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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듣기 등록 2019.11.29 20:34 수정 2019.11.29 20:34
2m나 되는 화폭이 조금씩 펼쳐지니 학생들은 "와! 뭐야? 큰데" 두런두런 소리를 냈다. 그러면서 설명을 기다리는 눈초리로 한 발씩 가까이 다가갔다. 강의실 분위기는 갑자기 달아올랐다. 
 
"우리나라 한국에서는 세월호가 침몰했습니다. 유럽으로 오는 난민들 배가 난파하는 일은 아주 흔하구요. 그래서 엠마누엘과 함께 '침몰과 재앙'을 주제로 작업했습니다."
 
그림에는 검은 수평선이 말없이 누워 있었고 절반 가까운 크기로 배 한 척이, 그 옆으로는 한뼘 크기 배 하나가 뒤집혀져 있었다. 사람들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가장자리 모래사장에서 일광욕을 하는 무리들이 태연했다.
 
우림의 발표가 끝나자 교수와 학생들이 힘찬 박수를 보내주었다. 우림은 충만한 기분이 들었다. 우연히 하게 된 공동작업이었는데...
 
그날 우림과 엠마뉴엘은 발표를 마치고 노르망디 해변으로 가서 캔 맥주와 2유로짜리 육포를 샀다.
 
"우리 듀오를 만들어볼까?" 기러기가 꾸룩하고 지나갈 때, 바닷바람이 짠내를 풍겨왔다. 둘은 맥주를 홀짝이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바람을 털어놨다. 축가라도 불러주는 듯 파도가 '쏴아'하고 밀려왔다. 매운 겨울바람에 손을 호호 불며 그들은 건배를 했다.
 

75070의 멤버 문우림과 엠마누엘둘은 문우림 집에 머물며 집을 갤러리로 만들었다. ⓒ 민병래

 
그렇게 해서 2015년 12월 겨울, '75070'이란 이름으로 껑예술대학 동기, 한국과 프랑스의 두 청년이 만든 듀오가 결성되었다. '75'는 파리의 지역코드, '0'은 슬러시, '70'은 파리에 있는 엠마뉴엘의 집 지번, 우리로 치자면 '광화문-70번지'라는 느낌으로 작명을 한 것이다.
 
넓은 세상 보고 오라고 등 떠민 아빠
 
"우림아, 이거 프랑스 가는 비행기표야."

2010년 수능을 망친 우림이는 미술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집에서 잠만 자며 시간을 보냈다. 그날도 눈을 떠보니 점심 무렵이었다. 아빠는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와 티켓을 내밀었다. 우림이는 잠이 덜 깬 눈을 비비며 표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넓은 세상 보고 오라"는 말에 등 떠밀려 친구들이 입학식을 치르는 3월 2일, 우림이는 파리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혼자서 하는 첫 번째 해외 여행! 입국절차를 밟고 나오니 드골 공항 로비는 넓디 넓은 광장이었다. 파리 시내로 가는 전철을 타야 하는데... 우림은 흑백으로 출력된 공항 지도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우림은 아빠가 원망스러웠다. "나보고 어떡하라고!?"
 
그렇게 발을 들여놓은 프랑스에서 우림이는 2018년 노르망디에 있는 껑예술대학에서 학석사를 마치고, 2019년 '경계인'이란 논문으로 소르본대학에서 석사학위를 하나 더 받았다.

티격태격, 짝퉁 퍼포먼스

"우림. 우리 보따리 장사, 짝퉁 전시회 한번 할까?"
 
엠마뉴엘이 조심스레 다음 작업 이야기를 꺼냈다. 껑에서 석사를 마치고 2018년 우림은 소르본에 편입을 했다. 엠마뉴엘도 파리에 자기 집이 있었기에 둘은 파리로 왔다. 둘은 엠마뉴엘 집을 작업실로 썼다.
 
"우리 동네에 노점상들이 많잖아? 대개 짝퉁이나 헌 옷을 팔고..."

어디나 마찬가지지만 프랑스에서는 '짝퉁'에 대한 시선이 특히 안 좋다. 미디어에서는 완전 위조가 아님에도 거의 범죄자 취급을 했다. 짝퉁을 사고파는 이들이 주로 이민자나 노숙자인 점도 작용을 했다. 
 
그런데 그들은 우림과 엠마뉴엘에게는 늘 만나는 친구들이었다. 할렘가에서 반갑게 인사하고 힘들 때 서로 말을 건네는 이웃들이었다. 엠마뉴엘은 이 퍼포먼스를 통해 그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세상에 전하고 싶었다.
  

문래동 창작촌에서 엠마누엘문우림과 엠마누엘은 문래창작촌에서 드로잉쇼를 했다. 그때 몰입하고 있는 엠마누엘. ⓒ 민병래

 
엠마누엘이 태어난 곳은 파리 할렘가 18구역. 집을 나서면 아랍 케밥, 중국집, 베트남 쌀국수 등 여러나라 음식점이 즐비했다. 그 동네는 지구촌 인종 전시장이었다. 골목골목에는 이민자들 좌판이 넘쳐났고 노숙자들은 담배 한 개비를 청하곤 했다. 그래서인가, 다양한 인종, 다양한 국적 사람들에 대해 엠마뉴엘은 잘 듣고 공감을 해줬다.
 
또 엠마뉴엘은 동화책과 사진집을 보면서 자라났다. 그의 아버지는 영화감독, 할머니는 동화작가였던 집안 분위기 덕분이었다. 그런 집안 내력과 동네 분위기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예술은 자연스레 그에게 스며들었다. "살아 있고 살아감을 확인해주는 행위"였다. 그래서 "펜과 종이를 든 성직자라는 느낌으로 살겠다"고 자주 말했다.
 
엠마누엘 제안대로 둘은 작업을 시작했다. 우림과 엠마뉴엘은 짝퉁이지만 하나뿐인 진품을 만들었다. 필라는 '폴라'로 노스페이스는 '노피스'로 살짝 틀었다. 나이키 신발, 말보로 레드, 모토롤라 휴대폰을 시멘트나 흙, 티셔츠를 이용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독특한 '짝퉁'을 만들었다.
 
"엠마뉴엘, 이거 얼마에 팔까?"
"우림. 네가 알아서 해."
 
75070 결성 이래 엠마뉴엘은 늘 이런 식이었다. 그는 작품 판매에는 도통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전시를 하면 기획과 운영은 우림이 맡았다. '짝퉁 전시회'를 진행하면서도 둘은 티격태격한다.
 
"이거 50유로는 받아야 해."
"너무 비싸지 않을까?" 엠마뉴엘은 돌아앉으며 "우림, 네가 알아서 정해"라고 한다.
이럴 때마다 우림은 짜증이 났다.
"엠마뉴엘, 관객이 작품을 사는 건, 우리 이야기, 우리가 흘린 땀을 사주는 거야!"

우림의 음성이 커진다. 그의 목소리가 높아질 때마다 근심이 돼서인지 엠마뉴엘의 할머니는 방 밖에서 기웃거린다. 엠마뉴엘은 그저 검은 눈만 끔벅일 뿐이다. 우림은 체념하고 혼자서 가격을 정한다. 우림이 판매가를 결정하는 기준은 간명하다. 재료비와 생활비다.
 
우림은 가난한 유학생. 시민운동가인 아빠가 보내주는 학비는 고작 30만원이었다. 껑예술대학에서는 생활비가 60만 원 정도였다. 소르본대학원에 편입, 파리로 오게 되면서 100만 원 이상으로 껑충 올랐다.
 
다행히 국립대학이어서 학비는 없었다. 그렇지만 방세와 생활비, 재료비 부담이 컸다. 소르본대학원은 이론과 학습 부담이 많아 아르바이트할 수 있는 시간도 별로 없었다. 
 
결국 아껴 쓰는 수밖에 없었다. 식비는 일주일에 5만 원 정도 장을 봐서 해결했다. 재료도 제일 싼 재료를 구매했다. 색감이나 질 차이가 있지만 감수했다. 티셔츠를 이용하는 작업은 재료 값만 40만 원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찾은 방안이 재활용이었다. 골목길도 뒤지고 때로는 쓰레기통에서도 재료를 주웠다.
 
그래서 우림은 이 작품으로 방값을, 저 작품으로 생활비를, 나머지는 맥주값이 되면 좋겠다고 정리해나간다. 그러면 엠마누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다행히 프랑스에서는 작품의 가격이나 의미를 잘 받아들이는 편이고 주말에 갤러리에 가서 놀자는 문화도 있어 판매가 쏠쏠할 때도 있었다.
 
우림과 엠마누엘, '75070'은 그렇게 짝퉁 전시물을 들고 에펠탑, 루브르박물관, 보자르대학으로 가서 노점을 펴고 사람들에게 열심히 작품을 설명했다. 때로는 엠마뉴엘이 "우림, 경찰 온다 튀어"라고 소리쳐 황급히 보따리를 싸 도망간 적도 있었다.
 

'100% 페이크' 노점 전시회 모습짝퉁 전시회를 할 때 파리 곳곳에서 좌판을 펼쳤다. ⓒ 문우림제공

   
사람들은 프랑스 최고 명문인 소르본대학원 출신과 껑예술대학 석사가 만든 '짝퉁' 제품과 노점 판매, 경찰에 쫓기는 장면을 재미있고 신선하게 바라보았다. 그런 우여곡절을 거치며 이 전시회는 '100% Fake(페이크)'란 이름으로 2019년 3월부터 6개월간 거리에서 계속되었고 인스타와 유튜브를 통해 많이 공유되었다.
 
나에게 예술은 일기이자 필살기
 
우림은 2019년 10월 25일 인천공항에 내렸다. 소르본대학 박사과정을 지원했지만 실패했고 28살 나이에 더 미룰 수 없는 병역의무 때문에 귀국을 했다. 그날 입국심사대 긴 줄 한가운데 서 있자니 우림은 10년 유학 생활이 떠올랐다.
 
떠밀려온 배낭여행에서 몽마르트 언덕의 화가들을 보고 멋있어 보여 유학을 결심했다. 기숙사 방에 우두커니 있어야 하는 일요일이 너무 싫었던 어학원 과정, 1년6개월이나 걸렸다. 돈이 떨어져 간장이랑 참기름으로 밥을 비비고 통조림 몇 개로 1주일을 버텼던 기억. 목감기로 벌꿀 시럽을 처방 받았는데 알레르기로 온몸이 붓고 빨간 반점이 뒤덥혔던 일주일. 이삿짐 아르바이트에 갔는데 엘리베이터도 없는 7층 건물이어서 20개 넘는 박스를 들어올렸다가 며칠을 누워 있기도 했고...
 
그런 시간 속에서 우림은 스스로를 '청년 예술가'로 세워나갔다. 그래서 우림은 자신에게 예술이란, 10년 세월 동안 쌓인 아픔을 곰삭히는 '일기'라고 말한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나는 이렇게 당당하게 서 있어!"라고 토해내는 외침이며 필살기라고 말한다.
  

성수동 대림창고에서 문우림은 10월에 귀국해서 문래동과 성수동을 둘러보았다. 성수동 대림창고 갤러리 앞에서. ⓒ 민병래

 
심사대를 빠져나올 무렵 청사 밖으로는 벌써 영종도의 달이 떠올랐다. 수하물 찾는 곳으로 우림은 엠마누엘과 함께 바삐 걸어갔다. 우림의 귀국길에 엠마뉴엘도 한국 구경을 하겠다며 함께 왔다. '75070' 결성 이래 잠시도 떨어지지 않았던 그들이다.
 
"엠마뉴엘, 넌 한국에서 뭘 제일 하고 싶어?" 붐비는 승객들 사이로 걸으며 우림이 재차 물었다. 엠마뉴엘은 인천공항 풍경을 구경하느라 질문을 건성으로 듣는다. 서둘러 왔건만 짐 찾는 곳은 사람들로 북새통이었다.

우림이 목을 길게 늘어뜨리고 수하물 레일을 바라보는데, 승객들이 공항 로비로 나갈 때마다 열리는 문틈 사이로 저 멀리 아빠의 모습이 보였다. 그도 우림을 본 듯 함박웃음을 지으며 어서 오라고 팔을 벌린다. 겅중겅중 뛰기도 한다.
 
우림은 자기도 모르게 아빠에게 달리기 시작했다. 엠마뉴엘이 놀라서 소리친다.
 
"우림. 왜 그래, 수하물? 수하물!"
 

<못다 한 이야기>

1. 엠마누엘은 11월 26일 프랑스로 돌아갔습니다. 한국에 있는 동안, 게릴라 퍼포먼스를 펼치기도 했고, 문래 창작촌에서 드로잉쇼를 하기도 했습니다.

2. 문우림의 아버지는 문종석으로 동대문에 있는 '푸른'이라는 시민단체를 만들어 30여년 가까이 마을공동체, 문해교육, 다문화도서관을 운영하는 시민운동가입니다.

3. 인스타그램 : https://instagram.com/_75070_?igshid=15drvzh2y342u
비메오 : https://vimeo.com/user54391780
공식 홈페이지 : www.75070.fr
 
<75070이 거쳐온 시간들>
  

"Andre Moon", nov 2019, 앙드레 문, 게릴라 퍼포먼스문래 창작촌 일대에서 진행한 게릴라 퍼포먼스. 가운데 둘이 엠마누엘과 문우림이다. ⓒ 문우림제공

   

"Friche Etex", sep 2019,프랑스 파리에서 2019년 9월에 열린 에텍스 단체전 ⓒ 문우림제공

   

"100% Fake", oct 2019,100% 페이크 단체전. 파리에서 펼쳐졌다. 이날은 좌판을 제법 크게 벌렸다. ⓒ 민병래

   

"Paradoxe #3", avr 2017,파라독스라는 제목으로 펼쳐졌던 2017년 전시회 ⓒ 문우림 제공

   

"Quelques Vivants", oct 2018,살아있는, 무엇. 듀오전 작품 중 하나. ⓒ 문우림 제공

  
<문우림과 엠마뉴엘의 B컷>
 

문래동 창작촌에서 엠마누엘그는 펜과 종이를 든 성직자 같은 느낌으로 살겠다고 말한다. ⓒ 민병래

 
 

성수동 대림창고에서 문우림성수동을 둘러보며 찍은 한 장 사진 ⓒ 민병래

 
 

우림의 동네 삼겹살집에서 한 잔 하는 75070엠마뉴엘은 한국 소주를 무척 좋아한다. ⓒ 민병래

 
<문우림과 엠마누엘의 프로필>
 
Woorim Moon 문우림
출생 : 1992년 대한민국(서울), 파리에서 거주/작업 중.
 
2013-2016 
Diplôme National d'Arts Plastiques(DNAP), 프랑스 예술대학(École Supérieure d'Arts et Médias de Caen) 껑 보자르, 학사졸업.
 
2016-2018 
Diplôme National Supérieur d'Expression Plastique(DNSEP), 프랑스 예술대학(École Supérieure d'Arts et Médias de Caen) 껑 보자르, 석사졸업.
 
2018-2019 
Diplôme d'Arts Plastiques, Créations et Placticités Contemporaines, Master II, 파리 1 판테온 소르본(현대예술, 창의성과 유연성 연구), 석사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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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manuel Mousset 앰마뉴엘 무쎄
 
출생 : 1993년 프랑스(파리), 파리에서 거주/작업 중.
 
2013-2016 
Diplôme National d'Arts Plastiques(DNAP), 프랑스 예술대학(École Supérieure d'Arts et Médias de Caen) 껑 보자르, 학사졸업.
 
3월-7월 2017 
Erasmus à Accademia Di Belle Arti, à Bologne(Italie), 이탈리아 예술 아카데미, 볼로냐 디 밸 아르티, 교환학생.
 
2016-2018 
Diplôme National Supérieur d'Expression Plastique(DNSEP), 프랑스 예술대학(École Supérieure d'Arts et Médias de Caen) 껑 보자르, 석사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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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및 경력)
 
10월 2016 
« Muralfresco » (25 mètre), Université, Cité Internationnale, Caen, France / 그레피티 콩쿠르 대상 수상, "뮈랄프레스코" 껑 국립대학교, 프랑스.

4월 2017 
« Paradoxe #3 », Galerie Igda, Caen, France / 겔러리 이그다, "파라독스 #3", 듀오전, 컹, 프랑스.
 
12월 2017 
« But en Or, 90+3 » à l'École Supérieur d'Art et Médias de Caen, France / 컹 예술대학 보자르, "골든볼 93분" 기획전, 컹, 프랑스.
 
10월 2018 
« Quelques Vivants », Galerie ICI, Paris, France / 겔러리 이씨, "살아있는, 무엇", 듀오전, 파리, 프랑스.
 
3월 2019 
Exposition « Supersub x 75070 » au Bar à Bulles, Paris, France / 겔러리&바 바 아 뷜, "슈퍼서브 x 75070", 협동전시, 파리, 프랑스.
 
8월 2019 
Invitation au Pop up « Coule & Friends » du collectif « Coule », Paris, France / "꿀 & 프렌드", 초청전, 파리, 프랑스.
 
9월 2019 
Exposition collective « Friche Etex », Paris, France / "프리스 에텍스", 단체전, 파리,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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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수필로 쓰는 만인보" 줄여서 '사수만보'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 민초들의 이야기를 빚어내는 일에서 보람과 즐거움을 느낍니다.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삶에 조명을 비추고 의미를 부여코자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