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21 08:56최종 업데이트 19.11.21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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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북도 정주에 있는 오산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이중섭(李仲燮, 1916-1956)은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 있는 문화학원을 다닌다. 졸업 후 귀국하여 한때 원산에서 지내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남쪽으로 내려온다. 이후 서울, 부산, 통영, 제주도 등을 전전하며 극심한 생활고와 정신적 어려움을 겪지만 이를 극복하고 한국 근대미술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뛰어난 작품들을 남긴다.

이중섭이 북쪽 출신으로 남쪽에서 활동할 때, 또 다른 뛰어난 화가 한 명은 남쪽 출신이었지만 북쪽으로 넘어가 활동해야만 하는 운명을 맞는다. 그 아까운 인물의 이름은 최재덕(崔載德,1916-?)이다. 그는 본래 남쪽 출신이었으나 사회주의 이념을 좆아 6.25 전쟁이 시작되자 북쪽으로 넘어간다. 참으로 아쉬운 순간이었다. 마치 휴전선 협정에 따라 금강산이 북쪽 땅으로 편입되었을 때의 아쉬움 같은 것이었다.


이중섭, 최재덕 두 사람은 동갑인 데다 모두 감성적인 성격에 서정적 취향의 그림을 그려 비슷한 점이 많았다. 게다가 신미술가협회라는 미술 단체에서 함께 활동한 가까운 사이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이들과 가까이 지냈던 화가 박고석은 "최재덕이 북쪽으로 가고 이중섭이 남쪽으로 왔으니 비긴 셈이다"라고 말하며 안타까워하기도 하였다.

화가 최재덕의 삶
 

신미술가협회 회원들과 최재덕(왼쪽에서 두 번째). <이쾌대>(열화당, 1995) 재촬영 ⓒ 열화당

 
최재덕은 경상남도 산청 출생으로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본명은 최재득(崔載得)이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최재덕은 서울로 올라와 보성고등보통학교를 다닌다. 고보 졸업 후 도쿄에 있는 태평양미술학교(太平洋美術學校)에 유학하여 서양화를 배운다. 미술학교를 졸업한 후 귀국하여 삼청동에 살다 결혼한 후에는 청운동에 거주한다. 그의 집은 2층 양옥집이었는데, 아내를 끔찍이 생각하는 애처가로 유명하였다.

화가로서 활동하며 1936년부터 1940년까지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계속 입선하였다. 일본에 머무를 때에는 이과전(二科展), 신제작파전(新制作派展) 등에도 입선하는 등 뛰어난 실력을 보인다. 1941년에는 도쿄에서 이중섭(李仲燮), 이쾌대(李快大), 진환(陳瓛) 등과 새로운 미술을 지향한 '신미술가협회'를 조직하고 도쿄와 서울에서 작품전을 가졌다.

서울에 살던 최재덕은 일본에 유학한 화가나 문인들과 가까이 지냈다. 특히 화가인 김용준과 김환기, 시인인 김광균과 오장환 등과 가까이 지냈다. 김용준의 증언에 따르면 최재덕은 김환기의 취미를 따라 백자 수집하기를 즐겼다고 한다. 시인 오장환이 최재덕의 소장품 중 명품 하나를 탐내 몰래 가져가려다 걸린 이야기는 유명하다. 김용준은 자신의 수필에서 이를 '아름다운 도적'이라 표현하기도 하였다.

광복 후 최재덕은 좌익 계열의 조선미술동맹 간부로 활동하다 곧 전향하여, 1949년 창설된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추천작가가 되어 '산'이란 작품을 출품하였다. 그러나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며 남침한 공산체제 세력을 따라 활동하다 결국 그들을 따라 월북한다. 북한 체제에서도 한동안 열심히 활동하였으나 1960년대 이후로는 숙청당했는지 활동 상황을 보기 어렵게 되었다.

최재덕의 작품세계와 현전하는 작품들
 

최재덕, 하얀 집의 테라스, 1941. <근대미술명품전2>(가람화랑,1995) 재촬영. ⓒ 가람화랑

 
최재덕의 그림은 신선한 색채 구사와 뛰어난 서정적 표현 감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화가로서의 재능은 익히 알려졌지만 그의 작품으로 현전하는 것은 몇 점 되지 않는다. 근대 유명작가 중 남아 있는 작품이 매우 적은 작가 중 한 명이다. 현전하는 작품은 대략 10여 점 뿐이다. 필자는 다행히 그 중 대부분을 실물로 볼 기회를 가져 최재덕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근대 미술 공부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이다. 이름도 생소한 월북한 화가 최재덕의 작품 수준이 높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큰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전하는 작품의 수가 너무 적어 작가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기껏해야 개인 소장의 '어항', '정물', '하얀 집의 테라스', '사슴' 정도가 있음을 아는 수준이었다.

이 중 '하얀 집의 테라스'라는 작품에는 재미있는 사연이 따라 다닌다. 이 작품은 본래 1941년 제1회 신미술가협회전에 출품되었던 작품이었다. 그런데 출품 당시에는 지금 전하는 작품의 크기와는 달리 아래로 더 긴 작품이었다. 그런데 격변기를 겪으며 아래 부분이 손상되는 일을 당한다. 그래서 1948년에 아래 부분을 잘라내고 새로 마무리하여 현재의 작품이 되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원작과는 매우 다른 구도가 되었지만, 현재의 모습만으로도 뛰어난 작품이라 하기에 충분하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우연히 최재덕과 가까워질 수 있는 다른 계기가 생겼다. 가까운 이가 소장하고 있던 장만영의 시집 '유년송' 속지에 최재덕이 허수아비를 그린 것을 볼 기회가 생겼다. 이때 처음 최재덕의 실물 작품을 직접 만져보며 그의 체취를 느낄 수 있었다. 미술품은 살아있는 생명체 같아 직접 손으로 만져 본 이후에는 마치 가족과 같은 느낌을 갖게 되는 마력이 있다. 그 때 이후 필자는 마치 최재덕이 친척이라도 된 듯 친근감을 갖기 시작하였다.

최재덕 작품 세 점을 한 번에 만나다
 

최재덕, 포도, 종이에 유채, 1950년 이전. ⓒ 풍서헌

 
최재덕의 작품을 좋아하게 되었음에도 이미 알려진 작품 외에는 작품이 너무 귀해 새로운 작품을 보기는 늘 어려웠다. 작품을 찾을 수 없으니 그의 작품 세계를 더 깊이 알기 또한 어려웠다. 그렇게 아쉬워하던 어느 날 하늘이 내린 듯 그 귀한 최재덕의 작품 세 점을 동시에 보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다.

서화 수장으로 유명한 서교동 풍서헌(豊緖軒) 선생 댁에 갔을 때였다. 그 집에는 기가 막히게 좋은 그림들이 많았다. 겸재 정선에서 박수근, 김환기, 이중섭 등 전설적인 화가의 작품이 즐비하였다. 좋은 그림 사이에서 황홀경을 경험하며 이런 저런 그림 얘기를 나누었다. 기분이 좋아진 선생은 더 좋은 그림을 구경시켜 준다며 방으로 이끌었다. 그때 보여준 것이 최재덕의 '포도', '원두막', '숲길' 등 세 점이었다.

세 점 모두 그의 명성을 증명하듯 빼어난 자태를 지니고 있었다. 그 중에 '포도'와 '원두막'을 구한 사연은 한국미술사의 한 장면으로 기록해도 될 만한 귀한 이야기였다. 본래 이 두 점은 '설야', '와사등' 등의 시로 유명한 시인 김광균 소장품이었는데, 유명한 미술사학자인 이동주 선생으로부터 소개 받은 것이라고 한다. 최재덕은 김광균의 시집 '기항지'의 표지 장정을 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으니 소장 내력을 알만 하였다.

작품을 소개 받은 풍서헌은 작품을 구경한 후 양도의 뜻을 밝혔는데, 소장자도 어느 정도 뜻을 보였으니 쉽게 이루어질 줄 알았다. 그러나 6개월이 되어도 연락이 없자 풍서헌은 애가 탔다. 혹시 그림이 다른 곳으로 가면 어쩌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다행히 얼마 후 미술을 애호하는 풍서헌의 마음에 탄복한 주인으로부터 가져가라는 연락이 와 대가를 지불하고 가져올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두 작품은 한국 미술사 전체에서도 보기 드문 뛰어난 구성과 색감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그 중 아주 작은 소품인 '포도'는 특히 인상적인 작품이다. 고급스러운 붉은 색을 배경으로 하여, 투박하지만 안정감 있는 도자기에, 잘 익은 포도 한 송이를 놓은 정물화이다. 천부적인 재능이 만들어낸 오묘한 색감의 구사로 이루어 낸 배경과 사물 간의 조화가 매혹적이다. 작지만 이토록 고급스럽고 격조 있는 정물화가 있을까 싶다.
  
'원두막' 또한 그림 내용이 정겨울 뿐 아니라 그림의 구성도 매우 감각적이다. 가로로 긴 화면에 원두막과 사람을 양쪽에 두면서 대조하여 그렸다. 왼쪽에는 비교적 커다란 원두막 하나를 배치하고, 오른 쪽 끝머리에 무엇인가를 인 어머니와 아이가 화면 앞으로 걸어 나오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뒤로는 산들이 어깨를 하고 나지막하게 연결되어 배경을 이루고 있어 자칫 단순함에 빠져버릴 수 있는 구도를 잘 채우고 있다.

이런 구성은 일제강점기 총독부가 주도했던 조선 향토색의 구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식민지 한국 풍경의 재현에 매몰되지 않고 구성이나 색감을 세련되게 써 현대적 감각을 보여주는 작가만의 독특한 미덕이 있다. 한국적인 정서와 서구 모더니즘이 잘 혼융된 새로운 감각이 돋보인다. 색채 면에서 전체적으로 황토색과 밤색을 많이 써 한국의 산야와 어울리는 면도 좋다.
 

최재덕, 숲길, 종이에 유채, 1950년 이전. ⓒ 황정수

 
'숲길'은 '포도'와 '원두막'보다는 더욱 본격적이고 완성된 느낌을 준다. 한여름 푸르름이 짖은 산의 모습과 들판의 푸르름을 형태를 무시하고 추상적으로 색깔의 변주만 조금 주어 화면에 무게감과 균형감을 주었다. 왼쪽에는 세 그루의 나무가 서 있는데 그 넉넉한 자태가 마치 최재덕의 후덕한 모습을 보는 듯하다.

왼쪽 아래에서 시작한 길은 오른 쪽으로 가로 질러 숲속으로 길을 재촉한다. 푸르름이 짖어 길이 좁아졌겠지만 그렇더라도 나무의 풍성함과 우뚝 솟은 것에 비하면 길의 폭은 지나치게 좁다. 보통 예술에서 '길'이라는 명사는 '인생의 길'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은데, 이 그림에서 보이는 길도 다가올 최재덕의 다사다난한 '인생길'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겠다.

더욱이 해방공간 시기에 남과 북의 갈림길에서 갈 길 몰라 하다 북을 택했던 최재덕의 방황을 생각하면, 그림 속에서 길이 가로질러 이어지다 결국 북쪽의 어둠을 향해 가는 모습이 마치 두세 명의 지식인 화가들이 갈 길을 찾아 고민하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렇듯 빼어난 감성으로 좋은 그림을 그렸던 최재덕이었지만, 북으로 가서는 자신의 화풍을 제대로 이어나가지 못한다. 그의 감성적이고 예민한 예술적 성향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주창하는 북한의 예술론과는 어울리지 않는 면이 많았을 것이다. 그가 계속 남쪽에 남아 그림을 그렸다면 또 어떤 작품을 남겼을지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앞서 박고석은 "최재덕이 북쪽으로 가고, 이중섭이 남쪽으로 왔으니 비긴 셈이다"라고 하였지만, 만일 "이중섭이 북쪽으로 가고, 최재덕이 남쪽으로 왔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두 사람의 위치가 바뀌었으면 어쩌면 남북의 미술이 지금보다 더 풍요롭게 되지 않았을까? 역시 역사에서 가정은 부질없는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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