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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듣기 등록 2020.01.10 08:22 수정 2020.01.10 11:17
"정식이 집에 있넌가?"
"야. 구장님이 워쩐 일이래유?"
"집에 닭 한 마리 내 놓게."
"왜유?"
"어허 잘 알면서 그걸 묻나. 특경대원덜 대접 헐려구 허지."

김정식(가명)은 울며 겨자먹기로 닭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미 여러 차례 겪은 일이기 때문이다. 서울시경 특경대원들을 대접하느라 청대리 사람들마다 닭이며, 토끼, 개들을 있는 대로 내놓고, 돼지를 추렴하기도 했다. 특경대원 2명을 대접하는 일은 쉬운 것이 아니었다. 하루 삼시 세끼에, 저녁때마다 술안주로 고기를 내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특경대원을 대접하는 것은 당연히 구장의 몫이었다. 청대리 마을 주민들은 죽을 맛이었지만 싫은 내색을 할 수는 없었다. 특경대원들이 충남 보령군 명라면 청대리에 상주하기는 벌써 3개월째다. 이들이 청대리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면서 이렇게 오랫동안 마을에 상주하는 이유는 뭘까? 청대리 출신 김봉한을 검거하기 위해서다.

김봉한은 아직 돌도 채 되기 전인 아들을 만나러 왔다. 밤이 이슥한 시간에 김봉한은 방문을 살짝 잡아당겼다. 하지만 문은 안에서 잠긴 상태였다. "성동아" 아기 이름을 불렀다. 안해 한희전이 조용히 문을 열었다.

"들어 오세요." "고생이 많아요. 아기는 잘 크지요?" "네." 오랜만에 만난 내외(內外)가 정답게 담소를 나누는데, 천둥치는 소리가 났다. "손들어!" 석 달간 잠복(?)했던 특경대원들은 대어를 낚은 기분이었다. 조선공산당 당수 박헌영의 비선 김봉한을 검거했기 때문이다. 김봉한을 서울로 압송하는 특경대원들은 너무 신이 나 입이 귀에 걸렸다. 1948년 11월 늦가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특경대원들은 서북청년회 출신으로, 김봉한을 검거하면 두 계급 특진 포상을 받기 때문이다. 이들은 1948년 제주 4.3사건 때 경찰로 특채되어 서울시경에 소속된 이들이었다. 이들은 정부수립 후 전국에 파견되어 공산주의 지도자들을 검거하는 특명을 받은 상태였다.
 
박헌영 비선(秘線), 김봉한
 

김성동 부친 김봉한 ⓒ 박만순

 
충청남도 예산 출신인 박헌영은 왜제강점기 때부터 조선공산당에 참여했으며, 해방 직후에는 재건공산당 당수를 맡은 이였다. 1946년 조선공산당이 불법화되면서, 그해 9월에 미군정의 검거를 피해 관속에 누워 영구차 행렬로 위장, 월북했다.

박헌영의 동지이자 조선공산당 총무부장 겸 재정부장 이관술은 조작된 '조선정판사 위폐사건'에 연루되어 그해 7월에 검거된 상태였다. 그렇기에 당시 공산주의자들은 남조선 땅에서 살얼음판을 걷듯이 비밀활동을 하기에 급급했다. 이런 정황에서 김봉한이 검거된 것이다. 그렇다면 김봉한은 어떤 인물인가?

1917년생인 김봉한은 유력한 양반가문의 장손이었다. 그의 조부 김창규는 15세 때인 1894년에 진사시에 입격한 인물로 1905년 을사늑약 때 자진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는 미수에 그쳤고 1910년 조선이 왜국에 강제로 합병되면서 자진을 한 우국인사였다. 김봉한은 대흥보통학교를 나온 후 한학을 궁구(窮究)하는 한편 와세다대 통신강의로 학업을 이어갔다.

그는 이런 노력의 결과 숙명여전에서 수학강사를 했다. 왜제강점기 때부터 공산주의 활동에 참가한 그는 해방 후 남로당 충남도당 문화부장을 맡았다. 식민지 시절부터 박헌영, 이관술, 이현상과 교유한 그는 해방 후 조선공산주의 운동의 튼튼한 버팀목이었다. 하지만 그의 구실은 주로 박헌영 당수의 비선이었으므로 세상에 노출되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농민운동과 남로당 충남지역 간부를 맡으면서 검·경 수사진의 과녁이 되었다.
 
사상전향 요구에 일소(一笑)한 혁명가

김봉한이 서울시경에 검거되자 그의 아버지 김세진은 아들의 구명운동에 동분서주했다. 공주 출신 박충식을 찾아갔다. 박충식은 경성법학전문학교를 나온 뒤 화신산업 간부로 일했으며, 중앙신문사를 경영하기도 했다. 그는 1948년 제헌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고, 제2대(민국당), 4대(자유당), 5대(민주당) 국회의원에 당선된 유력인사였다. 그런 박충식은 김세진의 매제였다. 즉 김봉한은 박충식의 처조카였다.

"매제, 내 아들 좀 살려 주게."
김세진의 요청에, 박충식은 답했다.
"좋습니다 형님. 다만 조카가 언약을 하나 해줘야 해요."
"그게 뭔가?"
"공산주의 사상을 버리는 겁니다."

김세진은 박충식의 언약을 듣고, 아들 면회를 가 매제의 이야기를 전했다. "그러니까 공산주의 사상을 버린다는 말만 해주면 너는 이 시간부로 석방될 수 있다." 김봉한은 아버지의 사상전향 요구에 '피시식' 웃고 말았다. 감히 아버지의 이야기에 대놓고 반기를 들 수 없었기에 일소(一笑)한 것이다.

아버지의 사상전향 요구를 거부한 김봉한은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그는 이관술과 함께 대전 산내 뼈잿골에서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불법 처형되었다. 그는 집안 배경으로 석방되는 길을 걸을 수도 있었지만, 사상의 신조를 지키는 것을 금과옥조로 삼았다.
 
"내가 땅 한 뼘이라도 가졌으면....."
 

김성동 어머니 한희전 ⓒ 박만순

 
'달뜨기마을'이라는 마을 이름처럼 아름다웠던 한희전은 어릴 때부터 총명했다. 충남 홍성군 홍동면 월현리 출신의 그 여자는 김봉한과 내외의 연을 맺은 뒤부터 조선 현실에 눈을 떴다. 남편이 사회과학 서적을 주면서 학습을 게을리 하지 말 것을 권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한계>, <레닌주의의 기초>, <볼셰비키 혁명사> 등 책을 김봉한이 보내면, 그 여자는 몇 번씩이고 반복해서 읽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중도에 작파하면 안 되오. 끝까지 읽고, 반복해서 읽으면 이해가 갈 것이오." 한희전은 남편이 권하는 대로 했다.

또한 혁명가요도 달달 외웠다. 임화 작사, 김순남 작곡의 노래는 모두 외울 정도였다. 이런 열성을 인정받아, 그 여자는 해방 후 부녀총동맹에 가입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김봉한 식구에게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김봉한은 대전 산내에서 학살되었고, 그의 식구들은 북한군 점령기에 충남 보령군 명라면의 주요 직책을 맡았다. 김봉한의 아버지 김세진은 토지분배위원장을 맡았고, 안해 한희전은 여성동맹 위원장을 맡았다. 또한 김봉한의 동생 김용한은 민주청년동맹 위원장을 맡았다.

혁명열사 유가족에 대한 예우였지만, 단순히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특히 한희전의 경우가 그렇다. 그는 한국전쟁이 나기 전부터 부녀총동맹 활동을 했고, 여성지도자로서 보령지역에서 인정을 받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토지분배위원장을 맡은 김세진은 자신의 직책을 이용해 부당이득을 취하지 않았다. '토지분배위원장'을 맡은 것이 자의도 아니었지만, 그 직책을 맡고서도 자신은 땅 한 뼘 갖지 않았다. 토지를 공평하게 나누었을 뿐이고, 자신이 그 수혜자가 되는 것은 철저히 거절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만큼 청렴결백한 선비였다.

이러한 내력으로 그가 국군수복 후에 보령경찰서에 '부역자' 혐의를 쓰고 연행되었지만 김세진은 경찰서에서 따귀 한 번 맞지 않았다. 마을 주민들이 연판장을 돌렸기 때문이다. '그 어르신은 주민들에게 해가 되는 일은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붉은 씨앗이로군!"

김봉한의 아버지가 군경 수복 후에 처벌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 집안이 무사했던 것은 아니다. 한희전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년형을 선고받아 수감생활을 했고, 이후에도 그 여자는 투옥과 집행유예 생활을 반복해야 했다. 아우 김용한은 대한청년단원들한테 맞아 죽었다.

나머지 식구들도 '빨갱이 집안'이라는 낙인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1960년 4.19혁명 직후 김세진은 대전경찰서 대공과에 연행되었다. 또한 1961년 5.16 군사쿠데타 후에도 연행되었다. 즉, 정치적 격변기 때마다 김봉한 집안은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요시찰인'으로 낙인이 찍혀 연행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김세진이 5.16 군사쿠데타 후 연행되었을 때 이야기이다. 그의 손자 김성동(당시 15세)이 청양 산지기 집에 피난 갔다 돌아왔는데, 할아버지 면회를 가기 위해 아래 무당집에서 쌀을 얻어왔다. 할머니가 밥을 해 할아버지 면회를 갔는데, 면회가 허락되지 않았다. 손자는 터벅터벅 걸어오다가 도시락 생각이 나 그 자리에서 도시락을 열었다. 게눈 감추듯 도시락을 먹어 치운 그는 '할아버지가 경찰서에 오래 있었으면 좋겠다'는 철없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김봉한 집안의 빨갱이 낙인은 그의 아들 김성동(1947년생)에게도 이어졌다. 1965년 입산한 김성동이 일본 고마자와 대학에 가려는데, 신원조회에 걸려 좌절되었다. 그가 불가에 들어갔다가 하산한 직후인 1976년에 또 한 번의 시련이 있었다. 지효 스님이 그를 다시 고마자와 대학에 보내려 했으나 신원조회에 또 걸렸다.

김성동이 할아버지 손에 끌려 대전으로 이사한 것은 1958년 찔레꽃머리였다. 아버지가 닦달 받았을 도청 옆 법원에서 하염없어 하던 끝에 길을 잃고 헤매다 간신히 이사한 집으로 갔을 때였다. 할아버지한테 "왜 여기로 이사 왔느냐?"고 종주먹을 대던 형사를 문밖에서 배웅하는데, 삵의 눈으로 돌아보며 뱉던 말이었다. "붉은 씨앗이로군."

'붉은 씨앗', 그 말은 김성동에게 평생의 상처가 되었다. 그러기에 자기 집안 이야기를 주변에 하지 못하고 앓듯이 살아왔다.
 
요산문학상(樂山文學賞) 수상 후 대성통곡
 

증언자 김성동 ⓒ 박만순

 
요산 김정한의 삶과 문학정신을 기려 제정한 것이 '요산김정한문학상'이다. 김정한은 왜제강점기에는 민족해방운동을 했고, 해방 이후에는 일통과 반독재운동에 앞장선 인물이다. 주로 핍박 당하는 농촌현실을 주제로 소설을 썼는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민족문학가라 할 수 있다. 2019년 현재 대한민국에는 문학상이 약 400개가 있는데, 요산문학상은 누구나 받고 싶어 하지만 아무나 받을 수 있는 상이 아니다.

그런데 김성동이 '요산김정한문학상' 제36회 수상자로 선정되어 지난 2019년 10월 상을 받았다. 김성동은 1978년 소설 <만다라>로 유명작가의 반렬에 올랐지만, 이번 수상의 기쁨은 <만다라>가 베스트셀러에 오른 것보다 훨씬 컸다.
 

영화 만다라를 상영하는 극장 앞에 선 김성동 ⓒ 박만순

 
이번 수상 작품 <민들레꽃반지>(솔출판사)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야기를 그린 것이다. 집안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 영예의 요산문학상을 받은 것이 기쁜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금기어로 존재하던 '사회주의'라는 단어가 공적 공간으로 부활한 것에 대한 기쁨이다.

사실 작가 김성동이 아버지·어머니 이야기를 공론화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김성동은 소설가 안재성의 2013년 <이현상 평전>에 '남로당을 위한 변명'이라는 발문을 쓰면서부터 60여 년 동안 말 못하고 살아온 자신과 식구의 삶을 이야기했다. 단순히 자신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분단시대의 왜곡된 진실을 밝히기 위해 역사와 싸움을 선언했다.

그는 이후 여러 작품에서 해방공간의 정치·사회상을 객관적으로 그리기 위해 애를 썼고, 그것이 사회로부터 인정받은 것이 요산문학상 수상이라고 본다. 김성동은 이 상을 수상하고 나서 대성통곡했다. 그간의 아픔이 일시에 폭발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포함한 혁명가들이 70여년 만에 역사에서 부활하는 모습은 그에게는 꿈에서나 그려왔던 이상향이었다. 여전히 우리 사회는 이념의 대결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하지만 김성동의 진실을 알리기 위한 처절한 노력은 한 단계 진전된 사회를 만드는데 고귀한 디딤돌로 작용하지 않을까.
 
* 김성동의 뜻에 따라 '부부'를 '내외'로, '아내'를 '안해'로, '자살'을 '자진'으로, '역할'을 '구실'로, '공부'를 '궁구'로, '합격'을 '입격'으로, '일제'를 '왜제'로, '그녀'를 '그 여자'로, '타킷'을 '과녁'으로, '가족'을 '식구'로, '통일'을 '일통'으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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