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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듣기 등록 2020.02.25 08:27 수정 2020.02.25 08:27
오늘의 뉴스는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기상천외한 사건사고를 보면 이 사회가 어디를 향해 가는지 자주 비관하게 됩니다. 그러나 역사는 오늘의 비관을 발판 삼아 조금씩 진보해왔습니다. 때때로 퇴행을 반복했을지라도요. <오마이뉴스>가 20년 전 사건을 지금 되돌아본 이유입니다. 오늘은 비관하되, 내일을 낙관하려는 의지는 포기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렇게 여기까지 왔습니다.[편집자말]

2000년 4월 18일 <한겨레>에 실린 기사 ⓒ 한겨레

 
2000년 4월 18일자 <한겨레>에 제2회 안티 미스코리아 페스티벌 소식이 실렸을 당시, 나는 그 대회의 관객도, 출전자도 아닌, 스태프였다. 두 번째 행사만큼은 어떻게든 함께하고 싶었기에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축제 준비 실무진 일찌감치 참여했다. 첫해에 '입장 실패'라는 쓴맛을 맛본 경험 때문이었다.

1999년 서울 중구 문화일보홀에서 열린 제1회 '안티 미스코리아 페스티벌'을 보기 위해 찾아온 관객은 1000명이 넘었다. 행사장 규모가 400석이어서 돌아가야 했던 사람만 수백 명이었다.

설립한 지 3년이 채 되지 않는 잡지사인 페미니스트저널 <이프>에서 첫 단행본 출간을 기념하고자 기획한 작은 이벤트였기에, 주최 측도, 무대에 오르는 출전자도, 관객들도 이 정도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나는 축제에 함께하려고 대기하다 결국 입장에 실패하고 되돌아간 관객이었다. 행사장에 들어가지 못한 수백 명의 여성들을 목격하는 거로 만족해야 했다.

안티, 미스코리아
 

2000년 5월 20일 KBS 뉴스에 소개된 제2회 안티 미스코리아 페스티벌 ⓒ KBS

 
첫해에 그 열기가 대단했음을 목격했기에, 나는 단단히 준비했다. 2000년 제2회 안티 미스코리아 페스티벌을 앞두고 홍보 자료집을 제작하는 작업을 맡았다. 미스코리아 대회가 여성의 신체 사이즈를 얼마나 정형화한 척도로 재고 규정하는지 보여주는 정보와 함께, 당시 지역축제마다 난무했던 미인대회의 현황도 놓치지 않고 자료로 넣었다.  

지금도 소장하고 있는 당시의 자료집은 안티 미스코리아 페스티벌이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지향하고자 했는지 잘 보여준다.  
 

제2회 안티미스코리아페스티벌 자료집 ⓒ 조박선영

 
- 왜 심사위원이 아니고 격려단인가?
도대체 누가 누구를 심사한단 말인가? 왜 꼭 대상과 주체로 분리시켜서 경계를 나누고, 등급을 매겨야 하는가? 누구나 존재 그 자체로 아름답지 않은가? 우리 격려단은 단지 이번 행사에 출전한 이들의 용기와 그들이 뽐내는 아름다움을 격려하고 싶을 뿐이다.

- 왜 심사기준 하나 번듯하게 없는가?
사람들은 자꾸 우리에게 강요한다. 미인대회가 그렇듯이 안티 미스코리아 페스티벌도 이렇다 할 선정기준을 가져야 한다고. 그래야 권위적인 행사로 자리매김한다고. 그러나 우리도 할 말은 있다. 우리는 미인대회의 강박적인 심사기준을 거부하기 위해서 '안티' 행사를 마련했다. 누구나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기 위해.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도 당당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이 행사를 마련한 것이다.

그런데 자꾸 기준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심사하고 우열을 가리고 열등감을 느끼게 하라니 말이 되질 않는다. 모름지기 모든 대회나 경선은 '객관적인 기준을 가져야 한다'는 고정관념부터 벗어버리라고 말하고 싶다. 도대체 객관적인 것이 무엇인가. 객관적이라는 말은 정말 객관적인가. 이성을 차리고 생각해보자. (2000 anti misskorea festival 자료집 '심사유감' 중)

박미라 이프 초대 편집장이 쓴 '심사유감'은 이 축제가 '아름다움'이라는 주제로 재미있게 놀고 서로 격려하기 위한 행사라는 점을 구구절절하게 밝히고 있다. 유난히 여성과 사회적 약자에게 강요되는 억압적인 기준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객관성'이라는 함정에서 벗어나야 하며, 철저하게 주관적인 존재들이 숨 쉬고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지극히 당연한 말인데도 매우 색다른 주장으로 매체의 집중조명을 받았던 이 이야기는 2000년대의 새로운 담론 중 하나였다. 1970년대 경제개발을 거쳐 1980년대 민주주의의 요구로 사회적 몸살을 앓고, 1990년대 신자유주의를 통과한 2000년대 대한민국은 '다양성'을 둘러싼 요구가 포스트모더니즘과 함께 등장한 시기였다. 그래서 안티 미스코리아 페스티벌에서는 장애인도, 남성도, 노인도, 어린이도, 트랜스젠더도 모두 함께 존재를 당당하게 드러냈고 서로를 환호했다.
 

2003년 안티 미스코리아 페스티벌 공연. 성형 수술과 외모지상주의를 풍자한 '성형클론' ⓒ 오마이뉴스

  

제5회 안티 미스코리아 페스티벌이 열린 행사장은 시작전부터 발디딜 틈없이 많은 사람들로 성황을 이루었다. ⓒ 오마이뉴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나는 그때 그 무대가 가능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당시에는 사명감과 의무감, 조직에 소속된 책임감으로 행사를 진행했다. 아닌 게 아니라 2회, 3회, 4회를 거듭할수록 안티 미스코리아 페스티벌을 향한 여론의 관심은 특별하기보다는 상습적이었다. 매해 대체로 같은 매체에서 같은 방식으로 취재와 인터뷰를 요청해왔고, 안티 미스코리아 페스티벌이 열리는 5월이 되면 어디에서든 관련 기사와 방송을 보기가 어렵지 않았다.

화려한 무대와 관중의 갈채, 언론의 관심으로 스타가 된 참가자들도 있었다. 반면에 우울증으로 삶을 마감한 참가자들에 관한 비극적인 소식도 들렸다. 물론 비극적 선택의 이유에 '안티 미스코리아 페스티벌'이 있던 건 아니다. 그들이 스스로 생을 마감한 배경을 누구도 명확히 전달받지 못했다. 다만 그들이 '아름다움'과 '여성성'에 대해 남달리 깊게 고민하던 이들이었다는 사실이 그때나 지금이나 의미심장하게 다가올 뿐이다.

여성과 미를 둘러싼 고정관념은 안티 미스코리아 페스티벌이라는 무대에서 충분히 비판받았고 대중의 호응도 얻었다. 그 결과 2002년 공중파 방송에서 미스코리아 대회가 더 이상 생중계되지 않았다. 그건 분명 승리였다. TV에서 수영복과 요란한 파티복 입은 여성을 점수로 매기고 품평하는 장면이 공공연하게 방영되지 못하게 됐다는 건 속이 다 시원해지는 일이었다.
 

2004년 5월 9일 안티미스코리아 페스티벌 격려위원단이 '굿바이 미스코리아, 고별행진'을 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동영상 하이라이트] 마지막 안티 미스코리아대회 "안티미스코리아는 한국에서 성공한 대표적인 안티운동이다. 미인에 대한 잘못된 사회인식을 바꿨고, 공중파TV의 미스코리아 대회 중계방송을 추방했다. 안티조선운동도 아직 (성공) 못한 걸 해냈다. 내년에는 새로운 페미니즘 축제를 열겠다." ⓒ 오마이TV

 
그렇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문제가 사라진 건 아니었다. 그리고 축제는 6회(2004년)를 마지막으로 끝났다. 표면적으로만 사라졌을 뿐이었다. 더 다양하고 집요하게 자리 잡은 우리 안의 억압들은 이야기되지 못한 채.

페미니즘 리부트

시대는 사람들의 의식보다 더 빠르게 변했다. 지상파 채널보다 케이블과 종편 채널이 압도적인 숫자로 늘어났다. 현실적으로 모순되거나 불가능한 조건의 모델을 이상향으로 제시하는 토크 프로그램, 리얼리티쇼, 서바이벌 대회 등은 훨씬 더 노골적인 방식으로 개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동시에 온라인에서는 TV 채널보다 더 많은 개인들의 계정이 유튜브 같은 플랫폼으로 자유롭게 펼쳐졌다. 바야흐로 1인 미디어 시대가 된 것이다.

그렇게 각 개인에게 발언권이 넘어간 온라인 세상의 자유분방함에 나는 별 관심이 없었다. 결혼하고 아이 낳고 '무직'의 주부로 살면서 온라인의 언어들은 현실의 나와 완전 별개의 것이었다. 육아나 요리정보를 얻기 위해 아이들이 모두 잠든 저녁 시간에만 온라인에 접속할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눈이 번쩍 뜨인 건 2015년 페미니즘 커뮤니티인 '메갈리아'의 탄생을 보면서부터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논란들이 신선했고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어느새 나는 메갈리아의 유저가 됐고, 그곳에서 여성의 이미지들이 불법적으로 촬영돼 범죄에 사용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강남역여성살인사건이 발생한 지 이틀이 지난 2016년 5월 19일 오후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 인근에서 피해자를 추모하는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 이희훈

 
그리고 2016년 5월 강남역 어느 노래방 화장실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의 피해 여성을 같은 연령대의 여성들이 추모하는 물결이 온라인을 넘어 오프라인으로 퍼지는 것을 봤다. 강남역 10번 출구에 붙어 있던 포스트잇의 노란 물결은 인상적이었고, 거기 적혀 있던 문구들에 많은 다른 여성들이 공감하는 놀라운 현상에 감격했다.

여성들이 '여성'이라는 사회적 조건을 고민하고 이야기하며 공감대가 형성되자, 다시 페미니즘이 떠올랐다. 2017년, 나는 페미니스트저널 이프(1997년) 창간 20주년을 기념해 페미니즘 도서 전문 출판사 '이프북스'의 편집장이 됐다.

그 과정에서 내가 목격한 온라인의 담론은 여성들이 자신의 몸에 대한 결정권을 스스로 갖겠다는 요구들이었다. 낙태죄 폐지 운동의 모토로 '나의 몸은 나의 것'이라는 문구가 퍼졌다. 대학로와 광화문에서는 2018년 일년 내내 여성들이 모여 불법촬영 규탄 시위를 열고 '여성의 몸을 함부로 찍어 유통하지 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 해 동안 여섯 차례 모였던 참여자의 누적 집계 수는 약 36만 명에 육박한다.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 40년이 넘게 살았던 나로서는 대단히 신선한 충격이었다. 여성들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당할 수 있는 사회적 폭력을 공공연하게 이야기하고 대안을 주장하고 요구하기 위해 그렇게나 많이 지속적으로 모일 수 있다는 건 분명 '힘'을 확인하는 계기였다. 무엇이든 내가 원하는 것을 요구하고 할 수 있겠다, 꼭 해야겠다는 의지와 자존감이 살아나는 경험이었다.

무엇보다 페미니즘 도서 전문 출판사를 운영하는 편집장 입장에서라도 이런 흐름은 놓칠 수 없는 중요한 키워드였다.

탈, 코르셋
 

젊은 여성들은 자신의 온라인 계정에 부러뜨린 립스틱, 잘라버린 머리카락 사진을 올리고 '꾸미지 않을 자유'를 외쳤다 ⓒ pexels

 
'여성성' '자존감'이라는 키워드는 또 다른 흐름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는데, 바로 탈코르셋 운동이다.

2017년 무렵부터 인스타그램 등 소셜미디어에 '탈코르셋'을 인증하는 게시물들이 올리오기 시작했다. 젊은 여성들은 자신의 온라인 계정에 부러뜨린 립스틱, 잘라버린 머리카락 사진을 올리고 '꾸미지 않을 자유'를 외쳤다. 사회가 여성에게 강요해온 외모적 기준과 여성성을 온몸으로 거부하겠다는 뜻이었다.

2018년 3월에 이프북스에서 출간한 <근본없는 페미니즘>에도 탈코르셋 운동에 대한 언급이 있다. 책에서는 2015년 8월 10일 메갈리아 사이트의 '코르셋 깨우기'라는 프로젝트를 소개했는데, 내용은 이렇다.
 
"여성들이 코르셋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진행된 프로젝트로 제모와 낙태, 다이어트, 패션, 성폭력 등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모든 종류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을 독려하기 위해 이미지를 게시하고 공유했던 온라인 행동을 말한다. 페이스북 메갈리아4 페이지에서만 200회 이상의 공유와 1100개 이상의 '좋아요'를 기록했다."

이미 2015년부터 '코르셋'으로 상징되는 억압된 여성성에 대한 심리적 반감이 온라인을 기반으로 제법 형성돼 있던 셈이다.

2019년 1월 펀딩 플랫폼 텀블벅에서 단행본 출판 후원이 실시된 <탈코일기>는 8000명 이상 후원했다. 해외 래디컬 페미니스트 유튜버들도 한국의 탈코르셋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는 포스팅을 업로드하고 있다. <탈코르셋 : 도래한 상상> 등 탈코르셋을 정면으로 다룬 책이 여럿 출간됐고 베스트셀러로 등극했으며 관련 기획기사가 여러 매체에 나오고 있다. 국내 유튜버들도 코르셋, 외모, 편견, 차별을 경쟁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제 여성이라면 누구든 '탈코르셋'이라는 단어의 상징성을 고민할 수밖에 없는 세대에 살고 있다. 코르셋을 입을 수도 벗을 수도 있지만 무시할 수는 없는 2020년이다. 

단언컨대 앞으로 더 많은 여성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코르셋으로부터의 자유를 선택할 것이다. 여성의 정의를 새로 쓰는 여성들의 행동과 연대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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