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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듣기 등록 2020.02.14 09:05 수정 2020.02.14 09:05

비닐을 먹고 살지 않는 이상, 우리가 섭취하는 모든 음식은 잘못 보관하거나 오래되면 상하기 마련이다. 와인도 예외가 아니어서 기대감에 부풀어 마셨다가 변질된 맛에 당황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더욱 안타까운 예는, 상태가 안 좋은 와인을 마시고 있음에도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다. 경험이 적으니 와인은 원래 그런가 보다 한다(내가 그랬다).
 
와인은 오래 묵힐수록 좋은 거 아니냐고 무턱대고 얘기하는 이들이 있다. 마트에서 1만 원대 와인을 구입해서 5년 묵혀 드셔 보시라. 오래 묵힐수록 맛있다고 한 사람한테 화가 솟구칠 것이다. 물론 일부 고급 와인은 최소 15년 이상 묵혀야 그 진가를 제대로 음미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와인도 30년 이상 지나면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기 어렵다. 내 경우 의도치 않게(정확히 얘기하자면 '누군가'의 의도에 의해) 제대로 맛이 간 와인이 어떤지 직접 체험한 일이 있다.

와인이 뭐 이렇게 짜냐!

나는 주로 이마트 영등포점과 김포의 와인 아울렛 떼루아에서 와인을 구입한다. 하지만 간혹 백화점의 와인 매장을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 일반적으로 백화점은 마트나 와인 아울렛에 비해 와인 가격이 비싸지만, 눈도장 찍고 단골이 되면 의외로 고급 와인을 마트나 와인 아울렛보다 더 저렴한 가격에 구매할 기회도 종종 있다.
 
때는 2016년이었다. 내가 와인에 빠지고 1년 정도 지난 시점이다. 모 백화점 와인 매장에서 매니저에게 와인을 추천받고 있었다.
 
매니저: 이 와인 한 번 드셔보시겠어요?
임승수: 이탈리아 바롤로 와인이네요. 바롤로 좋지요. 2000년 빈티지이니 먹기 좋게 잘 익었겠네요. 바롤로는 숙성되어야 진가가 나오는 와인이잖아요.
매니저: 음... 그런데 작년에 이 와인을 시음해 봤는데 약간 맛이 갈 듯 말 듯 하더라고요. 와인 많이 좋아하시니까 이런 와인을 경험해 보는 것도 도움이 될 거예요. 대신 싸게 해서 5만 원에 드릴게요.
임승수: (와인서쳐에서 해당 와인을 검색한 후) 우와! 이 와인의 해외 평균 거래가가 20만 원이 넘는데요? 국내에서는 할인가로도 30만 원대일 것 같은데요. 정말 5만 원에 주시는 건가요?
매니저: 네에.

 
이렇게 매니저의 추천으로 마시게 된 와인이 바로 이거다.

주세페 에 필리오 마스카렐로 바롤로 몬프리바토(Giuseppe E Figlio Mascarello Barolo Monprivato) 2000. 
 

주세페 에 필리오 마스카렐로 바롤로 몬프리바토 2000 이 와인 덕분에 변질된 와인의 맛과 향을 제대로 경험할 수 있었다. ⓒ 임승수

 
주세페 에 필리오 마스카렐로Giuseppe E Figlio Mascarello는 와인 회사명, 바롤로Barolo는 포도가 재배된 이탈리아의 마을 이름, 몬프리바토Monprivato는 제품명. 네비올로 포도 품종으로 만든 와인이다. 이탈리아 바롤로 마을의 네비올로는 특히 뛰어나 따로 '바롤로'라고 부른다. '횡성' 한우 느낌으로 이해하면 좋겠다. 바롤로는 장기 숙성이 가능한 고급 와인이다. 셀러트래커Cellartracker에는 이 와인의 2000년 빈티지 시음적기가 2010~2020년으로 나온다. 그러니 2000년 빈티지를 2016년에 마신다면 일반적으로 잘 숙성된 바롤로의 훌륭한 맛과 향을 기대할 수 있다.
 
고급 와인을 엄청난 할인가로 득템했다는 생각에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2016년 9월 3일에 코르크를 열었다. 여느 때처럼 병 주둥이를 코에 바짝 대고 향기를 들이키는데, 어? 뭔가 좀 이상하다. 예상했던 향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와인에서 뿜어나오는 과실 향이 거의 없는 것 아닌가. 잔에 따랐는데 빛깔이 혼탁한 갈색이다. 아! 이거 완전 갔구나!
 
올림픽에 호기심 종목이 있다면 금메달감인 나 아닌가. 어린 시절 욕조에 물을 받아 꽝꽝 언 동태를 집어넣었다. 그러면 녹아서 헤엄칠 줄 알고. 청소년 시절 컴퓨터가 바이러스에 걸리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 일부러 바이러스 감염된 플로피 디스크를 구동하지 않았나. 이렇게 혼탁한 갈색인 데다가 과실 향이 전무할 정도로 변질된 와인의 맛은 어떨까? 호기심에 못 이겨 한 모금 들이켰다.
 

주세페 에 필리오 마스카렐로 바롤로 몬프리바토(Giuseppe E Figlio Mascarello Barolo Monprivato) 2000 ⓒ 고정미


우웩! 와인이 뭐 이렇게 짜냐? 간장도 아니고. 과도한 호기심의 결과는 언제나 같았다. 욕조에서 비린내 난다고 할머니에게 혼나고, 메모리에 바이러스가 상주해 컴퓨터 프로그램 실행에 문제가 발생했으며, 짠 와인(간장)을 부리나케 뱉어내고 입안을 격렬하게 헹궜다.
 
너무 당혹스러워 백화점 와인 매장의 매니저에게 바로 연락했다.
 
임승수: 와인에서 간장 맛이 나요. 너무 짜네요. 색깔도 완전 갈색이고요. 이건 정말 아닌 것 같아요.
매니저: 작년에는 애매하더니 올해는 완전히 갔나 보군요. 환불해 드릴게요. 아니면 추후 와인 구매하실 때 그 가격만큼 차감해 드리겠습니다.
임승수: 네에. 그러면 제가 이 와인을 가져가서 변질된 걸 확인해 드릴게요.
매니저: 아니에요. 안 가져오셔도 되어요.

 
일반적으로 교환 및 환불을 하려면 와인을 매장에 가져가서 변질 여부를 직접 확인해줘야 가능하다. 하지만 매니저는 이런 상황을 어느 정도 예측했던 것 같다. 다른 손님이었다면 이 와인을 추천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내가 와인에 매우 진지하게 접근하니 이런 경험도 도움이 될 거라 판단해 일부러 추천한 것 같다. 2015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마시면서 이 정도로 맛이 간 와인은 아직 없었다.

와인은 보관상태에 예민한 술  
 

12병들이 캐리어 와인셀러 초저가 와인셀러. 파산 방지를 위해 12병 이상은 집에 보관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 임승수


16년은 가뿐하게 버틸 수 있는 고급 바롤로가 그렇게 맛이 간 이유는 보관 상태 때문이다. 장기 숙성이 가능한 고급 와인이라고 해서 아무렇게나 굴려도 되는 것은 아니다. 직사광선을 피해 적정한 온도를 유지하며 눕혀서 보관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백화점은 고급 와인을 많이 취급하기 때문에 항온항습을 유지하는 대형 와인셀러를 설치해 보관에 더욱 신경 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혹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피할 수 없다. 그만큼 와인은 보관 상태에 예민한 술이다(피노 누아는 특히 더욱 예민하다). 지인에게 고급 와인을 선물 받았는데 묵혀서 마시겠다고 대충 진열장에 몇 년 처박아 놨다면, 온도 변화가 심한 한국의 날씨(특히 여름) 탓에 와인이 변질됐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이유로 와인을 진지한 취미로 생각하는 사람은 불가피하게 와인셀러를 구비한다. 다만 와인을 구매해서 며칠 사이에 바로바로 마시는 경우라면 굳이 와인셀러에 보관할 필요는 없다. 서늘한 곳이나 (여름에는) 냉장고에 보관하면 된다. 나는 거실에 12병 들어가는 초저가 캐리어 와인셀러가 있다. 와인 보관을 위해서라면 좀 더 큰 와인셀러를 구입했어야 하지만, 나에게 와인셀러는 좀 다른 의미가 있다. 12병들이 와인셀러는 일종의 족쇄다. 12병 이상은 집에 보관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에반게리온 초호기의 힘을 억누르는 구속구를 생각하면 된다). 만약 수십 병들이 와인셀러를 구비했다면 우리 집은 진작 파산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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