 면에 걸쳐 뛰어난 기량을 발휘한 화가로, 섬세한 필치와 아름다운 채색 위주의 중국화풍을 보인 작가였다.

안건영에게서 기본을 닦은 안중식은 몇 년이 지나 19세쯤 되어 장승업을 만나며 화가로서의 본격적인 틀을 갖추게 된다. 장승업은 중국 명가 못지않은 솜씨를 지녔지만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따로 제자를 두지 않았다. 그러나 자신의 모습을 꼭 빼닮은 안중식에게만은 특별한 정을 주어, 자신의 솜씨를 빠뜨리지 않고 가르쳐 주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안중식의 그림이 장승업의 그림과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닮았고, 장승업의 그림에 안중식이 화제를 자주 한 것으로 보아 충분히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장승업과 유난히 가까워 그림과 화제를 나누어 작업했던 정학교(丁學敎)와의 관계와도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

중국과 일본을 다니며 견문을 넓히다
 

안중식(왼쪽)과 조석진 서화협회보 제1호(1921년) ⓒ 황정수


장승업에게서 그림을 배우던 안중식이 두드러지게 화가로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1881년 20세 때이다. 이 해 이조참의 김윤식(金允植, 1835-1920)이 영선사로 임명되어 청나라 천진(天津)에 있는 기기제조처(機器製造處)에 파견되어 연구할 학도 25명을 선발하는 데 뽑힌다. 이때 소림(小琳) 조석진(趙錫晉, 1853-1920)도 함께 선발된다.

천진에 파견된 안중식은 신무기 제조법과 조련법을 배우기 위한 제도사(製圖士)로 조석진과 함께 남국화도창(南局畵圖廠)에 들어가 각종 기계의 구조와 제도 방법을 배운다. 이때 함께 중국어와 영어도 배운다. 그러나 1년 후 1882년 고국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나며 국내 상황이 극도로 불안정하게 되어 청나라에 파견한 사람들을 조기 철수시키게 되는데, 이때 안중식도 함께 서울로 돌아오게 된다.

귀국한 후 1884년에 개화당의 건의로 설치된 우정국에서 일하기 시작한다. 그는 개화파들과 가까이 지냈는데, 얼마 후 개화파들이 일으킨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1년여를 피신한 후 돌아온다. 그는 이때쯤 결혼을 하고, 당시 광통교 근처에 살며 인기가 있었던 장승업 주변에서 함께 그림을 그리며 지낸다.

그러다 1891년경 그동안 그려온 그림에 대한 무력감을 느끼고, 청나라로 다시 떠나 상해(上海) 등지를 여행하며 화가로서의 시야를 넓힌다. 당시 상해에는 빼어난 실력을 가진 상해화파 화가들이 많아 새로운 양식의 그림을 접하기에 좋았다. 그는 이곳에 중국화풍의 본질을 깨닫고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1894년에는 지평현감을 거쳐 안산군수에 임명되었으나, 2년 만에 그만두고 1899년 세 번째로 청나라로 건너가 상해에 머물며 그림을 그린다. 그러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 오사카, 기후 등지에서 서화 활동을 하며 지낸다. 이때 이름을 '욱상(昱相)'에서 '중식(中植)'으로 바꾸고 본격적인 화가 활동을 시작한다. 그의 그림 속에 청나라 화풍과 일본화의 영향이 함께 있는 것은 이때의 경험이 그의 그림 속에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서울에서의 화숙 경영과 서화미술회 활동

일본에서 귀국한 안중식은 서울 청진동 집에 개인 화실을 만들고 '경묵당(耕墨堂)'이라 이름을 붙인다. 평생 서화가로 살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는 당호이다. 이 공간은 본인의 작업을 하는 곳이기도 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개인 화숙(畵塾)이기도 하였다.

1901년에 뛰어난 재능을 지닌 이도영(李道榮, 1884-1933)을 첫 제자로 받아들인다. 이도영은 안중식의 관심 속에 스승 못지않은 화가로 성장한다. 몇 년 후인 1905년경에는 궁내부 주사로 있던 고희동(高羲東, 1886-1965)이 그림을 배우러 온다. 고희동은 3년 정도 배우다 1909년 일본 도쿄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기 위해 일본으로 떠난다.

1902년에는 두 번에 걸쳐 조석진과 함께 어진도사도감(御眞圖寫都監)의 주관화사로 선발되어 고종 황제의 어진과 황태자 시절의 순종 어진을 그린다. 이 어진을 완성한 공로로 안중식은 통진군수가 되고, 조석진은 영춘군수로 발령을 받는다. 얼마 후 안중식은 양천 군수가 되었으며, 1907년에 서화활동에만 전념하기 위해 군수를 그만둔다.

안중식이 근대미술계에서 가장 많은 기여를 한 것은 역시 1911년에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미술교육기관이라 할 만한 '서화미술회(書畵美術會)'를 이끌며 미술교육자로서 큰일을 한 것이다. 서화미술회는 서과(書科)와 화과(畵科)를 두었는데, 교수진은 7명이었다. 서과에는 강진희 · 정대유가 있었고, 화과에는 안중식·조석진·강필주·이도영·김응원 등이 있었다.

이 서화미술원 출신으로는 이용우(李用雨)∙오일영(吳一英)∙이한복(李漢福)∙김은호(金殷鎬)∙박승무(朴勝武)∙최우석(崔禹錫)∙노수현(盧壽鉉)∙이상범(李象範) 등이 있다. 이들은 훗날 근대 한국화단의 중심적 활동을 한다.

1918년 6월에는 김규진(金圭珍)의 '서화연구회(書畫硏究會)'와 힘을 합쳐 '서화협회(書畵協會)'를 창립하고 초대회장을 지낸다. 창작활동과 후진양성에 전념하던 안중식은 1919년 삼일운동이 일어나자 민족대표 33인 중의 오세창·권동진과 친밀한 관계였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잡혀가 심한 고초를 당한다. 그로 인해 평소 앓았던 병이 악화되어 11월2일 세상을 떠난다.

안중식의 계몽활동과 애국활동
 

안중식 ‘민영환 혈죽도’ (현채 편저 ‘유년필독’ 1907년) ⓒ 국립현대미술관

 
안중식은 솜씨 좋은 서화가였을 뿐 아니라 국민 계몽의 필요성을 느낀 개화 사상가이기도 하였다. 1906년에는 대표적인 애국계몽운동 단체인 대한자강회에 회원으로 가입하였으며, 이듬해 '대한자강회월보' 제8호 첫 페이지에 을사조약에 항의하다가 자결한 충신 민영환(閔泳煥)을 기리는 '민충정공혈죽도(閔忠正公 血竹圖)'를 그려 싣기도 하였다. 또한 이듬해에는 어린이용 교과서 '유년필독(幼年必讀)'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또 진보적이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있던 잡지 '청춘(靑春)'과 '아이들보이'에 삽화를 그리기도 하였다. 1913년에 창간된 '아이들보이'에는 군복을 입고 백마를 탄 우리나라의 옛 무사의 모습을 그린 삽화가 표지화로 싣기도 하였다. 이런 모습은 근대적인 면모를 보이기는 하나 전체적으로 보면 전통적 기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한계도 있다.

1914년 10월 최남선(崔南善)에 의해 창간된 '청춘'은 통권 15호까지 발간되었다. 안중식은 이 잡지의 1 · 3 · 4 · 13호에 전통적인 시조를 소재로 하여 삽화 5점을 그리고, 동물을 소재로 한 삽화 2점과 화조도 1점 등 여러 점의 삽화를 그렸다. 표지나 삽화는 주로 선묘를 중심으로 하여 그렸으며, 대개 본문의 내용을 부연 설명하는 것이었다.

안중식 작품 세계의 특징
 

안중식 도원문진도(1913년), 도원행주도(1915년) ⓒ 국립현대미술관

 
안중식의 회화세계는 전체적으로 근대적 개념의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모습을 보였다기보다는 주로 전통적인 방식을 고수하는 보수적 성향을 띠었다. 이는 그가 근대적 문화 경험을 많이 한 것과는 성향을 달리하는 특이한 모습이다. 다른 이들과 차이점이 있다면 안중식은 조선후기에 발전한 남종문인화 전통을 따르면서도 북종화적인 채색 위주의 청록산수도 많이 그렸다는 점 정도이다.

안중식은 산수·기명절지 등에도 뛰어났고, 또한 그림 못지않게 글씨도 상당한 수준을 보였다. 서예는 각체를 모두 잘 썼으나 예서가 유난히 눈길을 끄는 면이 있다. 또한 다는 서체에서도 글씨의 크기나 획의 변화 등에 자유자재인 솜씨를 보여 서화에 모두 능한 재능을 보여주었다.

안중식의 대표적인 실경 산수
 

안중식 '탑원도소회지도' 1912년 ⓒ 국립현대미술관

 
안중식의 화가로서의 가장 큰 약점은 관념 산수에 치우쳐 있고 한국의 실경을 그린 그림이 적다는 것이다. 그런 중에서도 몇 점의 실경산수화는 그의 생각이 단순히 중국 그림에 바탕을 둔 관념 산수에만 머물지만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의 실경 그림으로 '탑원도소회지도(塔園屠蘇會之圖)'라는 작품이 있다. 이 작품은 가까이 지내던 오세창의 집에서 정초에 친들과 행사를 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청진동에 살던 안중식은 탑골 옆 돈의동에 살던 오세창과 가까이 지냈는데, 1912년 연초에 오세창의 집에서 베풀어진 도소회(屠蘇會) 모임에 참석했다가 그곳 풍경을 그린 것이다. '탑원도소회지도'는 화첩에 그린 작은 작품이지만, 유려한 필력과 섬세한 채색으로 도소회 장면을 그린 빼어난 작품이다.

또한 그의 작품 중에 전라남도 영광고을의 풍경을 그린 '영광풍경도(靈光風景圖)'가 있다. 이 작품은 10폭이나 대폭의 작품인데, 그 지역 유지의 주문에 맞추어 그린 것으로 보인다. 당시 영광군의 모습 전체를 조망하며 현실의 풍경을 원근법과 투시법을 사용하여 그린 역작이다. 이밖에도 금강산 명경대의 실경을 사실적이고 현실적인 시각으로 묘사한 '명경대도(明鏡臺圖)'등이 있으나 그의 명성을 대변할 정도의 작품은 아니다.
 

안중식 '백악춘효도' 1915년 여름과 가을 ⓒ 국립현대미술관

안중식의 실경산수뿐만 아니라 그의 작품 전제를 대표할 수 있는 작품은 단연 '백악춘효도(白岳春曉圖)'이다. '백악춘효도'라는 이름의 작품은 두 폭이 전한다. 한 폭은 1915년 여름에 그린 것이고, 다른 한 폭은 같은 해 가을에 그린 것이다.

광화문과 경복궁, 그리고 뒤편의 백악산의 실경을 충실히 묘사하였다. 특히 북악산 기슭에 있는 바위벽이나 오른쪽 뒤편 기슭의 산성, 궁궐의 지붕과 처마, 광화문의 3개의 문, 해태상, 주변의 건물 등을 실제의 형태와 거의 똑같게 묘사하였다.

그런데 이 두 작품 속에 묘사된 것 중 가장 눈여겨 볼 것은 같은 해에 같은 소재를 그렸는데도 작품의 구성이 조금 다르다는 것이다. 한 계절 차이인데도 다른 점이 있는 것은 그 사이에 궁궐 주변의 모습이 변한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가을에 그린 작품 속 전면에 배치된 해태가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는 안중식이 실수로 빼먹은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 전문적으로 사실적 묘사법을 배운 그가 작품 속에 균형감을 잃게 할 정도의 중요한 소재를 빠뜨렸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이는 그 해에 경복궁에 주변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작품을 그린 1915년에는 조선물산공진회가 열린 해이다. 일본과 한국이 함께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의미로 이 행사가 경복궁에서 열린다. 이때 행사를 위해 건물을 새로 짓고, 기물들을 옮기는 등 일제의 만행이 저질러졌다. 이 그림을 보면 분명히 이 가을에 일제는 행사를 위해 해태를 옮기는 일을 했었을 것이다.

안중식의 입장에서 조국의 궁궐이 파헤쳐지는 만행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편할 리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서슬 퍼런 제국의 힘 앞에 자신의 뜻을 마음껏 드러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러한 자신의 마음을 그림 한 구석에서나마 표현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상에서 보듯 안중식은 뛰어난 화가였을 뿐만 아니라 근대화에 직면한 국민을 계몽하는 선각자로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 잡지나 소설의 표지를 그리기도 하고, 신문의 삽화를 그리기도 하였다. 또한 미술 단체를 만들어 후배들을 가르치는 미술 교육자로서의 역할도 대단하였다. 그의 삶은 한국 근대화의 최전선을 보여준다는 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 서울미술기행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사랑해주신 독자분들에게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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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국문학과 석사 과정을 마치고, 고교 국어 교사를 11년간 하였다. 2001년 교사 퇴직 후 줄곧 미술사 연구에 몰두하였다. 저서에 《경매된 서화》 (김상엽 공저, 시공사, 2005)가 있고, 논문에 <소치 허련의 완당 초상에 관한 소견>(《소치연구》 창간호, 2003) 외 다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