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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듣기 등록 2020.01.30 09:25 수정 2020.02.05 09:52
 

배운성 '세계도' 목판화. 1929년 바르샤바국제목판화전 특등상 수상작 '아트 인 컬쳐' 2001년 9월호에서 재촬영 ⓒ 황정수

 
[이전기사] 케테 콜비츠에게 배운 한국 작가, 왜 아직 몰랐을까

월북한 서양화가 배운성의 작품 48점이 2001년 발견되자 한국미술계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그동안 소설 같은 전설적 유럽 유학 이야기와 간혹 들려왔던 유럽 화단에서의 활약상은 대략 알려졌지만, 실제 그의 작품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저 먼 프랑스 파리에서 발견되었으니 더욱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때 발견된 작품은 대부분 유화 작품이었다. 그래서 주로 그의 유화 작품에 대해서만 언급되었다. 그러나 당시 유럽이나 한국에서 배운성의 미술 세계가 주목을 받은 것은 유화보다는 판화 부분에서 더 두드러졌다. 배운성이 한국에 돌아왔을 1940년 당시에도 한국화단과 언론에서의 관심은 그의 기구한 삶과 함께 뛰어난 판화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는 데에 있었다.

당시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가 대서특필한 기사에서도 배운성에 대한 언급은 '세계적인 판화가'라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실제 배운성은 여러 살롱전과 공모 전람회에서 판화로 입상하였으며, 개인전에서도 유화 못지않게 많은 판화를 전시하곤 하였다.

1927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살롱 도톤느에서 목판화 작품 '자화상'으로 입상하였고, 1934년에는 국제목판화 전람회에서 '초상화'로 입상하였다. 1936년에는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열린 세계목판화전에서 '미쯔이 남작 초상' 등 판화 네 점이 입선하였다. 또한 1937년 방소비만국목판화전람회에서 명예상을 받았고, 1938년에는 살롱 도튼느에서 목판화 네 점이 입선하는 등 꾸준히 판화가로서 성가를 높였다.

조국의 혼돈 속에 귀국한 배운성
 

쿠르트 룽애 '배운성, 고향 이야기를 들려주다'(1950년)와 속표지화 '배운성 자화상'(오른쪽) ⓒ 황정수

 
1940년 제1차 세계대전으로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하자 배운성은 일본 대사관의 도움으로 급히 귀국한다. 당시 배운성은 조국을 잃은 상태라 일본 국적으로 활동하였던 까닭이다. 여권도 일본의 보증 아래 받을 수 있었고, 유럽에서도 일본 외교관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살았다. 결국 돌아올 때에도 일본 대사관의 도움으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게 된다.

그는 파리에서 리스본, 하얼빈을 거쳐 도쿄로 가서 한 동안 머물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온다. 4개월에 걸친 긴 여정이었다. 배운성이 갑자기 한국으로 돌아오자 언론과 화단에서 지대한 관심을 보인다. 당시 미술가 중 명성이 있는 인물 대부분이 일본에서 유학하였기 때문에 유럽에서 18년 동안이나 공부하며 명성을 쌓은 배운성의 존재는 매우 신비로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화단의 지대한 관심 속에 귀국한 배운성은 어머니와 누이가 살던 돈암동에 거주하며 활동을 시작한다.

배운성은 귀국 초기 유명세로 화단에 자극을 주었지만, 미술활동이 그리 원활했던 것은 아니었다. 한국에서 태어나 일본, 독일, 프랑스를 거치며 수많은 역경과 체험을 겪었으나 돌아온 조국은 어려서 살았던 상황보다 더욱 험한 시절이었다. 그는 어려서도 희망이 없는 조국이었는데, 유럽에서 어느 정도 성공하고 돌아와서도 불행한 상황에 있는 조국을 맞는다.

더욱이 화가로서 한국에서 그동안 쌓아놓은 기반이 없어 활동에 제약이 많았다. 그동안 한국에서 활동한 경험이 없었고, 프랑스에 작품을 모두 두고 나와 자신의 능력을 보여줄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주로 그룹 활동을 하며 작품을 발표하나 독일, 프랑스에 있을 때처럼 활발하게 작업을 하지는 못한다. 더욱이 당시 한국의 상황이 일제강점 막바지에 이를 때이고, 일제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킬 즈음이라 정세가 매우 불안정한 시기였다.

미술계도 시국 변화에 따라 점차 위축되어 제대로 된 활동을 하기 어려웠다. 이미 서화협회는 활동을 멈춘 상태였고, 조선미술전람회도 겨우 명맥만 유지할 뿐 도록조차 내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선전에 출품하는 작품도 시국색이 강한 작품들을 내도록 유도하였고, 결전미술전 같은 전쟁을 선동하는 전시회에 작품을 내도록 강요받았다. 특히 유명세를 얻고 있었던 화가들은 활동에 더욱 많은 제약을 받았다.

이런 상황은 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 한국이 광복이 되고 나서야 경우 회복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신적 해방이 물질적 희망을 준 것은 아니었다. 해방이란 선물 이후에는 좌익과 우익이라는 이념의 갈등을 몰고 왔고, 결국 5년 만에 6.25전쟁이 일어나며 새로운 억압과 갈등의 시절을 맞이한다.

배운성의 뛰어난 판화 작업들
 

배운성 '수술' 1957년 ⓒ 황정수

 
배운성의 판화 작업은 그의 미술 수업과 함께 시작된다. 그가 베를린국립미술학교에 다닐 때인 1920년대, 작가로서 활발히 활동한 1930년대, 독일에는 판화 작업이 성행하였다. 특히 케테 콜비츠(Kathe Kollwitz)로 대변되는 민중의 삶을 표현한 표현주의 목판화가 주류를 이루었다. 이러한 환경은 배운성으로 하여금 목판화에 눈뜨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배운성의 전시 대부분에 목판화가 출품되었고, 화가로서 유화보다도 판화에서 더 높은 평가를 받는다. 여러 공모전에서 수상을 하였고, 전시회에도 출품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유럽에서 제작한 목판화는 현재 몇 점밖에 전하지 않는다. 다행히 실물 한 두 점과 도판으로 남은 것들이 있어 그의 솜씨를 일부나마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배운성의 판화 활동은 한국 근대미술사에서 매우 이른 시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미술사적으로도 매우 가치가 높다. 당시 한국에서는 판화 작업이 활성화되지 못하던 시기였다. 1939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야 최지원(崔志元)의 목판화 '걸인과 꽃'이 처음으로 입선하였고, 이후에도 판화 작업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니 배운성의 판화 작업은 한국인으로서 가장 빠른 시기에 이루어진 본격적인 작업이라 할 만한 특별한 일이었다.

배운성의 판화 솜씨는 귀국하여서도 이어졌지만 유럽에서만큼은 활발하지 못했다. 유럽에서 만큼 작업 환경이 좋지 않았고, 국내의 환경도 판화에 전념할 수 있는 상황이 되지 못했다. 또한 당시 화단의 관심이 주로 유화에만 있었고 판화에는 그리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현실에 맞추어 유화를 주로 그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1950년 6.25전쟁이 나자 이념에 따라 월북한다. 북쪽에서 자리 잡은 그는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비로소 자신의 장기인 목판화를 다시 본격적으로 제작하기 시작한다. 그가 북쪽에서 제작한 목판화 중 가장 대표적이면서 유럽에서 배운 솜씨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작품은 단연 '수술'이란 제목의 작품이다. '수술'은 극소품(9×10.5cm)으로 수술실의 모습을 세밀하게 묘사한 사실주의적 목판화이다.

직업에 충실한 노동자로서의 의사들의 활동을 진지하면서도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 수술에 전념하고 있는 의사 네 명의 수술실 모습을 세밀하게 묘사하였다. 흑백의 강렬한 대조 사이에 수술실에서의 긴장감과 무게감을 느끼게 한다. 얼굴 부분에만 살짝 색깔을 넣은 모습이 감각적이다. 그의 판화 양식이 독일식 표현주의와 사실주의가 내재되어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배운성 '장고춤' 1957년 ⓒ 황정수

 
배운성의 행적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목판화 작품 중에 '장고춤'이라는 것이 있다. 이 작품은 당대 최고의 무용가였던 최승희가 장고춤을 추는 장면을 판각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실제 춤추는 장면을 보고 작업한 것은 아니고, 당시에 무용 장면을 찍은 사진을 바탕으로 작업한 것이다. 물론 배운성은 최승희의 춤을 잘 알고 있었다.

배운성과 최승희는 매우 가깝게 지냈다. 당시 최승희는 사회주의 문학가인 안막(安漠)과 결혼하여 안국동에 살고 있었다. 최승희는 일본에서 공부하여 세계 각지를 다니며 공연한 국제적 감각을 지닌 천재적 무용수였다. 이에 걸맞게 배운성도 일본을 거쳐 유럽에서 활동하였으니 서로 통하는 바가 있었다. 마침 배운성도 1948년 남대문로 5가에 '배운성미술연구소'를 차리며 활동이 많아져 최승희와 자주 만날 수 있었다.

배운성은 하나의 소재를 가지고 여러 번 작업을 하였는데, 크기를 달리하거나 내용의 변화를 조금씩 주기도 하였다. '장고춤'은 1955년에 작은 크기로(15×8cm) 한 번 작업한 후, 두 해 뒤인 1957년에 크기를 키워(21.5×15.5cm) 다시 작업한다. 이 작품은 평양에서 열린 최승희 무용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최승희 무용 미술전람회'에 출품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배운성과 최승희는 월북 전뿐만 아니라 월북 후에도 가까이 지냈다고 한다. 두 사람은 평양에서도 같은 '예술인 아파트'에 살았다고 한다. 그만큼 가까웠으니 최승희에 관련된 전시회를 연다고 하였을 때, 누구보다도 먼저 작품을 출품하며 축하했을 것이다. 이 작품은 내용 면에서나 기법 면에서 좋은 점이 많아 배운성 후기 목판화를 대표하는 작품 중의 하나라고 할 만하다.
 

배운성 '소나무 밑 병사와 여인' 1955년 ⓒ 황정수

 
이밖에 북쪽에서 제작한 판화들은 대부분 소박한 한국의 풍속이나 풍경을 그린 것들이다. 특히 우리나라 전통 판화와 고전 속에 등장하는 목판에 관한 연구를 하며, 우수한 선묘 표현 기법을 받아들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의 대부분의 판화가 선묘를 바탕으로 한국 정서를 나타내려 한 것인 것은 이러한 노력의 결과이다.

배운성은 한국적인 색채에도 관심을 두어 사물에 맞는 함축적인 색을 쓰고자 노력했다. 한편으론 북쪽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사회주의적 건설을 반영한 현실 주제의 작품도 많이 제작하였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자신의 판화 연구에 커다란 성과를 나타내었을 뿐 아니라, 후배 작가들에게도 영향을 주어 조선적 양식의 판화 작업을 수립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배운성은 이러한 판화 작업 이외에도 유화, 수채화, 조선화 등 다양한 분야를 다루었다. 건강이 썩 좋지 못하게 된 말년에는 개성이나 주을온천 등에서 요양을 하기도 하였는데, 이때에도 그림 그리는 것을 쉬지 않았다. 그는 이곳에서 수채로 경치를 그리거나, 수묵으로 유적이나 인물들을 그리는 등 죽을 때까지 그림 그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배운성의 한 평생은 그리 평안한 삶은 아니었지만 늘 미술과 함께 하는 예술적인 인생이었다. 그는 독일, 프랑스에서도 그림을 그렸고, 귀국하여 남쪽에 있을 때나 북쪽에 가서도 늘 미술과 함께 살았다. 그는 평생 미술과 함께 한 천생 미술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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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국문학과 석사 과정을 마치고, 고교 국어 교사를 11년간 하였다. 2001년 교사 퇴직 후 줄곧 미술사 연구에 몰두하였다. 저서에 《경매된 서화》 (김상엽 공저, 시공사, 2005)가 있고, 논문에 <소치 허련의 완당 초상에 관한 소견>(《소치연구》 창간호, 2003) 외 다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