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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듣기 등록 2020.01.16 14:29 수정 2020.01.16 14:29
1910년대 안중식과 조석진이 지도한 '서화미술회'에서는 한국 근대미술사의 중심인물이 될 여러 화가를 배출한다. 오일영, 이용우, 김은호, 박승무, 이상범, 노수현, 최우석 등 누구 하나 부족함이 없는 인물들이 그들이다. 이들 외에 소정(小亭) 변관식(卞寬植, 1899-1976) 또한 정식 학생은 아니었으나 서화미술회에 출입하며 그림을 배워 성장한 화가였다.

변관식은 조선의 마지막 화원인 소림(小琳) 조석진(趙錫晋, 1853-1920)의 딸인 함안 조씨(咸安 趙氏)의 둘째 아들이다. 그러니 조석진에게는 외손자가 된다. 또한 조석진은 조선후기 저명한 화가인 임전(琳田) 조정규(趙廷奎, 1791-?)의 손자이기도 하니 변관식은 조정규의 고손 격이 되는 셈이다.

4대에 걸쳐 화업을 이은 화가 명문 집안이다. 그러니 변관식의 그림 재주에는 조정규와 조석진의 화가로서의 피가 흐른다고 할 수 있다. 세 사람의 호가 '임전(琳田)'에서 '소림(小琳)'으로, '소림(小琳)'에서 다시 '소정(小亭)'으로 한 글자씩을 이어받으며 대물림 한 것도 이러한 내림 그림을 상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변관식과 서화미술회 젊은 화가들의 고민
 

그림 그리는 변관식. 1975년. 이중식 촬영. '소정 변관식'(예경산업사, 1981) 재촬영. ⓒ 예경산업사

 
변관식은 12세 때 외조부인 조석진을 따라 상경하여 2년 후 지금의 종로 5가에 있던 어의동(於義洞) 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한다. 어린 시절부터 내림 그림이었는지 일본인 교사의 수신(修身) 과목 수업 시간에 몰래 그림을 그리다 그림 실력을 들킨다. 일본인 교사는 변관식의 재능을 대번에 알아보고 계속해서 그림을 그릴 것을 권유했다고 한다.

보통학교를 졸업하자 변관식은 조선총독부에서 세운 공업전습소(工業傳習所) 도기과(陶器科)에 입학한다. 이곳에는 외할아버지인 조석진이 촉탁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본래 이곳은 도자기를 만드는 곳이었으나, 변관식은 도자기 제작보다 오히려 도자기에 그림 그리기를 더 좋아하였다고 한다. 변관식이 훗날 도화(陶畵)를 자주 그린 것도 다 이때의 경험에서 시작된 것이다.

변관식은 2년 과정의 공업전습소를 마치고, 1916년부터 외조부인 조석진 문하에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다. 한편으론 조석진이 교수로 있던 서화미술회에도 연구생 자격으로 나가 그림을 배운다. 이때 만난 비슷한 또래의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며 평생 우정을 나눈다. 특히 김은호와는 유난히 친하게 지냈다.

당시 한국 화단은 새로운 미술사조의 유입과 함께 격변하는 시기였다. 조선시대의 미술교육기관인 '도화서(圖畫署)'가 폐지되고, 이를 대치할 새로운 본격적인 정규 미술교육기관이 없었다. 유일한 사설 교육기관이 '서화미술회'였고, 얼마 후에 김규진에 의해 '서화연구회'가 만들어진다. 이 두개의 미술교육 기관은 서로 대립하며 경쟁 관계가 된다.

당시 서울에는 이 두 단체 외에도 일본인 화가들인 시미즈 도운, 야마모토 바이카이, 구보타 텐난, 가타야마 탄 등이 운영하던 화숙이 있었다. 변관식 등 친구들은 일본 화가들의 새로운 작업을 보며 일본 미술 사조를 배우기도 하고, 직접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고자 하는 등 새로운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 또한 1922년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생긴 조선미술전람회에도 참여하며 화가로서의 성공을 꿈꾼다.

당시 변관식뿐만 아니라 김은호, 허백련, 이상범 등 괄목한 만한 활동을 하던 젊은 화가들은 주로 전통적인 조선 남화를 그렸으나, 한일병탄 후 새로이 일본으로부터 유입된 새로운 미술 양식 사이에서 자신의 길을 찾느라 매우 고민하던 시절이었다. 특히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하여 뛰어난 일본의 화가들이 심사위원으로 오자, 이들의 영향을 받은 이들은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새로운 문물을 배우고자 하였다.

변관식의 일본 유학과 일본화풍의 영향
 

변관식과 고무로 스이운의 산수화. ⓒ 황정수

 
1925년 변관식은 김은호와 함께 미술계 후원자로 유명한 이용문의 후원으로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나, 1929년까지 '신남화풍'을 접하면서 화풍의 폭넓은 발전을 꾀한다. 그는 도쿄에서 '일본남화원'을 세운 일본의 대표적인 남화가인 고무로 스이운(小室翠雲)의 문하에 드나들며 그의 화풍을 배운다.

고무로 스이운은 조선미술전람회의 심사위원으로 이미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고, 한국인 화가 김용수를 제자로 받아들인 적이 있는 친한파(親韓派) 화가였다. 고무로 스이운의 작품은 정교한 구성에 감각적인 수묵 처리와 수채화처럼 맑은 색감을 보여 현대적 느낌이 난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 이를 '신남화(新南畵)'라 불렀다. 변관식은 한동안 스승의 영향을 받으며 감각적인 신남화풍을 배우려 힘쓴다.

그런데 현전하는 변관식의 작품 중에는 그러한 느낌이 나는 것이 거의 없다. 아마 변관식이 일본 유학 후 신남화의 영향을 받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지 못하여, 점차 스승의 영향에서 벗어나려 노력을 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오히려 이를 계기로 자신만의 화풍을 얻으려 많은 노력을 한 것 같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실제로 고무로 스이운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지 의심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간혹 발견되는 변관식의 그림 중에 고무로 스이운의 영향이 가득한 작품이 보이는 것을 보면 변관식이 실제로 고무로 스이운의 화숙을 드나들었고, 실제로도 그와 비슷한 그림을 그렸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변관식의 금강산 실경산수 몰입
 

변관식, 옥류청풍, 1961년, 청전·소정(갤러리 현대, 2019) 재촬영 ⓒ 갤러리 현대

 
일본에서 돌아온 변관식은 서화협회의 일을 맡으며 본격적으로 한국 화단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그는 1937년 한국적인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작가적 소명을 가지고 금강산에 들어간다. 외금강, 내금강뿐만 아니라 금강산 주변을 돌아다니며 수많은 명승지를 사생한다. 이때 보고 사생한 경험은 훗날 변관식의 회화 세계의 중심을 이루는 큰 자산이 된다.

이후에도 변관식은 진주, 전주 등 경상, 전라도 각지를 돌아다니며 한국의 자연을 그린다. 평생 다시하기 힘든 사생 여행은 그의 작품 세계의 깊이를 더해 주었으며, 그의 독특한 필법인 '적묵(積墨) 화법'을 강하게 구축시켜 주었다. 갈필(渴筆)을 사용한 적묵법과 제멋대로 그은 듯한 선묘는 점점 더 더욱 거칠어졌고, 특유의 깊이 있고 그윽한 분위기를 만들어내었다.

그의 화법은 말년에 이른 시기인 1960년대 들어 절정을 이룬다. 춤추는 듯이 산만한 선들은 점차 리듬감이 생겨 자연스러워지고, 먹을 조금씩 쌓아가며 덧쌓은 화면은 종이에 스며들며, 실제 풍경에서 보이는 자연의 강인한 모습을 품격 있게 보여주기 시작한다.

특히 금강산 기행을 추억해 그린 만물상, 단발령, 삼선암, 옥류동, 진주담 등을 그린 풍경은 변관식 미술의 절정을 보여준다. 삼선암 같은 기세 있는 봉우리는 주로 직선을 사용하여 강하게 표현하였고, 만물상·단발령 같은 아기자기한 산들은 짧은 선들을 중첩하여 다양한 산세를 부드럽게 표현하였다. 이밖에도 '진주성 촉석루'를 그린 것이나 '무릉도원'을 그린 산수화 등도 필법이 무르익어 화가 말년의 원숙함을 보여준다.

변관식과 술에 얽힌 이야기
 

변관식, 외금강 삼선암 추색, 1959년 청전·소정(갤러리 현대, 2019) 재촬영 ⓒ 갤러리 현대

 
화가 '변관식' 하면 묵직한 그림과 금강산이 생각나지만 그와 가까웠던 사람들은 즐겨 마시던 '술'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그는 평생 늘 술을 가까이 하였는데, 주로 소주를 즐겨 마셨다. 그의 사생 여행은 늘 술과 함께였고, 화단 친구들과 문제가 생기게 만든 것도 술 때문이었다. 그만치 술에 관한 그의 일화는 많다.

해방 후 창설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아래 국전)의 심사위원을 하며 생긴 변관식의 '냉면 그릇 투척 사건'도 다 알고 보면 그의 성격과 술 때문에 생긴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시 국전은 심사위원 선정에 늘 말썽이 있었다. 이런 과정에서 서울대와 홍대를 중심으로 한 제도권 작가들이 주로 주도권을 가졌다. 그래서 재야에 있던 변관식은 자주 소외되는 상황이 생겼다.

한번은 심사 도중에 점심을 먹게 되었는데, 마침 건너편에 주류들이 앉아 있었다. 마침 반주로 소주 한 잔을 한 변관식이 건너 편 심산 노수현을 보고 냅다 냉면 그릇을 던졌다. 노수현은 상처를 입고 자리는 난장판이 되었다. 그동안 '국전'을 주도해 온 노수현·배렴·이상범 등에 대한 분노의 표시였다. 그만큼 변관식의 성격은 불같았고, 특히 술을 마시면 절제가 되지 않았다.

변관식의 그림 속에는 인물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대부분 몸을 앞으로 수그리고 어디론가 바삐 몸을 움직인다. 꼭 어느 목적지를 가는 것도 아닌데, 그리 바쁘게 가는 것은 혹시 술꾼이 술자리를 찾아가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옷매무새도 단정치 않고 갓도 흐트러지게 쓴 것을 보면, 술친구를 찾아가는 변관식 자신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많은 이들이 술만 자제했으면 변관식이 더 오래 살았고, 좋은 작품을 더 했을 것이라 아쉬워한다. 그러나 화가에게 술이 없으면 무슨 그림을 그렸을 것이며, 술 없는 인생이 변관식에게 무슨 즐거움이 있었겠는가? 오히려 술은 그에게 있어 그림을 그리게 하는 가장 좋은 원동력이 아니었나 싶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또 한 명의 아름다운 '화선(畵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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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국문학과 석사 과정을 마치고, 고교 국어 교사를 11년간 하였다. 2001년 교사 퇴직 후 줄곧 미술사 연구에 몰두하였다. 저서에 《경매된 서화》 (김상엽 공저, 시공사, 2005)가 있고, 논문에 <소치 허련의 완당 초상에 관한 소견>(《소치연구》 창간호, 2003) 외 다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