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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듣기 등록 2020.01.23 14:20 수정 2020.02.05 09:51
2001년 한국 미술계는 프랑스 파리로부터 뜻하지 않은 즐거운 소식을 맞는다. 그동안 이름은 알고 있었으나 월북한 데다 작품까지 전하지 않아 미술세계를 알 수 없었던 저명한 서양화가 배운성의 작품 48점이 한 번에 발견되었다는 소식이었다.

그동안 국내에 존재하는 작품이 한 점도 없었으니 놀랄 만한 소식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이 작품들은 모두 그가 유럽에서 귀국한 1940년 이전에 제작한 것으로 한국 근대미술사의 어두운 부분을 밝혀 줄 희귀한 것들이었다.
 
그동안 한국 근대미술사에서 1950년 이전에 제작된 작품을 50여 점 이상 남겨둔 화가는 몇 사람 되지 않았다. 30년 이전까지만 해도 '조선미술전람회의 기린아'라 불리며 명성을 날렸던 이인성(李仁星, 1912-1950)만이 유일하게 100여 점 이상의 작품을 남겨 놓았다. 이에 반해 동시대에 활동한 작가들은 거의 작품을 남기지 못하였다. 박수근, 김환기, 이중섭 등 명성을 날린 작가들의 작품도 대부분 6.25전쟁 후에 제작된 것들이었다.
 
그러던 차에 1988년 월북 작가들의 금지가 풀리자 새로운 작품들이 발굴되기 시작하였다. 많은 작품들이 새로 보고 되었지만 특히 임군홍(林群鴻, 1912-1979), 이쾌대(李快大, 1913-1965), 배운성(裵雲成, 1901-1978) 세 작가의 작품은 유족 등의 노력으로 여러 작품이 한 번에 발굴되어 한국 근대미술사의 지형을 바꾸는 획기적인 사건이 되었다. 이들 작품은 허술했던 근대기의 미술역사를 채우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먼저 1983년에 임군홍의 작품 100여점이 아들 임덕진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고, 1991년엔 이쾌대의 작품이 부인 유갑봉에 의해 보존되어 오다 아들 이한우에 의해 세상에 공개되었다. 이 두 사람과 달리 배운성의 작품들은 한 유학생에 의해 파리에서 우연히 발견되어 뜻하지 않은 작품 유전에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배운성의 특이한 삶의 유랑
 

배운성 ‘자화상’ 1930년대. 배운성(국립현대미술관, 2001) 재촬영 ⓒ 국립현대미술관

 
배운성의 작품 발굴과 함께 작가 배운성의 극적인 삶도 화제가 되었다. 집안의 몰락과 함께 다가온 가난의 그림자를 극복하고 새로운 삶을 개척한 그의 삶은 마치 고난을 극복하고 성공에 이른 조선시대의 영웅처럼 포장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특히 집안이 파산하여 부잣집 서생(書生)으로 들어간 일이 주인 집 아들의 몸종 노릇을 한 것으로 묘사되며 배운성 삶의 극적 요소는 최고치에 이르렀다.
 
실제 배운성은 명륜동에서 수공업을 하는 집에서 태어나 큰 어려움 없이 살았다. 그러나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그는 먹고 살기도 어려워 보통학교도 그만두고 낙원동에 살던 부자 백인기(白寅基)의 집 서생으로 들어간다. '서생'이란 남의 집에서 기숙하고 일을 해주면서 공부하는 소년을 이르는 말이다. 그는 매우 총명하여 주인집의 도움을 받아 중동중학교를 졸업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배운성이 백인기의 집에 서생으로 갈 수 있었던 것은 그 집에 같은 또래의 아들 백명곤(白明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명곤은 철없는 부잣집 아들처럼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늘 술집을 전전하며, 여자를 가까이 하고, 돈을 흥청망청 쓰고 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한편으론 음악에 관심이 많은 한량이기도 하였다. 특히 백명곤은 만도린과 색소폰을 잘 연주하였다고 한다. 그는 1922년 경성악우회(京城樂友會)가 중앙청년회관에서 주최한 모범음악연주회에서 색소폰을 연주할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다. 그러나 백인기는 이런 자유분방한 아들이 늘 걱정이었다. 그래서 총명한 배운성을 불러들여 늘 함께 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래도 달라지지 않자 백인기는 아들을 불러 "그렇게 한량처럼 살지 말고 외국으로 나가 견문을 넓혀라" 충고하고 외국으로 갈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외국으로 보낸다 하더라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백인기는 착실한 배운성을 붙여 보내기로 결심한다. 배운성이 아들 곁에 있으면 방탕한 생활을 덜 하지 않을까 하는 뜻에서였다. 그 길로 백명곤과 배운성은 일본을 거쳐 독일로 유학을 떠난다.
 
배운성의 유럽에서의 활동
 

배운성 ‘가족도’ 1930년대, 배운성(국립현대미술관, 2001) 재촬영. ⓒ 국립현대미술관

 
두 사람은 도쿄에서 공부하다 독일로 떠난다. 먼저 요코하마에서 프랑스 마르세이유에 들어가 머물다 독일 베를린으로 들어간다. 마르세이유에 머물 때 배운성은 그곳 박물관에서 유럽 미술의 명품을 접하고 큰 충격을 받는다. 훗날 배운성은 이때의 경험이 미술 공부를 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술회한다.
 
그러나 백명곤은 유학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3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간다. 이때부터 배운성은 백씨 집안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된다. 본래 경제학과에 입학하였으나 우연히 만난 독일 화가 후고 미트(Hugo meith)의 권유로 1923년 다시 레젠부르그미술학교에 들어간다. 한국인이 유럽 미술학교에 들어간 최초의 일이었다.
 
배운성은 레젠부르그미술학교를 졸업한 후 1925년 두 번 낙방 끝에 베를린국립종합미술학교에 정식으로 들어간다. 그는 이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여 1930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다. 그는 졸업 이후에도 우수한 성적 덕에 학교 아틀리에를 이용할 수 있는 특전을 받는다.
 
그는 이곳에서 자신의 대표작들을 그려내는데, 인물화에서 풍경화까지 다양한 그림을 그렸다. 소재로는 고향에 계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그리기도 하고, 자신을 도와 준 백씨 집안사람들을 그리기도 하였다. 비록 머나먼 독일 땅에 있지만 그의 그림 소재는 늘 고국의 모습이었다. 본인의 술회에서 보면 이러한 회화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다.
 
"나의 목표는 서양인이 그리는 서양화와 동양인이 그리는 서양화 간에 생기는 거리를 없애고 완전한 융화 속에서 실감을 체득하는 데 있었다."
 
이런 탓인지 그의 그림은 서양화 양식을 취하고 있지만 그림의 소재뿐 아니라 기법 면에서 동양적인 면이 많았다. 그는 유화, 수채화뿐만 아니라 동양식 수묵화를 자주 그렸으며, 뻣뻣한 서양화 붓이 아닌 부드러운 동양화 붓을 사용하여 화면을 부드럽게 다듬기도 하였다. 이런 화면은 서양인에게 이국적인 모습이었을 뿐 아니라 신비로움을 자아내는 멋이 있었다.
 
배운성의 이런 동양적 취향은 당시 프랑스에서 활동하며 세계적 명성은 얻고 있었던 일본인 화가 후지타 쓰구하루 (藤田嗣治, 1886-1968)의 영향이 컸다. 후지타 쓰구하루는 프랑스 유학 후 유럽 화가들과의 차별화를 위해 일본화에서 쓰는 작은 붓을 많이 사용하였는데, 이러한 기법이 유럽인들이나 다른 동양인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때 그린 배운성의 그림 중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그린 작품이 여럿 있다. 고난을 겪으면서도 자식을 위해 살았던 어머니를 그린 이 작품 속의 인물은 배운성 개인의 어머니일 뿐 아니라 당시 한국인 어머니들의 표상과도 같은 모습이다. 부드러운 동양 모필을 사용한 이 작품은 부드러운 배경에 인내에 가득 찬 인상을 지닌 한국 여성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프랑스에서의 활동과 귀국 후의 활동
  

배운성 ‘여인과 두 아이’ 1930년대, 배운성(국립현대미술관, 2001) 재촬영 ⓒ 국립현대미술관

 
배운성의 유럽에서의 활동은 점차 탄력을 받아 폭이 넓어진다. '압록강을 흐른다'라는 유명한 책을 쓴 한국인 작가 이미륵(1899-1950)과 가까이 지내며, 독일의 저명한 화가들과도 친분을 맺는다. 독일 사람들은 배운성의 그림을 좋아하여 주문도 늘어났고, 전시회에서는 그림도 제법 팔렸다. 또한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미술전에도 자주 참석하며 작품을 출품하였다.
 
1933년에는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열린 국제미술전에서 '여인초상'과 '자화상'을 출품하여 1등상을 차지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하였다. 그는 1933년과 1935년에는 베를린에 있는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한다. 당시 한국에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유럽에서 배운성의 활동은 괄목할 만하였다.
 
이런 유럽 각지에서의 활동은 결국 배운성을 세계 미술의 중심 도시 파리로 향하게 한다. 1937년 파리로 떠나 정착한 그는 권위 있는 '살롱 드 메'에서 여러 점이 입상하고, '르 살롱', '살롱 도톤느' 등의 전람회에도 참여한다. 이를 바탕으로 세계적인 화랑인 샤르팡티에서 개인전을 열게 되며 화가로서의 꿈을 이룬다. 이때 출품된 작품들 대부분이 한국의 전통 가무를 소재로 한 것이거나 한국의 무희 또는 풍속을 그린 것들이었다.
 
파리에서 잘 적응하여 살던 배운성은 독일군이 파리를 침공하자 급히 서울로 돌아온다. 프랑스 정부가 프랑스인들은 고성에 숨도록 하고 외국인들은 귀국하도록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18년만의 고국으로의 귀환이었다. 아쉬운 것은 너무 급히 돌아오는 바람에 그림을 전혀 챙기지 못하고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만치 당시의 상황은 다급하였다. 그는 돌아와 친일 문제로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으나 잘 극복하고 화단 생활을 이어간다.
 
1949년 홍익대학에 미술과가 생기자 학과장으로 초빙된다. 또한 같은 해 대한민국미술전람회가 생기자 심사위원으로 위촉되고 서양화부에는 추천작가가 되는 등 활발한 미술활동을 이어간다. 그러나 1950년 6.25전쟁이 터지자 이념에 따라 월북하고 만다. 그의 출생 이후 과정을 보면 이해가 되는 부분이 있으나 뛰어난 화가 한 명을 잃은 한국 화단으로서는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돌이켜 보면 배운성은 근대기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오랜 기간 유럽에 머물며 활동한 화가이다. 이종우, 나혜석, 임용련 등이 파리에 머물며 그림을 그린 적이 있으나 오랜 기간이 아니었고, 유럽 화단에서 눈여겨 볼 만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그에 비해 배운성은 유럽에서 미술 공부를 시작하였고, 그곳에서 많은 활동을 한 작가이다. 그런 면에서 한국 화가들의 유럽 진출 역사는 배운성을 중심으로 서술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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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국문학과 석사 과정을 마치고, 고교 국어 교사를 11년간 하였다. 2001년 교사 퇴직 후 줄곧 미술사 연구에 몰두하였다. 저서에 《경매된 서화》 (김상엽 공저, 시공사, 2005)가 있고, 논문에 <소치 허련의 완당 초상에 관한 소견>(《소치연구》 창간호, 2003) 외 다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